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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r 11. 2017

인생을 던질 기회와 그 값

Appetizer#63 밀리언 달러 베이비

Look, if you had on-e shot, or on-e opportunity
To seize everything you ever wanted in on-e moment
Would you capture it, or just let it slip?


뜬금없이 영어로 글을 열었다. 그리고 그 뜻은 이러하다. “이봐, 만약 네가 원했던 모든 것을 잡을 기회가 단 한 번 있다면, 그 기회를 잡을 거야? 아니면 그냥 흘려보낼 거야?” 사실 이는 꽤 유명한 곡, 에미넴의 ‘Lose Yourself’의 도입부로, 이 랩은 그가 출연한 <8 마일>의 O.S.T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글의 주인공은 에미넴도, <8 마일>도 아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 곡을 잠시 빌려왔다. 이 곡이 영화의 주인공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상황과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인생을 걸 만한 순간에 관하여

‘Lose Yourself’는 매우 비장한 곡이고, 가끔 들을 때마다 삶에 의욕이 생기게 해주는 멋들어진 곡이다. 앞의 저 가사를 들으면 ‘당연히 잡아야지’, ‘그럴 기회만 온다면’ 등의 생각을 하고 의욕이 충만해지고는 한다. 그런데,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 가사에 태클을 건다. 의욕 충만한 답을 쉽게 말할 수 없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의 영화는 대개 ‘상처받은 남자’가 주인공이며, <밀리언 달러 베이비>엔 그 주인공이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그에게 인생 일대의 기회란 인생을 날릴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랭키는 친구인 스크랩(모건 프리먼)의 권투 인생과 한쪽 눈을 실명시킨 아픈 과거가 있다. 스크랩에게 기회였던 그 순간을, 프랭키는 반드시 막았어야 할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스크랩은 프랭키에게 새겨진 상처이고, 짊어져야 할 죄책감의 근원이다.


그날 이후, 프랭키는 결정적 기회엔 되돌릴 수 없는 리스크가 동반됨을 배웠다. 그리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이 상처를 끊임없이 찌르며 갈등하게 한다. 과거의 선택과 지금 해야 할 선택 앞에서 그 상처를 계속 소환한다. 그리고 꿈이라는 건, 그리고 그것을 향한 여정은 결코 뜻대로 되지 않고, 항상 멋진 미래를 준비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잔혹한 면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엔 있다.

 


패배를 통해 비추는 삶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스포츠를 소재로 삼지만, 스포츠에서 보이는 승리의 순간에 관심이 없다. 영화는 승리를 원하는 영화들이 추구하려는 정서를 배신하고, 열정과 꿈의 성취를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내레이션을 맡은 스크랩이 프랭키의 인생관을 설명하고 보강할 때만 권투 그 자체에 관해 말할 뿐이다. <더 파이팅> 같은 흥미로운 대결 장면이 애초에 이 영화엔 없다.


그 대신,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다양한 패배를 보게 하고, 그 앞에서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묻는다. 챔피언이 되는 단 한 명이 아닌, 챔피언이 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도전자 혹은 패자들에게 말을 건다. ‘패배할 싸움, 그리고 절망과 만날 그 싸움을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지? 그게 모든 걸 던질 만큼 중요해?’ 그리고 영화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답이 쉽게 나올 수 없는 질문들. 가치판단의 기준을 단 하나로 고정하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언제 봐도 깊고, 또 그래서 좋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2005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차지한 작품을 만나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자신의 작품에서 연기하지 않는다고 한,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스크린에서 그의 얼굴을 점점 보기 힘들 것이기에, 이번 재개봉은 정말 좋은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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