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읽남의 벌책부록 -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등굣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누가 봐도 주인공인 걸 알 수 있는 밝은 빛이, 그녀를 감싸고 있습니다. 남자는 과감히 그녀를 붙잡고 번호를 물어보는데, 여자는 핸드폰이 없다며 철벽을 치죠. 포기하고 돌아서는데, 여자가 갑자기 그를 붙잡습니다. 그러다 눈물까지 보이는 이 여자.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한파가 길어지는 게, 온기를 찾기 힘든 겨울입니다. 몇 번에 걸쳐, 시네 프로타주에서는 일본 멜로 영화를 보고 있는데요. 이번에 읽어볼 영화는 구독자 ‘물고기의익사’님께서 요청해주신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입니다. 부족한 프로그램 꾸준히 시청해주시는 것에 감사드리며, 또 언젠가 이렇게 구독자분들이 원하는 영화로 인사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REPLAY -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앞서 드라마틱한 만남을 했던 남자의 이름은 타카토시, 그리고 여자의 이름은 에미입니다. 에미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던 타카토시. 그가 동물원에서 기린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에미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타카토시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을 이미 봤다는 이상한 말을 하죠.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진짜 사귀는 사이가 됩니다. 에미는 몇 가지 특이한 행동을 보이는데요. 첫 만남, 첫 키스, 첫 고백 등 처음 하는 일에 눈물을 자주 보입니다.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한 인물이죠.
하지만, 요리에 초콜렛을 넣는 모습을 보면 뭔가 감히 잡힙니다. 눈치가 빠른 관객은 첫 만남의 눈물과 몇 가지 대사에서 에미가 미래에서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에미의 일기가 발견되면, 이 추측은 사실이 되죠. 에미는 타카토시의 미래에서 왔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이 두 세계는 시간의 순서가 정반대로 흐른다고 하죠.
여기서 조금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아주 난해한 편입니다. 타카토시의 미래는 에미의 과거이고, 에미의 미래는 타카토시의 과거이다. 조금 헷갈리는 분은 기준을 타카토시로 잡고, 바라보면 조금은 이해가 쉽게 뒬 겁니다. 그러니까, 타카토시의 기준에서 내일 만나는 에미는 오늘 만난 에미보다 하루 더 어리죠. 대신, 타카토시가 에미와 오늘 했던 일을 내일의 그녀는 전혀 모릅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타카토시는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걸 연기라고 생각하죠. 에미는 자신과 이전에 했던 추억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에 써진 대로 행동하죠. 그리고 당연히, 타카토시 기준에서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추억을 쌓을 수가 없습니다. 타카토시는 에미와의 시간이 축적되고 있지만, 그가 만나는 에미는 그와의 시간이 하나씩 소실되고 있죠. 이 영화는 시간의 축적과 소실이 동시에 진행되는 기이한 영화입니다.
그러다 타카토시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만났던 에미가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고, 그를 위해 모든 게 처음인 듯 연기했다는 걸 말이죠. 영화의 시점,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을 에미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타카토시에게 처음인 일은 에미에겐 마지막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겁니다. 에미의 노력을 깨달은 타카토시는 그녀를 위해 자신도 언제나 미소를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을 향해, 혹은 만남을 향해 가는 거죠.
Scene by Scene #1 일본 멜로의 감성
<러브레터> 편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연출 중, 창을 강하게 때리는 빛에 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멜로에서 정말 많이 볼 수 있고, 최근 개봉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서도 사용되었죠. 여전히 자주 사용되고 있는 연출 방법입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역시 창을 강하게 때리는 빛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빛을 과다하게 노출하는 연출을 볼 수 있죠. 이 영화는 눈이 부실정도로 조리개의 노출값이 높은 편입니다.
하나씩 살펴보면, 에미의 첫 등장 씬부터 이런 빛의 활용을 볼 수 있습니다. 무척 밝은 빛이 고마츠 나나의 매혹적인 얼굴을 감싸며 그녀의 매력을 더 강조하죠. 심지어, 이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는데, 감독이 이 영화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래서 얼마나 화면에 붙잡아두고 싶어 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하철 안에서의 일상적 순간은 엄청나게 강한 빛과 고마츠 나나의 얼굴이 만나 비일상적인 순간이 됩니다. 일본 멜로는 이렇게 서정성을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영상미로, 일상을 로맨틱한 판타지로 바꿔버리죠.
이런 빛의 연출 덕에 영화 속 다양한 공간은 더욱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서정적으로 표현됩니다. 영화에선 후시이미나리 등 교토의 공간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시간이 멈춘 듯한 교토 특유의 분위기를 잘 담아낸 연출이기도 했습니다.
Scene by Scene #2 서로 다른 시간과 시점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판타지 영화입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을 한 공간에 담는 시도를 했죠.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결국 엇갈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를 애틋한 멜로로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디테일 하게 따진다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면서 분명 개연성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시작 지점부터가 다르죠. 영화는 이 문제를 12시엔 반드시 이별하고, 다음 날 아침에 시간이 새롭게 시작한다는 설정으로 해결합니다.
에미와 타카토시의 시간은 보름달이 뜨는 날을 기준으로 많은 것이 바뀝니다. 15일째 되는 그날은 미래에서 온 에미나 과거에서 온 타카토시 모두 15일 동안의 추억을 간직한 상태였죠. 서로 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같은 날이 보름달이 뜨는 밤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두 사람의 관계도 최고조가 되죠. 15일이 지나면, 둘 중 한사람은 이별에, 한 사람은 만남에 다가갑니다.
처음에 타카토시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일은, 나중에 에미의 시점으로 다시 보입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이별과 만남,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그 독특한 순간을 모두 보여주죠. 이런 시간과 시선의 차이를 모두 보여준다는 점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Scene by Scene #3 순환하는 운명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하게 합니다. 영화는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죠. 영화는 이런 에미와 타카토시의 운명을 순환하는 이미지를 통해 자주 암시합니다. 원운동이 특히 자주 보이죠. 시계, 세탁기, 그리고 달까지 많은 이미지가 돌고 도는 운명을 상징합니다. 원은 끝과 끝이 이어져 있다고 하죠. 그래서 두 사람은 이별과 만남을 동시에 계속 진행하는 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을 무한히 지속하는 겁니다.
이 영화는 그런 정해진 운명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서로를 찾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운명적인 사람과 짧은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영화 한 편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만나야만 할 사람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이런 운명론적 로맨스가 일본 멜로의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결국,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는 연출적으로는 이와이 슌지의 영상미, 그리고 이야기에서는 많은 일본 멜로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멜로를 많이 본 관객일수록 익숙한 점에 식상함을 느낄 수도 있죠. 반드시 헤어질 수밖에 없는 연인,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짝, 그리고 서정적 분위기 속에서의 짧은 행복. 한국에서 신파가 유행하는 코드이듯, 일본 멜로 고유의 코드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연작으로 진행 중인 일본 멜로 영화 프로젝트도 이제 거의 끝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했던 영화들을 보면 일본 멜로만의 특징을 많이 찾아볼 수 있던 것 같습니다. 이밖에 일본 멜로만이 가진 고유한 연출과 특성엔 또 뭐가 있을까요?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자유롭게 댓글로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