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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기#029 수상한 그녀

그녀가 모성을 택한 이유

한국 영화에서 여성이 홀로, 주연을 맡아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가장 강렬했던 여주인공으로는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더 최근으로 올라와서 찾는다면 <세븐 데이즈>의 김윤진과 <은교>의 김고은이 있었죠. 여성이 단독 주연으로 선택받기 힘든 이유에는 액션씬 소화의 한계, 한국에서 인기 있는 누아르, 조폭 장르에서 역할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 등이 언급되고는 합니다.


한국의 여배우와 스크린

일각에서는 20대 여배우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우려를 표합니다. 10년 전에 인기를 끌었던 여배우들이 여전히 10년 전에 맡았던 역할을 맡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에 이는 흘려들을 수 없죠. 또한, 상업 영화관을 찾는 성비를 보면, ‘여성’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기에 여배우 원톱 영화의 제작이 어렵다고 제작 측에서는 말하기도 합니다. (성비를 제쳐놓고, 영화 선택에서 여성의 선택권이 더 크다는 통계도 제작사에서는 제시하고는 하죠) 이 말엔 여성은 멋진 남성들에게 끌릴 것이라는 단편적 생각이 숨어있는 셈이네요.


이러한 상업적 요인은 배급사가 영화에 끼치는 영향이 점점 더 커지는, 비정상적인 한국 영화의 현 구조에서 여배우의 입지를 더 좁게 만들 것입니다. 때문에 ‘심은경’이라는 20대 초반의 여배우 홀로 큰 짐을 맡은 <수상한 그녀>는 근래 보기 드문 종류의 상업 영화였습니다. 여성 원톱 영화, 거기에다 심은경은 현재 주목받는 20대 여배우들과는 조금 다르죠. 그녀는 흔히 말하는 미녀 배우로 주목받은 것이 아니었고, 이 영화는 여배우의 아름다움이 두드러지는 멜로 장르도 아니었습니다.


박보영과 심은경

<수상한 그녀>와 같은 날에 동년배의 박보영 주연의 <피 끓는 청춘>이 개봉했다는 점에서 <수상한 그녀>의 등장은 더 흥미롭습니다. <과속 스캔들>, <늑대 소년>으로 흥행에 성공했던 박보영의 신작이라는 점에서 심은경은 열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죠. 하지만 <피 끓는 청춘>에서 박보영은 영화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기존의 그녀가 보여준 예쁜 이미지에 조금 거친 성격을 부여받았을 뿐, 눈에 잘 띄지 않았죠. 그녀의 거친 역할은 연기 변신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큰 골격에서 보면 수동적인 캐릭터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미 전작 <늑대 소년> 때도 <과속 스캔들>에 비해 소극적이고, 그녀의 귀여운 ‘이미지’를 전시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거죠. 드라마 <학교>,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주목받은 이종석에게 필요했던 상품성 있는 상대 캐릭터 같았다고나 할까요. <과속스캔들>에서 보여준 능동적이고 개성이 있는 캐릭터와 시나리오가 아쉬웠습니다. 그녀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쉽게 할 수 있을 법한 캐릭터에 그녀의 시간을 소모해 버리는 일은, 그녀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하고 있는 관객에게도 큰 손해죠.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실망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왔습니다.


다행히도 <수상한 그녀>의 심은경은 어떤 영화에도 없는 여성 캐릭터를 맡았고, 그녀만의 매력으로 이를 소화했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을 가진 20대 소녀의 모습은 나문희의 모습이 오버랩 될 정도였고, 심은경이 전작들에서 보여줬던 코믹한 성격이 더해져 활기 넘치는 유일무이의 캐릭터를 만들어냈죠. 너무도 능청스럽고 정겨운 그녀의 연기는 지인들에게 영화를 추천하게 할 정도였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놀라움이 남아있습니다.


코믹함밖에 없을 것 같던 심은경이 영화 후반부에 성동일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시대 어머니(할머니)의 목소리를 낼 때 특히 놀랐었죠. 이 장면을 통해 심은경은 다른 역할, 다른 장르에서도 잘 뛰어놀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다음 영화를 더 기대하게 하죠. 이처럼 심은경은 이번 영화를 통해 과거 박보영이 보여줬던 소녀로서의 발랄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준 동시에, 박보영이 아직 보여주지 못한 영역의 연기까지 보여주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배우 기근의 한국 영화계는 원석이 아닌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를 선물 받은 셈이네요. 이제 이를 '어떻게 품을 것인가'라는 행복한 고민을 할 몫을 넘겨받은 생산자들이 그녀를 쇼윈도에 전시되는 이미지만으로 전락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정말 좋은 여성 원톱 영화일까

여배우에 대한 찬사가 먼저 나오게 되는 영화이지만 <수상한 그녀>가 정말 좋은 여성의 영화인지는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하는 여성 원톱 영화로, 심은경에게 카메라가 집중되어 있는 만큼 여성의 능동적인 시선과 행동을 기대할 수 있죠.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기존의 상업 영화들이 지키고 있던 여성에 대한 시선을 그대로 답습하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수상한 그녀>는 ‘오두리’라는 한국 영화사에 없던 캐릭터를 창조해냈지만, 이 소녀는 튀는 행동과 언어와는 달리 결국 가족을 향한 사랑과 모성으로 돌아오는, 한국 영화에 늘 있었던 어머니였죠. 이 영화가 관객과의 공감을 위해 만든 장치는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과 그것에서 오는 숭고함, 감동입니다. 이는 낡은 전개였고, 더불어 이러한 판타지마저도 여성을 집안의 존재로 돌아오게 해야만 했느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어떻게 보느냐는 개인차가 있지만 하나는 명확하죠. 심은경에게 집중된 카메라는 여성의 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한국의 보편적인 관객, 어머니들의 자식, 그리고 어쩌면 남성의 눈이었습니다.


노인과 할머니 그리고 6.25

극 중 오말순의 삶은 우리 ‘역사가 기억하는’ 전쟁 후 세대의 어머니 모습입니다. ‘역사가 기억하는’이라는 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를 배제하고서 노년의 삶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네요. 다시 찾은 젊음으로 늙음의 허물을 벗고, 자신의 욕망과 성에 대해 생각하는 오말순(오두리)의 모습을 보며 떠오른 영화는 역시 노년의 욕망을 다뤘던 <은교>입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은교>는 늙었다고 욕망을 상실하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며 그 욕망을 아름답게(혹은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표현하죠.


<수상한 그녀>는 도입부부터 이 문제를 건드릴 것이라 암시합니다. 대학생들이 늙음과 노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살펴볼까요. 그들에게 노인은 더럽고 냄새나고, 꺼려지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늙음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죽음에 가까이 있을 뿐, 젊은이들과 차별받을 이유가 없는 노년에게 대학생들은 벌을 부과해버리죠. 그들에게 노년은 내면마저 무기력하고 힘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부인하며, 노인의 정신에 20대의 몸을 가진 오두리를 탄생시킵니다.


<수상한 그녀>는 시대에 뒤처지더라도 그들 역시 꾸미고 싶고, 이성에게 끌리는 존재라는 점을 코믹하지만, 명확히 보여줍니다. 아, 뒤처진다는 표현은 부적합해 보이네요. ‘다른’ 시대를 살았을 뿐이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은 현재와 스타일이 달랐을 뿐 지금보다 덜 아름다운 외모, 스타일을 가지지 않았죠. 대신, 다른 '현재'를 겪고 장르가 다른 노래를 불렀을 뿐, 가창력이 뒤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는 달라도 여전히 매력 있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점을, 심은경의 젊은 몸과 나문희의 늙은 영혼의 결합으로 보여주죠. 영화는 묻습니다. 너희는 이래도 노년이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차별할 수 있으며, 무시할 수 있는가. 너희와 다른 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결국, 노년의 삶을 제약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회의 시선과 관습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영화의 톤과 매너는 다르지만 <은교>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말순에게 자유로운 노년의 삶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녀는 남사스럽다고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하지 못하고, 남들이 다 하는 파마만 하며 여성성을 포기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어째서 자신이 아닌 아들밖에 모르는 지독한 엄마가 되어야 했을까요. <은교>와 갈라지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수상한 그녀>는 6.25 전쟁을 거친 한국의 어머니를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나홀로 자식을 양육하고, 자신의 삶을 지웠던 우리 시대의 할머니들. 그 시대의 여성은 전쟁으로 빈 가장의 자리를 맡았고, 동시에 자식을 키우기 위해 슈퍼우먼이 되어야 했죠. 오말순은 일을 하면서 애를 돌보는, 아니 애를 보면서도 일을 했던 워킹 맘이었습니다. (직장, 육아 병행은 이 시대 커리어 우먼들만의 일이 아니었네요) 영화는 일종의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그녀를 그 역사로부터 해방하죠. 오말순에게 ‘오두리’라는 새로운 삶은, 과거의 전쟁이라는 짐이 부과되지 않은 새로운 삶입니다. 국가와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없는, 온전히 자신을 돌보고 여성으로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거죠. 덕분에 그녀는 과거에 누리지 못했던 젊음을 다시 만끽합니다. 이전에 고민하다 살 수 없었던 구두를 사서 변화를 보여준 뒤에 세상을 누비고, 지겨웠던 파마에서도 벗어나고, 예쁜 옷에도 관심을 가지며 멋진 남성을 만나죠. 쌓여있던 욕망과 한에 대해 분풀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오두리는 오말순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합니다. 새로운 삶을 맘껏 살라는 아들의 바람을 외면하고, 자신이 지켜온 가정을 다시 지키기 위해 젊음을 버리죠. 관객 중 누군가는 ‘오두리’의 삶을 계속 살면서 새로운 사랑에 빠져보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진짜 원하는 자유로운 삶을 오두리로서 누리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자식들 때문에 잃었던 삶을 영화에서나마 보상해주기를 원하는 바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이 결말은 씁쓸합니다. 기어이 사랑보다 모성을 택한 여인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영화의 스토리와 갇힌 여성성에 대한 한계를 느끼게 하죠.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이 마지막 선택은 일반적인 모성, 집안에 갇힌 여성의 문제와는 조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상한 그녀>는 강요된 모성의 문제가 아닌, 이 시대의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현재를 부정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 그리고 그들의 아들, 딸들은 감히 이해할 수 없을 희생에 대한 감사의 표현.


오두리의 삶을 선택했다면 잃어버린 자신의 삶과 과거를 원망하고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가 선택은 이렇죠. '다시 한 번 산다고 해도 나는 너의 어머니이자 그 시대의 어머니로 살 것이다.' 죄책감과 감사의 마음이 동시에 드는 부분입니다. 이미 흘러버린 그들의 과거에 자유를 드릴 수는 없겠죠. 영화에서 오두리에게 자유를 준다 해도 영화관 밖에서 변할 것은 없습니다. (이 점이 현대의 여성, 모성 문제 다룬 영화와 다른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대신 우리는 그들의 삶에 존경과 감사를 보내며, 더 늦기 전에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요.


독특한 모성의 재생산

<수상한 그녀>를 통해 ‘모성’에 대해 조금 다른 시선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가부장제의 산물인 모성은 남성이 부여한 여성의 역할이고, 사회제도가 부여한 역할로도 볼 수 있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6.25라는 전쟁, 그 역사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을 것이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 영향 때문에 모성이라는 신화를 남성이 아닌 여성 스스로도 만들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피난, 생존, 일, 육아 이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여성은 시간이 지나며 또 다른 가부장제의 주체가 되어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녀들이 그 시대를 견디는 것은 역사적 사명이었고, 숭고한 희생이었으며 후에 자랑스러울 수 있는 업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그들이 며느리를 맞이했을 때, 자신이 과거에 졌던 무게를 당연히 현재에도 짊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요. 영화에서도 오말순이 자신의 며느리를 대할 때, 이러한 감정이 드러나죠. 여성이 스스로 모성이라는 신화를 재생산하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관점에서 모성은 굉장히 서글픈 것으로 다가옵니다. 그들의 희생, 그 숭고함이 여성에게 어떤 족쇄가 되어버려 대물림 된다는 점에서 전쟁은 또 다른 모순과 상처를 남겼다 할 수 있겠네요.


<수상한 그녀>는 전 연령층에 의미가 되어줄 영화입니다. 특히 우린 모두 누군가의 아들, 딸이기에 그리고 지금은 6.25 시대가 주된 노년층을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영화를 보고 영화관을 나가며, 할머니에게 혹은 어머니에게 족쇄 대신 새 신발을 신겨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날개는 못 달아드리지만, 오늘부터라도 멀리멀리 세상 구경하고 놀러 다니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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