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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03. 2018

[시네마 천국②] 영화의 죽음과 그 이후

<시네마 천국>이 보여준 죽음의 이미지

지난 시간에는 <시네마 천국>과의 첫 만남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당시의 만남에서는 감성적인 것, 특히 그리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이후에 몇 번 더 있었던 <시네마 천국>과의 만남에서는 조금 다른 걸 볼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이 영화에 관한 개인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영화’,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에 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두 번째 만남 - 영화를 향한 사랑과 오마주
세 번째 만남 - 영화의 죽음과 알프레도의 선택
영화의 죽음 이후, 영화를 본다는 것


두 번째 만남영화를 향한 사랑과 오마주

<시네마 천국>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영화’라는 매체를 향한 애정이 잔뜩 보였다. 알프레도가 언급하는 고전 영화의 명대사, 그리고 자료처럼 보여주는 옛 필름, 영사기, 카메라 등등 <시네마 천국>이 온통 영화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시네마 천국>은 영화에 관심이 많을수록 깊게 읽을 수 있고. 더 깊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알프레도의 대사를 통해 장 르누아르, 존 웨인 등 대감독들의 이름을 들을 수 있고, <시네마 천국> 속 스크린을 통해서는 핸리 폰다, 클라크 게일,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등 대배우들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 모두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주옥같은 인물들이다. 이런 점에 초점을 맞추면, 토토가 마지막에 흘린 눈물은 반가움의 정서로 볼 수도 있다. 모처럼, 옛 영화들이 만든 황홀한 순간과 만난 시네필의 기쁨이 그 장면에 있었다.


옛 영화와 관련되어 몇 가지를 더 말하자면, 과거의 영화는 지금보다 더 강력한 매체였다. 영상 이미지가 낯선 사람들에게 현실의 이미지가 그대로 복제된 영화는 신통방통한 물건이었다. 관객은 스크린 속의 이미지를 현실처럼 느낄 수 있었다. 과장하자면, 초창기엔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이전에 언급했듯, 내게 스크린에서 만난 둘리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있듯, 당시 관객에게도 영화와의 첫 만남은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초창기 영화가 젊었듯, 관객도 아이처럼 이미지가 주는 자극에 무방비상태였다


이런 강렬함을 보여주는 장면이 <시네마 천국>에도 있다. ‘시네마 천국’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 속 인물이 총을 쏘면, 그걸 보던 한 관객은 진짜 총을 맞은 듯 괴로워하다 쓰러진다. 그리고 다음 컷으로 넘어가면, 그가 죽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당황스럽게도 그는 스크린 속에서 배우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 장면은 마을 사람들이 영화관 안에서 생로병사 모든 과정을 함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당시 관객이 스크린을 무척 실감 나게 체험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UHD는커녕 HD도 없었고, VR은커녕, 3D도 없던 시절에 그들은 영화를 무척 생생히 체험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두 가지를 떠올리게 했다. 하나는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다. 1895년, 카페에서 열차가 도착하는 장면을 보던 관객들은 스크린에서 다가오는 열차가 진짜인 줄 알고 도망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영화가 주는 생경했고, 자극이 컸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관객이 영상 이미지에 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시절이라 영화가 힘이 셀 수밖에 없던 시절이다.


다른 하나는 미디어 이론 초창기에 등장한 ‘마법의 탄환’ 이론이다. 이는 매스 미디어가 수용자에게 강력하고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는 이론이다. <시네마 천국>에서 스크린에서 쏜 총에 죽었던 관객의 모습처럼, 영상 매체의 초창기엔, 영화가 관객의 사고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거의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에 쉽게 동의했고, 그 이미지에 쉽게 반항할 수 없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영화의 힘이 강력했던 시절을 동경할 수도 있다. 초창기의 영화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꿈을 만들고,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던 매체였다. 이 시대의 감독이라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순수한 관객들을 안내할 생각에 설렜지 않았을까. 조르주 멜리에스처럼 말이다. 더구나, TV도 없던 시절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왕좌에 영화가 앉아있었다. 토토는 그런 시절의 영화를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엔딩에서 보인 그의 눈물에서 영화가 더 생생한 경험일 수 있었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던 시절을 향한 동경이 보이는 듯했다.


<시네마 천국>은 영사기가 발달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가 맞이한 변화를 보여준다


세 번째 만남①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영화관의 죽음

세 번째 만남에서는 조금은 엉뚱하고, 극단적인 것이 보였다. 앞서 말한 그리움의 정서가 더 확장되어 <시네마 천국>이 영화(혹은 영화관)의 장례식을 말하는 영화처럼 보였다. 토토의 눈물이 그리움을 넘어 애도의 눈물이 된 까닭은 <시네마 천국>에 죽음의 이미지가 여기저기서 넘실대던 탓이다.


앞서 말한 스크린에서 쏜 총을 맞은 관객의 죽음이 영화의 강렬한 힘과 활력을 의미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언급할 죽음은 힘을 잃은 영화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다. 불에 타고 폭파한 영화관과 필름, 알프레도의 실명과 훗날 있던 그의 장례식은 이 마을에 찾아온 짙은 그림자다. 그리고 이들은 한 시대의 끝, 그러니까 옛 영화의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다.


알프레도는 옛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손으로 영사기를 돌릴 때부터 영화, 영화관, 관객과 함께 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전 영화의 감독, 배우, 대사를 줄줄이 외웠던 걸어 다니는 영화 백과사전이자 인간 영사기였다. 그런 그가 일하던 영화관이 불타는 건, 그의 시대(고전 영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사건일 수 있다. 고전 필름은 불타 사라지고, 고전 영화를 상영하던 영사 기사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후에 그 자리는 토토가 물려받는데, 이는 새로운 시대로의 교체로 볼 수 있다. 심지어 영화관의 이름도 ‘뉴’시네마 천국이었다.


<시네마 천국>은 고전 영화의 세대와 그다음 세대를 담은 영화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영사기가 등장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알프레도에게 토토가 새로운 영사기를 자랑하는 장면이 있다. 알프레도의 시대엔 영사 도중 필름이 타는 것을 걱정해야 했다면, 토토 시대의 필름은 불타지 않는다. 이런 필름과 영사기의 변화는 테크놀로지의 진보를 보여준다. 이 진보 덕에 필름이 죽는(없어지는) 일이 없어졌고, 영화관도 안전해졌으며, 영화도 관객에게 무사히 전달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영화와 영화관의 힘을 뺏어가기도 한다. 불타지 않는 필름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기술 다음에는 필름조차 필요 없는 영화가 등장한다. TV가 등장한 것이다. 이 기술 덕분에 영화와 영상은 스크린이라는 곳을 경유할 필요가 없어졌고, 설 자리를 잃는다. 이렇게 <시네마 천국>이 보여준 테크놀로지의 가장 끝엔 TV의 등장이 있었고, 이는 영화관과 영화를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영상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영화를 죽음으로 안내한 셈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옛 영사기사의 퇴장은 지금 시대에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시네마 천국>이 보여준 알프레도의 시대는 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체하기 전의 시대다. 알프레도는 영사기를 돌리며 관객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에 행복했다고 말한다. 영사기를 반복적으로 힘들게 돌리는 단순 노동만으로도 보람과 행복을 얻었던 거다. 조금 불편해도 인간적 가치가 넘치던 시대다.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기계가 그 일을 대체하고, 그런 소소한 행복도 앗아갔다는 점에서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한다.


영화를 광장에 공유하고, 모두가 행복했던 순간에 알프레도는 눈을 잃는다


세 번째 만남② 눈을 잃은 알프레도의 선택

알프레도가 퇴장하는 순간, 그러니까 사고를 당하는 순간은 곱씹어 볼수록 아이러니하다. 알프레도는 객석이 없어 영화를 볼 수 없는 관객을 위해 광장에 영사기를 비췄다. 이는 광장이 모두의 것이듯, 영화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런데 반어적으로 그 장면이 가장 큰 불행으로 이어진다.


알프레도가 모두에게 영화의 기쁨을 안긴 그 순간, 영화관이 불타버린다. 기쁨의 공유가 한 인간의 불행으로 이어진 이 장면은 <시네마 천국>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이다. 왜 하필 그 순간 영화관이 불타야 했을까. 그 누구의 악의도 보이지 않는 가장 따뜻한 순간, 영화관이 화형을 당하고 알프레도는 눈을 잃었다.


알프레도는 모두에게 영화를 보여주려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보여주려다가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점, 그러니까 ‘본다’라는 걸 중심으로 원인과 결과가 연결된 듯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를 추론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몇 가지 망상을 해봤다.


가끔 '알프레도 같은 멘토, 혹은 친구가 있었다면 인생이 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선, 이 화재는 알프레도를 향한 벌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죄(?)를 지었을까. 좀 더 잡다한 생각을 발전시켜 보자면, 이 장면은 영화 산업이 무료 배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다. 관객이 관람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 데에 자본주의의 분노가 ‘활활’ 타오른 것이다. 또는, 훗날 있을 무료, 불법 배포를 응징하는 ‘영화’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다. 너무 멀리 갔다고? 쓰고 나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단락을 성실히 읽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번 단락은 ‘잡다한’ 생각 정도로 웃어넘기면 될 것 같다.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관람에선 알프레도가 다가올 미래, 즉 영화관과 영화의 위기를 직감하고, 토토가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보였다. 더불어, 영화도 다음 시대에 살아남기를 바라는 알프레도의 바람으로 읽힌다. TV와 비디오의 등장에 ‘영화는 이제 꿈일 뿐’이라던 알프레도는 고전 영화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토토라는 희망을 영화관에 남겼다. 그리고 그는 고전 영화와 함께 퇴장했다.


영사실을 떠나게 된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만의 암실에 갇혔고, 그 암실은 그가 평생을 함께한 고전 영화의 아카이브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알프레도는 자신의 시대에 봤던 무수히 많은 고전 영화를 다시 꺼내 보며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네마 천국> 엔딩에서 볼 수 있는 키스 장면은 알프레도가 실명 후 무수히 봤을 고전 영화를 공유하는 장면으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토토의 눈물이 알프레도와 고전 영화를 향한 애도로 보였다.


토토의 마지막 눈물을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향한 마음으로 읽을 수도 있을까


영화의 죽음 이후에 영화를 본다는 것

<시네마 천국>에서 영화의 죽음을 봤다고 했지만, 사실 '영화의 죽음'이라는 말이 낯설지는 않다. 영화의 죽음이란 제목의 글과 책 등을 자주 목격하는 편이다. 2017년 기준, 한국 영화는 연간 2억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하고 있는데, 영화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일까. 그런 의견은 비평가와 영화 전문가들의 오류와 비약, 혹은 조바심이 아닐까.


우리 시대의 영화는 더 발달한 테크놀로지가 더 화려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관객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죽음’보다는 ‘전성기’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영화의 영향력이 여전히 엄청나다는 걸 증명하는 중이다. <인피니티 워>의 제작사 마블은 영화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든 걸 넘어,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런데도 영화가 힘을 잃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인피니티 워>는 영화의 스케일과 기준을 바꾼 영화로, 마블이 내놓은 지상 최대의 '쇼'라 할만하다


이런 긍정적인 신호가 있는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영화 좀 봤다는 사람들은 왜, 영화를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과거에 그들이 보던 영화와 현재의 영화 사이엔 어떤 벽이 있는 걸까. 나름의 추론을 해보면, 과거보다 영화가 공산품처럼 되어버린 걸 꼬집은 것 같다. 과거의 영화가 다양한 표현 방법을 고민하며 예술적 진보를 고민했다면, 현재의 영화는 대기업과 자본 아래서 상품처럼 찍혀 나온다. 또한, 대중의 호응이 좋은 코드(신파와 유머 등)와 장르에 편향된 상업 영화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실험적인 영화는 돈이 되지 않기에 시도되기 힘들다. 신선함이 없기에 영화가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관람하는 상업 영화는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실험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이 시도되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대중도 실험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많은 관객이 영화에게 오락과 유희 그 이상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스크린 독과점도 ‘영화의 죽음’을 말하는 이들에게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의 가치도 예전만 못하다. 반드시 영화관을 거쳐야 했던 영화는 이제 손안에서, 심지어 무료로도 관람할 수 있다. (관람보다 ‘감상’이라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영화관이 주던 생생한 체험과 몰입감 등 영화관의 신성함(?)은 깨졌다. 큰 스크린 앞에서 외부와 격리된 암실에서 마주하던 영화는 이제 옛말이다.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공간에서,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볼 수 있는 게 지금의 영화다.


끝으로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오히려 영화의 표현을 더 제약하는 도구가 된 측면도 있다. 이전엔 조금 허술해도 ‘이건 영화잖아’라며 합의하고 넘어갔던 것들이, 지금은 용납될 수 없다. 우리 시대엔 다양한 표현 방법 중, ‘카메라 화질’을 통해 보여주는 리얼리티가 상당히 중요해진 것 같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영화 이미지를 현실과 더 닮게 했고, 이는 영화를 꿈의 매체에서 현실을 모방하는 도구로 밀어내 버렸다.


<시네마 천국>과의 다음 만남에서는 토토의 '로맨스'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결론적으로 난 영화가 죽었다는 시대에 영화를 보는 비(悲)평가다. 어쩌면 내가 쓰게 될 영화에 관한 글은 앞서 사라진 영화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영화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누가 죽였는지, 왜 죽었는지, 정말 죽긴 한 것인지 등 조사할 것이 너무도 많은 사건의 탐정이 된 기분으로 성실히 쓰고, 또 써야 할 것이다. 답이 없을지라도, 이런 조사의 기록을 남기며, 영화라는 매체에 다가가고자 한다. 그게 나를 위로해준 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네마 천국>을 보며 처음엔 고향에 두고 온 것들을 향한 그리움을 봤고, 다음엔 영화를 향한 애정을 느꼈으며, 끝으로 영화를 떠나보내는 슬픔까지 다양한 감정을 맛봤다. 그리고 영화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까지 생각해봤다. 다음 관람에선 또 무엇을 맛보게 될까. 그땐, 토토가 엘레나와 헤어진 에피소드에서 또 다른 감정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영화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관한 사유를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와 함께 나이가 먹어간다는 건 꽤 행복한 일이다.

이전 04화 [시네마 천국①] 키스 뒤, 그 눈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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