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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Apr 26. 2018

[시네마 천국①] 키스 뒤, 그 눈물에 관하여

<시네마 천국>이 말하는 몇 가지 그리움에 관하여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가 있다. 모두에게 그런 영화가 있겠지만, 반복을 좋아하지 않는 내겐 드문 일이다. 첫 관람 때 졸아서 놓친 장면이 많을 때, 혹은 ‘비평’ 같은 특별한 글쓰기를 시도할 때,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는 한다. 반복을 싫어한다는 이유 외에도 세상엔 봐야 할 영화가 너무도 많다는 핑계를 대기도 한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여유가 없고 말이다. 어떤 이유이든 이렇게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입장에선 절대 좋은 습관은 아니다.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
<시네마 천국>과의 만남
달콤쌉쌀한 그 엔딩에 관하여
첫 번째 만남 -  몇 가지 그리움의 정서


‘영원한 시네필의 초상’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즐기는 방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고, 영화에 관해 글을 쓰고, 마지막엔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나도 영화를 ‘여러 번 보고’는 있다. 하지만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며, 사유의 폭을 넓히지는 못했다. 그저 다양한 영화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시네필의 초상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 부끄럽게도... 이름이 멋있어서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에 영화를 봤음에도 관람의 깊이가 얕았고,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간 게 많았다. (그래서 아직 비평이라 부를만한 글을 쓰지 못한 非평가에 머물고 있나 보다) 혹시나 영화를 여가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는 관객이라면, 좋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고, 오래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질 것을 권한다. 그 되새김질 속에서 영화는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글보다 훨씬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거다.


왜 또 유식한 척 ‘프랑수아 트뤼포’를 말하나 싶을 것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이 글이 영화에 관한 깊이 있는 정보와 고급 지식을 지향하는 탓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영화가 옛 영화와 옛 영화인들을 많이 떠오르게 하는 탓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이어갈 영화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1988년 작, <시네마 천국>이다.


같은 곳(영화)을 바라봤던 두 남자, 알프레도와 토토


너무도 늦었던 시네마 천국으로의 입장

<시네마 천국>은 유명한 영화였으나,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의 나이가 나와 엇비슷한데, 너무도 늦게 만난 셈이다. (그래, 나도 나이가 꽤 많다.) <시네마 천국>엔 영상 발달사 수업에서 봤던 옛 영화, 감독, 그리고 배우들이 스크린 위에 소환되는 장면이 꽤 많다. 너무 자주 들었던 이름이라 그랬을까. 그들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괜한 반가움을 느꼈다. “나 저 영화 알아!”라며, 자랑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아는 걸 떠들고 싶었다. 유치한 지적 허영심이 발동되던 순간이었다.


<시네마 천국>의 줄거리는 이렇다. 중년 영화감독 살바토레 토토 앞으로 고향에서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알프레도라는 남자가 죽었고, 내일이 장례식이라는 소식이다. 알고 보니 이 토토라는 남자는 30년간, 고향에 가지 않았다. (30년간 어머니 얼굴도 안 본, 패륜아다!) 그 전화를 받고 토토는 회상에 잠기고, 고향에서 알프레도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알프레도는 마을의 유일한 오락거리인 영화관의 영사실에서 일했다. 가난했던 토토에게 영화관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받은 심부름 값으로 영화표를 사는 말썽꾸러기였고, (이때부터 패륜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조르고 졸라 영사실에서 일하게 된다. 그렇게 토토와 알프레도는 영화를 통해 우정을 키운다. 이런 행복도 잠시, 영화관이 불타는 사고로 알프레도는 시력을 잃고, 토토가 마을의 유일한 영사기사가 된다.


영사기가 어둠을 영화로 밝히듯, 알프레도도 토토의 미래를 밝히는 인물이었다


이후엔 영사실에서 청년기를 보낸 토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시기에 토토는 일레인이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지만, 군대가 이 둘을 갈라놓는다. (어디를 가나 군대는 발목을 잡는다) 전역 후 돌아온 토토는 실연의 아픔으로 힘든데, 알프레도에게 이 마을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소리까지 듣는다.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이 마을엔 미래가 없고,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마을을 떠나라 한다.


그리하여 말썽꾸러기 소년은 알프레도의 조언대로 고향을 떠나 성공한 영화감독이 되었고, 알프레도가 죽고 나서야 마을로 돌아온다. 다시 온 고향에서 토토는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마치고, 그가 자신에게 남긴 물건을 받는다. 그건 알프레도와 토토가 함께 영사실에 있던 시절, 검열당해 상영되지 못한 무수히 많은 키스 장면이었다. 토토는 그 필름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FINE-


<시네마 천국>에 관해 몇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음악이다. 이 영화의 음악은 영화의 그리움, 아련함의 정서를 한층 끌어올리는데, ‘엔니오 모리꼬네’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함께한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으로 유명하며, 이외에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언터쳐블>, 최근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까지 왕성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영화와 영화관에 관해 말하는 영화 <시네마 천국>


달콤쌉쌀한 그 엔딩에 관하여

<시네마 천국>은 ‘영화관’에 관한 영화다.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관을 좋아하는 내겐 특별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주요 무대도 알프레도와 토토가 우정을 쌓았던 영사실이다. 이 영사실이라는 공간은 영화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영화가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사람이 영사기사다. 이런 높은 위치와 중요한 역할 탓에 알프레도는 절대적인 권력자일 것만 같다. 하지만, 실상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일 뿐이다. 알프레도는 좁은 공간에서 더위와 싸워가며 영사기를 돌리는 단순 노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네마 천국>은 이 단순 노동을 고귀한 마술로 바꿔놓는다. 영사기에 환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영사기사를 연금술사로 만든다. 영사기는 영화라는 마술이 시작되는 도구다. 영사기가 어둠에 빛을 뿌리고, 그 빛은 영화라는 환상으로 바뀐다. 그리고 관객은 그걸 보고 꿈을 꾼다. <시네마 천국>의 카메라는 객석을 자주 비추며, 영화를 관람 중인 관객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관람 중인 관객의 얼굴을 담는 샷을 특히 좋아한다. 그 장면엔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의 천진난만한 모습과 매혹당한 관객이 짓는 황홀한 표정이 있다. 이런 샷에는 꼭 내가 그 객석에 앉아있는 듯하고, 영화에 홀딱 빠진 내가 보이는 듯해 정겹다.


재미있게도 영사실에서 알프레도는 토토의 인생에도 빛을 뿌려, 멋진 길을 걷게 했다.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던 토토의 어두운 인생에 나아갈 길을 비춰줬다. 그 덕에 토토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룬다. 좁고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향에서 벗어나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었다. 알프레도는 마을의 영사기사이자 토토 인생의 영사기사였다.


재개봉 열풍 덕에 <시네마 천국>을 영화관에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영화관이 주인공인 영화를 영사기를 통해 볼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 그 설렘 때문에 조조 영화로 개봉하자마자 봤던 거로 기억한다. 최초에 봤던 버전보다 짧았지만, 역시나 좋았고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를 비롯해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준 관람이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볼 때, 그렇게 좋았다. 살바토레 토토처럼 텅 빈 영화관에서 알프레도가 준비한 선물을 보고 있자니, 토토 옆에서 같이 그 장면을 보는 듯했다. 알프레도의 선물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로 그 장면에 몰입했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등장하는 장면 어딘가엔 나도 앉아있을 것만 같다


몇 번을 봐도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은 좋다. 살바토레가 짓는 그 아리송한 표정엔 다양한 감정이 보이고,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좋은 연기가 무엇인지 적확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장면은 진실한 뭔가가 있고, 덕분에 진한 감동을 준다. 가장 큰 떨림을 주는 연기가 그 장면에 있다. 살바토레 토토가 스크린을 바라보며 짓는 그 표정은 아련하고 따뜻하며, 어딘가 가슴을 콕콕 찌르기까지 한다. 볼 때마다 그 감정이 다르게 다가왔지만, 어떻게 바라봐도 그 연기는 옳고, 좋았다.


수없이 많은 키스 장면이 편집된 그 영상을 보며 토토가 그런 표정을 지었던 이유는 대체 뭐였을까. 자신의 유년기에 상영되지 못했던 영화 속 장면들이 수십 년이 지나서야 상영되었고, 그 장면을 보고 토토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선정적이라고 거부당했던 그 장면들을 보면서, 왜 그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시네마 천국>과의 첫 만남, 두 번째 만남,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한 세 번째 만남에서 각각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세 번 모두 다른 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같은 장면에서 이토록 다양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지 몰랐고, 찾게 될 줄도 몰랐다. 역시, 시네필의 초상이라던 프랑수아 트뤼포는 옳았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봐야, 조금씩 더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 더 그 영화가 좋아지고, 영화라는 매체가 좋아진다.


볼 때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살바토레 토토의 미소


첫 번째 만남(1) - 두고 온 시절을 향한 그리움

<시네마 천국>을 처음 봤을 때, 엔딩 속 토토의 눈물은 알프레도를 향한 그리움으로 읽혔다. 아버지가 없던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아버지였고, 영화밖에 모르던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그런 알프레도를 토토는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거다. 고향에 돌아온 토토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방치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와 아버지 같던 사람을 버려둔 아들의 깊은 반성과 회한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알프레도는 언제나 토토 생각뿐이었고, 토토의 성공을 위해 그를 향한 그리움마저 꾹꾹 누르며 살았다. 그리고 토토를 대신해 그의 물건을 죽을 때까지 품고 있었다. 이 물건은 영화 초반부에 알프레도가 토토 대신 맡아두겠다고 했던 필름이다. 이 필름엔 토토와 알프레도가 영화를 통해 소통하던 시간이 담겨 있고, 토토의 유년기가 잔뜩 묻어 있다. 어쩌면, 알프레도에겐 토토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알프레도는 토토의 유년기를 평생 보물처럼 쥐고서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런 알프레도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눈이 먼 그는 그 필름을 쥐고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영사기를 수도 없이 돌렸을 것만 같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토토와의 기억을 상영하고 있었을 것만 같다. 토토도 그 필름을 보고 유년기에 사랑했던 영화와 영사실을 떠올렸을 거다. 그리고 평생 자신을 그리워했을 진정한 친구 알프레도와의 시간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눈을 감고, 자신의 암실에서 토토와의 시간을 상영했을 알프레도


<시네마 천국>처럼 고향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가 몇 편 있다. 올해 개봉했던 <리틀 포레스트>는 시간이 멎은 채, 떠난 혜원(김태리)를 한없이 기다려 줄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옛 공간, 옛 친구가 그대로 간직된 공간. 언제나 피난을 올 수 있고, 힐링을 받을 수 있는 고향이 영화엔 있었다. 이에 반해, <레이디 버드>는 나를 기다리는 고향도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변한다는 걸 보여준 영화였다.


<리틀 포레스트>가 고향에 관한 판타지였다면, <레이디 버드>는 지독한 리얼리티였다. <시네마 천국>은 후자에 가까운 영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고향에 관해 말하는 영화였다.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고향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 공간은 지워지기 시작한다는 걸. 그리고 내 유년기도 함께 침식되고, 부식되어 간다는 걸. 토토는 행운아다. 알프레도가 필름에 새겨 그의 과거를 박제해뒀으니까. 그 필름을 보며 오열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추억이 묻은 공간은 콘크리트 덩어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첫 번째 만남(2) -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

토토가 느낀 그리움의 정서는 알프레도를 넘어 토토의 유년기 전체를 향한 그리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시네마 천국>엔 마을 공동체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동체가 해산하는 과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네마 천국’ 영화관은 공동체가 모이고, 함께 어울리는 장소였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이곳에서 같은 영화를 보고 감정을 공유했다.


이 마을 공동체는 영화관에서만큼은 모두 행복하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 앞에서 평등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할 수 있다면, 영화관을 들어오는 데엔 차별이 없고(좌석별 금액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누구나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스크린 앞에선 남녀노소,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다 똑같은 관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같은 행복을 추구할 수 있고, 서로의 안부를 묻던 공간이 영화관이었다.


‘시네마 천국’이 폭파되는 장면에서 많은 사람의 아쉬운 표정을 볼 수 있다. 이는 공동체 간에 정을 느끼고, 서로 같은 것을 보며 공유했던 시간과 공간이 붕괴하는 데서 오는 아쉬움으로 보인다. 동시에 과거의 즐거운 추억과 자신들의 성장기가 기록된 곳이 사라지는 데서 오는 안타까움으로도 볼 수 있다. 한 시절이 통째로 삭제된 것이다.


‘시네마 천국’의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끔 그곳을 가보고는 했다. 나날이 건물이 좋아지고, 없던 시설도 하나, 둘씩 생겼다. 그러다 언젠가 방문했을 때, 건물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이 없어졌을 뿐인데, 가슴 속 한가운데가 뻥 뚫린 느낌이었다. 3년을 보낸 공간이었고, 그 공간엔 내가 묻혀둔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그 공간이 더는 없었고, 나의 시간과 나의 시간도 자취를 감췄다. 하나의 공간이 그렇게 많은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실감했고, 허무하면서도 서글펐다.


<시네마 천국>의 광장은 영화를 공유하고, 함께 꿈을 꾸던 공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나 더, 영화 내에서 언급되는 TV의 등장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많이 바꿔 버렸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대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TV의 보급은 개인화된 생활의 시작으로, 공동체의 해산이 시작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TV의 등장은 영화관을 필요없게 한다. 공동체가 함께 웃고 떠들며, 하나가 되었던 영화관의 퇴장은 이후의 파편화될 사회를 암시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TV 외에도 <시네마 천국>에서 개인화된 사회를 보여주는 게 있다. 마을 속, 거대한 광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기능이 변한다. 이 광장의 쓰임새를 살펴보면 변화된 사회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토토가 어린 시절에는 그 광장에서 마을 사람들이 공동작업을 하고, 영화를 공유하기도 했다.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고, 함께 무언가를 하던 공간이었다. 그런데 광장은 세월이 흘러 자동차들이 잔뜩 주차된 차가운 공간이 되어 있다. 시간은 그곳에서 사람의 온기를 지워버렸다.


과거엔 공동체 구성원 간의 온기를 느끼던 광장은 속이 텅 빈 깡통들이 차지했다. ‘시네마 천국’이 있던 공간도 주차장이 된다고 한다. 이런 공간의 변화는 교류가 적어진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의 모습을 드러낸다. 살바토레는 이 공간이 낯설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과 교류가 있던 그 시끌벅적한 시간과 공간이 그리워지지 않았을까. 소란스럽더라도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 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첫 번째 관람에서 그런 다양한 그리움의 정서를 봤다.


계속... "[시네마 천국②] 영화의 죽음과 그 이후"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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