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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Apr 12. 2018

'둘리'에서 허세꾼까지

영화와의 만남, 그리고 글쓰기의 시작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 영화와의 만남을 짧게나마 기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화 읽어주는 남자’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이 사람은 언제부터 영화를 봤던 걸까. 그 첫 만남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 영화에 관한 글을 토해낼 만큼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예고도 없이 찾아온 영화와의 첫 만남, 그리고 전혀 낭만적이지 못한 그 녀석과의 연애담을 글로 옮겨봤다.


인생 첫 번째 영화와 영화관
내게 허세를 허락한 영화
‘영화 읽어주는 남자’의 기준


인생 첫 번째 영화와 영화관

‘인생 첫 번째 영화가 뭐야?’ 이 질문을 받고 한참을 고민했다. TV에서 영화도 방영되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기에, 무엇이 내 인생 최초의 영화인지 도무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의 영화로는 박중훈의 <투캅스>와 몇 번째인지 모를 제임스 본드가 출연한 <007 시리즈>, 동생과 깔깔대며 봤던 <둘이 합쳐 IQ 100>, <미스터 빈> 등의 코미디 영화, 그리고 처키가 소파 밑에서 내 발목을 움켜쥘 것만 같던 <사탄의 인형> 등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영화를 정의한 기준은 ‘2시간 안에 완결이 나는 영상물’이었다. 영화는 ‘그 자리에서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드라마는 ‘몇 달 동안 하는 것’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혹은,TV 방영 시간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드라마는 비교적 이른 시간에 하는 것, 영화는 밤늦게 하는 것. 아, KBS에서 방영했던 ‘토요 명화’의 오프닝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토요 명화는 사실, 광고가 엄청 많아 짜증나는 프로그램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처음 간 영화관이 <시네마 천국>의 그곳과 비슷했다면, 좀 과장일까


이렇게 영화와의 첫 만남은 가물가물 하지만,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는 뚜렷하게 기억한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영화관은 부산의 중심, 서면의 한 극장이었다.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를 쉽게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영화관보단 극장이란 말을 더 많이 썼던 것 같다. 그곳에서 관람한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 내 첫 번째 스크린 데뷔작(?)이다. 언제 누구와 방문했는지, 그날이 어떤 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겁나 큰 둘리’를 봤다는 기억만 뚜렷이 남아있다.


저 당시, 둘리는 TV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던 스타였다. 그런 둘리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아기공룡 둘리 - 얼음별 대모험>이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영화관에서의 독특한 관람 경험 이다. 불이 꺼진 곳에서 둘리만 바라보며, 그에게 이입했던 경험은 강한 자극으로 기억 한 편에 저장되어 있다. 엄청나게 큰 스크린엔 나보다 훨씬 큰 둘리가 있었고, TV와 비교할 수 없는 스피커의 울림도 나를 들뜨게 했다. 시끄럽던 아이의 입을 무려, 한 시간 동안 닫게 할 정도로 영화관은 충격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물했다.


지금, <데이지>라는 영화가 놀라운 건 <무간도>의 감독이 연출했던 영화라는 거다


그 외에도 청소년기에 봤던 영화 몇 편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부산 국제 영화제의 초창기, 남포동의 한 극장에서 봤던 <달마야 놀자>와 <살인의 추억>, 중학생 때 정말 허름한 극장에서 단체 관람했던 유승호의 <집으로>(그 유승호가 지금은 군필자라니!), 친구와 단둘이 본 첫 번째 심야 영화 <스파이더 맨>, 데이트 때 봤던 (무려 전지현, 정우성 주연의) <데이지>까지 많은 영화가 스쳐 지나간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들은 ‘관람했던 영화관’과 함께 기억이 소환된다.


그 당시에 영화관은 쉽게 갈 수 없던 곳이었다. 영화관은 중요한 날, 소중한 사람들과 가끔 가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그 덕에 그때 봤던 영화와 영화관을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다. 굳이 영화관이 아니더라도, 비디오나 케이블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던 시기였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내방에서도 편히 영화를 관람할 수 있던 시절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20대가 되기 전까지 영화관은 나와 크게 연이 없던 곳이었다. 덩달아 영화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무려, 내 돈 주고 본<패션왕>은 예술 감상의 험난한 과정을 알게 해준 영화다


내게 허세를 허락한 영화

영화가 좋아진 특별한 계기가 생긴 건 아니다. 좋아하는 감독, 배우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인생을 바꿀 충격적인 영화(요즘 말로 ‘띵작’)를 만난 것도 아니다.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이 늘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는 게 영화와 친해질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처음엔 막연히,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시간을 보내러 갔던 곳이 영화관이다. 그래서 영화 관람이란 곳이 그다지 낭만적인 시간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오히려 외로웠던, 처절한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런 암울한 시간은 잠깐이었다. 이런 고독을 선물하는 영화관과 영화엔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관은 ‘성역’이었다. 누군가 “뭐해?”라고 물을 때, “영화관이야”라고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심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연락이 되지 않을 때, “영화관에 있었어”라고 말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게임 속의 무적모드처럼, 내 인생의 치트키가 “어, 영화관이야”었다.


똑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인데, “게임 했어”라고 말하면 어른들의 잔소리가 쏟아진다. 그리고 똑같이 보는 행위인데, “TV 봐”라고 하면 한심하다는 눈빛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영화 봐”는 예술적인 행위(?)로 인정받는 것 같았다. 심지어 영화는 적어도, 6천 원을 쓰면서 봐야 하는데도 말이다. (당시, 2시간에 영화관 입장료는 6천 원, PC방은 2천 원이었으니, 영화 관람은 경제성도 떨어지는 일이었다)


"영화가 세상을 구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며 영화의 힘을 다시 느꼈다


영화관 밖에서도 영화는 강력했다. 영화를 보는 건 공부한다는 핑계가 될 수 있었다. 영상정보학을 전공하면서 ‘보는 게 공부’라는 말을 참 많이도 써먹었다. 영화는 ‘예술’이라는 인상이 있었고, ‘영화 관람은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일’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도 댈 수 있었다. 그렇게 영화는 뭔가 있어 보였다. 그게 영화를 더 즐겨 보기 시작했던 이유다. 영화로 2시간을 보내면, 보람차고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앉아서 2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유치한 허영심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봤던 영화들이 쌓이니 취향이 생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봤던 영화를 기록해두고 기억하고 싶은 욕구도 생겼다. (몇 없는 취미 중 하나가 무작정 쓰기였다) 솔직히, 여기엔 작은 계기도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영화 어때?”라고 물었을 때, 설명을 못 해서 당황했던 적이 잦았다. 그때마다 ‘매일 출근하듯 영화관에 가고 밥 먹듯 영화를 보는데, 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지’라는 자괴감을 . 그리고 누군가 영화관에 가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마저도 따가운 눈초리로 볼까 초조해졌다. 하나뿐인 안식처마저 뺏길까 두려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관람했던 영화가 왜 재미있었는지, 왜 별로였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싫은 영화를 별로라 말하고, 좋은 영화에 찬사를 보내는 걸 반복했더니, 이렇게 글을 끄적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렇게 막 보고, 막 썼는데 감히!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거야?’ 묻는다면 근본이 없는 배경을 가져 죄송하다고, 머리 숙이는 것 외엔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래도 끝까지는 읽어주세요’라는 부탁을 할 것이다.


구차할 수 있지만, 대학교에서 문화 관련 강의를 들었다는 걸 변명으로 내밀며, ‘저 그래도 학교에서 영화 좀 봤어요’라고 말하겠다. 친구가 없어(사교성이 다소 부족한 학우였다.) 도서관 영상 자료실에서도 매일같이 영화를 본 건 사실이니까. 때로는 조조 영화를 관람하고 등교한 뒤, 곧바로 자료실에서 영화를 본 적도 있다. 여담으로 졸업 전에 목표와 학교에 있는 DVD를 다 보는 것이었는데, 한 달쯤 보고 깨달았다. 내가 본 만큼 새로운 DVD가 매달 새로 들어온다는 걸.


<밀리언 달러 베이비> 내겐 늘 완벽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영화 읽어주는 남자의 기준

지금부터 쓰게 될 글은 근본 없는 대학생 때 본 영화에 관한 기록이다. 그 영화에서 본 것들, 그 영화 덕에 생각할 수 있었던 것들, 그리고 그 영화를 통해 봤던 세상에 관한 잡담을 성실히 꾹꾹 눌러 쓸 것이다. 선정한 영화의 기준 역시, 극히 개인적이며, 주로 대학생 때 봤던 영화(혹은, 20대)를 꼽았다. 대단치 않은 필력이기에 진솔하고, 정직하게 쓰려고 애쓸 것이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정리해둘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세운 좋은 영화의 기준을 밝혀둔다. 물론, 영화를 향한 절대적 평가는 있을 수가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스크린에 상영된 이후, 그 영화의 의미는 오롯이 관객 각자의 시선에 달렸다고 믿는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이 기준도 바뀔 것이다. 지금 말할 기준은 그저 ‘글을 쓴 이 친구의 20대 때 취향이 이렇구나’, ‘이런 점에 감명을 받았었구나’ 정도로 참고하면 그만이다.


영화 읽어주는 남자에게 좋은 영화란?                    

재미있는 영화
- 다음이 미치도록 궁금해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영화

균형 잡힌 영화
- 소재, 주제, 형식(촬영, 조명, 미술 등), 연출이 일관적이고 통일성이 있는 영화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잘 살린 영화
- 편집을 통해 시공간을 자유롭게 변주하고, 상상력이 극대화된 영화

스크린 밖에서 생각할 수 있는 영화
- 영화관을 나간 뒤부터 영화가 현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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