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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Apr 05. 2018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

‘부스러진 순간’을 적셔준 영화

“불이 꺼진 영화관, 그 암실 속에서만 나는 자유로웠고, 평화로울 수 있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으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이런 근사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온갖 모양의 ‘실패’라는 파도, 그리고 약풍부터 태풍까지 다양한 세기의 바람을 맞으며 지나온 20대, 그때 영화관은 내게 하나뿐인 도피처였다. 언제 찾아가도 날 위해 자리를 내어준 그런 곳이었다.

 브런치에 300편 가까이 글을 쓰고서야 얻을 수 있었던 연재의 기회


부스러진 시간을 뒤로하고
이글을 쓰는 이유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


부스러진 시간을 뒤로하고

20대엔 왜 그리도 도망갈 일이 많았던 걸까. 그땐 반복되는 현실에서 느낀 갑갑함, 그리고 실패로 쌓인 시간 속에 느낀 무력감으로 지쳐있었다. 그런 감정들이 망가뜨린 일상과 썩어 문드러진 인생을 치유해줄 곳이 필요했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리고 혼자서도 우주의 역사에 남을 일을 해낼 것만 같던 20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슷한 나이의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역사를 썼을 때, 난 입대를 앞두고 별거 없는 내 인생의 역사를 일기장에 쓰며 궁상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부스러지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깨어져 잘게 조각이 나다”라고 한다. 감히, 이 표현을 내 20대를 대표할 수식어로 붙여주고자 한다. 온갖 것들이 나의 뜨거웠을 뻔한 시간을 깼고, 내 인생의 아름답던 계획들을 무참히 빻았다. 언젠가 꿈꿨던 것들은 이제 가루가 되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다.


뭐라도 해내야만 값져 보이는 시기, 누군가에겐 청춘의 온도가 뜨겁던 순간, 20대. 난 속만 끓으며 그 순간의 온도를 높였다. 언젠가부터 나보다 앞서가는 시간 앞에 초조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을 펼쳐놓고서 답 안 나오는 계산을 했다. 답이 없더라도 선택은 해야 했다. 객관식 문제를 풀다 답이 헷갈릴 때 그랬듯, 뭐라도 찍어야 했다. 그게 비록 오답일지라도 내일 던질 패를 준비해야 했다. 그때 배운 인생은 그런 거였고, 그렇게 하루를, 일 년을, 십 년을 버텨야 했다.


내가 가진 패는 '에이'가 아니라 '에라이'였다


‘인생’이란 걸 도박에 비유하는 게 부적절할 수 있으나, 인생은 도박보다 까다롭다. 인생은 확률이란 걸 무의미하게 한다. ‘내가 어떤 일을 더 잘할 수 있을까?’란 물음은 자신 혹은, 타인의 평가를 통해 윤곽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배팅을 쉽게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해낼 가능성이 높은 일이 반드시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다. 아니, 그보다 더 빌어먹을 문제는 간혹, 내가 가진 패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배팅을 해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에 있다.


그래도 어쨌든, 아무튼 ‘제시간에’ 배팅해야 한다. 20대의 끝자락에 깨달은 건, 계산할 수 없는 패들 사이에서 고민만 하다 시간을 버리느니, 일단 뭐라도 과감히 배팅하라는 것이다. 그 순간 가장 아까운 건 '실패라는 결과보다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닐까'는 개똥철학을 처절히 익혔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써볼까 말까 고민한 영화에 관한 글을 더 늦기 전에 시도하고 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서 정작 관심을 가졌던 건 좋은 펜이었다


이 책을 쓰는 이유

이런 글은 독자를 생각하고 쓰는 글이지만, 내 글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전달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읽어도 될만한 가치가 는지도 모르겠다. 내 글은 내 인생처럼 예측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글은 ‘나’를 위해 쓰는 글이다. 내가 하루라도 어렸던 순간의 생각을 기록하고, 미래의 심심한 어느 날 꺼내 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며칠에 걸쳐 쓴, 10년 치의 일기라고나 할까. 세상이 나를 기억해줄 리 없기에 나라도 내 모습을 기억하고자 하는 발악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또 하나, 이 글을 쓰는 건, 오만가지 불안함이 나를 덮치기 위해 매복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버티기 위함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극도로 사치스러운 이유에서 이 글을 쓴다 밝힌다. ‘있어 보이기 위해’ 글을 쓴다. 지적인 사고를 하는 것만 같은 내 모습, 이것으로라도 부스진 내 인생에 허세를 부려보고자 하는 유치한 마음. 부끄럽지만 이 유치함이 글쓰기의 꽤 강렬한 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계란 한판’이란 나이를 앞두고 제대로 이룬 게 없었다. 어릴 적 일기장에 쓴 '위인 같던 어른의 나'는 등장한 적도 없는데 퇴장해버렸다. 무기력이 늘어가는 이 시기, 뭔가를 하고 있었다고 나를 위로하고, 또 누군가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열심히는 살고 있네요’라고 위로를 받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자조적 이야기, 자괴적 무드가 도를 넘었다. (이 글의 장르는 에세이도 비평도 아닌, ‘자기파괴의 글쓰기’라는 장르일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자기파괴적인 글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이들은 ‘이런 사람도 잘 버티고 살고 있구나. 심지어 글도 쓰는구나’라며, 역으로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게라도 이 글이 타인을 힐링해줄 수 있다면, 이 글쓰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일이 될 것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러분! 자조로 시작한 이 글은 희망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읽어준다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많이도 썼다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

자기 반성문 같던 앞의 글과는 달리, 놀랍게도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는 영화에 관한 (나름의)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룬 글이다. 여기엔 20대에 봤던 영화 중 이런저런 의미가 되어준 영화를 모았다. 수많은 영화 중, 내 ‘부스러진 인생’을 적셔준 영화들이다. 내가 방황할 때, 다행히 거기 있었던 영화들이다. 지금부터 그 고마운 영화들에 관한 개인적인 감상과 비평 비슷한 것을 시도한 흔적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앞으로 쓸 글들은 영상문화를 잠깐 공부했던 시기에 익힌 한정적인 지식만으로 시도한 비평이다. 덕분에 부족한 면이 많을 것이다. (인정한다) 그래도 이 책의 의도인, ‘20대의 설익은 사유’를 기록하기엔 적절해 보인다. 내 글의 부족함을 알기에, 나 자신을 ‘아닐 비’를 쓴 비(非)평가라 부르고는 한다. 혹은, 나를 가엾이 여겨 ‘슬플 비’를 쓴 비(悲)평가라 부르기도 한다. (30대에도 여전히 영화가 좋다면 진짜 비(批)평가에 도전해볼 수 있지 않으려나)


이번 글은 ‘글쓴이의 말’ 정도로 첫 부분에 들어갈 것이다. 다른 위대한 작가들이 이 부분을 언제 쓰는지 모르겠으나,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에서는 정말로 본격적인 글쓰기를 앞두고 ‘글쓴이의 말’을 쓴다. 부디, 앞으로 쓸 글들이 모여, 하나로 잘 완성되기를. 이 글쓰기가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며, 목차부터 차례차례 적어나간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니, 이제 반만 더 쓰면….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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