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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31. 2018

[굿나잇 앤 굿럭] 언론학도가 되었던 이유

나의 글쓰기, 그리고 자기 검열

스무 살에 가졌던 꿈이 있다면, 나 스스로가 뭐가 되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었다. 공부하라고 해서 했고, 시험을 망치면 인생도 망한다고 교육받았다. 생각해보면, 시험을 잘 보면 인생이 성공한다는 이야기는 그 어떤 어른도 하지 않았던 거 같다. 역시 어른들은 책임질 말은 하지 않는다. 현명하다.


언론학도가 된 단순한 이유
워터게이트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표현의 자유와 <굿나잇 앤 굿럭>
나의 글쓰기와 자기 검열


닉슨 대통령을 무너뜨린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언론학도가 된 단순한 이유

언젠가 인생에서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는 것들에 관해 들었던 적이 있다. 하나가 배우자였고, 다른 하나가 직업,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전공이었다. 지극히 대학생 위주의 관점이지만, 사랑과 인생의 목표만큼은 자신이 선택해야 후회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저 말을 듣기 전에 대학 입시 원서를 썼지만, 어렸던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뭐가 될지 몰라도 재미있는 걸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전공을 선택한 특별한 계기도 하나 있었다.


시골에 있던 고등학교에 굉장한 경력을 가지고 있던 강사 한 분이 오셨다. 그날 그분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언론의 힘에 관해 열변을 토하고 가셨다. 그분이 누구인지, 강의 내용이 어땠는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세상을 바꾼 기자들의 활약을 들었다는 건 선명히 기억한다. 당장 내 인생 하나, 학교 교칙 하나도 바꾸지 못하는 데 글을 써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더불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학문이라면, 배워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단순한 생각이 이어져 난 언론학도가 되었다.


그래서 직접 배운 언론학은 어땠을까.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많은 밤을 지새웠지만, 졸업할 때 내게 남은 지식은 SMCRE, 인지부조화, 피하주사 효과 등의 고급스러운 언어와 몇 가지 능력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능력은 ‘한 문장을 열 문장으로 늘려 쓸 수 있는 연금술’이었다. 레포트 작성에는 정말 좋은 스킬이었지만, 졸업과 동시에 쓸모가 없어진 스킬이기도 하다. 요즘 자소서는 적은 글자에 요점만 담게 한다. 드라마 <미생>만 봐도 신입 사원에게 최대한 짧게, 적은 단어로 요점을 정리하게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처럼 지금 쓰는 글도 간략히 쓰기 위해 몇 번을 고쳤는지 모른다. 내가 익힌 연금술은 반사회적인 글쓰기 기술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진심으로 언론학을 좋아했다는 거다. 대학생일 때, 내가 배우는 것들을 너무도 좋아했다. 언론학과 문화에 관해 배우는 게 좋았고, 덕분에 이렇게 잡문일지라도 성실히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언론과 표현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영화이자 내 글쓰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영화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과 <굿나잇 앤 굿럭>이다.


밥 우드워드를 연기한 배우이자, '선댄스 영화제'의 창시자 '로버트 레드포드'다


워터게이트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의도치 않게 ‘워터게이트’ 내 인생에 나침반이 되어준 사건이었다. 하지 언론학도가 된 이후, 아주 나중에야 이 사건에 관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특히, 영화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영화로는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있다. 촬영 감독 ‘고든 윌리스’가 카메라를 들었던 작품으로 ‘어둠’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마술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의 어둠을 활용한 촬영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 닉슨 정부의 구린 일, 그림자를 파헤친다는 이야기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촬영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를 비롯해 고든 윌리스의 작품을 보는 게 많은 영감을 줄 것이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들을 멋지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어렸던 언론학도가 기대한 레전드의 모습은 책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우아하게 글을 쓰는 기자였다. 하지만, 영화는 그 환상을 무참히 깬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서 본 기자는 작은 증거를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것, 대부분은 쓰레기가 될 오만가지를 뒤진다. 그리고 그 쓰레기들을 연결해 하나의 유의미한 단서를 만들어 내고, 아주 더디게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칼 번스타인을 연기한 배우는 <졸업>, <레인 맨>으로 유명한 '더스틴 호프만'이다


이 영화는 성공적인 탐사 보도에 필요한 요소가 거의 다 있다.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그들이 사회를 보는 객관적이고 당당한 시선, 협박과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의 증인이 되어준 내부 고발자 ‘딥 쓰로트’, 그리고 이들을 지원해줄 진정한 선배이자 편집인 벤 브래들리까지 진실이 전달되는 과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특히, 내부 고발자의 역할이 특별하다. 그는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원래 속한 조직에 등을 돌리는 인물이다. 누군가에게는 ‘배신자’이지만, 그들을 지탱하던 조각 하나가 빠지면, 덩달아 거짓도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런 내부 고발자의 활약은 아주 먼 이야기도 아닌데,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사건인 ‘최순실 게이트’에도 내부 고발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워터게이트’를 공부하고, 영화로 본 내겐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영화 속 두 기자는 인터뷰어에게 당당히 불청객이 될 각오가 있었고, 그래서 쉽게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었다. 또한, 식은 커피를 수십 잔 먹어야 할 정도로 위도 튼튼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어렸던 언론학도는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같은 끈기와 정의를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진 기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곧바로 내 의지를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얼굴에 철판을 깔 용기가 없었고, 식은 커피를 수십 잔 먹을 건강함도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기자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에드워드 머로가 쥐고 있던 담배는 훌륭한 PPL이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와 <굿나잇 앤 굿럭>

미국 수정 헌법 1조엔 ‘표현의 자유 보장’에 관한 내용이 있다. 미국 민주주의의 성장엔 이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과정이 있었고, 이 전통을 만든 많은 기자가 있었다.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스포트라이트> 등의 영화를 통해서 기자들의 활약상을 볼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리의 헌법에도 표현의 자유에 관한 조항이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에 관해 고민한다. 그리 대단한 글을 써본 적이 없고, 사회에 영향을 주는 글을 써본 적은 더더욱 없지만, 종종 내가 쓴 글이 어떤 영향을 줄지, 그리고 내게 어떤 영향을 줄지 고민한다.


나의 20대엔 이 표현의 자유가 안보와 대립하던 시기가 있었다. 문화계에 블랙리스트가 있었던 시절이다. 정부 및 정책을 향한 비판, 혹은 특정 작품을 향한 비판을 쓴 글이 놀랍게도 반사회적인 활동으로 보일 수도 있던 시절이다. 누군가를 언급하고, 어떤 것을 말하기만 해도 반사회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힐 수 있었다. 이런 시절을 정면으로 통과한 탓일까. 에드워드 머로가 조셉 매카시와 한판 붙었던 사건을 영화화한 <굿나잇 앤 굿럭>은 남 이야기 같지 않았다.


<굿나잇 앤 굿럭>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열렬한 애국자(?) 매카시와 그를 향해 반기를 들었던 언론사 CBS, 그리고 방송을 만들던 언론인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배경은 냉전 시대의 미국으로 공산주의를 향한 두려움과 분노가 가장 컸던 시기다. 이때, 매카시 의원은 미국의 정부 안에 2백 명 이상의 현직 공산당원이 활동 중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한다. 전쟁 직후였고, 공산권의 위협이 가장 컸던 시기였기에 매카시의 공포감 조성은 성공적이었고, 그는 많은 인사를 압박할 수 있었다.


<굿나잇 앤 굿럭>은 흑백의 이미지가 영화의 시대를 표현하면서, 주제도 함께 드러낸다


이 공산주의자 폭로전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매카시 의원의 의견에 반대하면,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히는 상황에 이른다.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반매카시=공산주의’라는 등식이 성립되었고, 이 탓에 공개적으로 마녀사냥을 당하는 이도 있었다. 그의 활약으로 정치, 문화 및 다양한 분야의 인물이 공개적으로 사상 검증을 받아야 했다. 이런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미국 시민권을 박탈하고 미국 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런 어이없는 코미디를 참지 못한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는 자신의 방송에서 매카시를 공개 비판했고, 그 덕에 매카시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 <굿나잇 앤 굿럭>은 매카시의 광풍, 표현의 억압과 방송 검열에 도전하는 에드워드 머로 및 CBS의 언론인을 카메라에 담는다.


에드워드 머로에 잠깐 설명하자면, 그는 1930년대부터 CBS 소속으로 유럽에서 전쟁 상황을 알려주던 종군기자였다. 라디오가 주류 매체일 때부터 활약한 언론인으로 TV 시대에도 그 활약을 이어간다. <See It Now> 등의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며, 저널리즘이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선구자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Good night and good luck"은 그가 방송을 마칠 때마다 했던 끝인사였다.


워터게이트가 권력의 부패와 맞섰다면, 에드워드 머로는 이념의 광풍을 정면으로 맞아야 했다. 앞서 워터게이트처럼 거대 권력에 도전한 일이라는 건 유사하지만, CBS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근성이 필요했다면, 에드워드 머로에게는 몇 가지 딜레마가 있었다. CBS는 언론이기 이전에 기업이고, 이들은 광고를 통해 수익을 확보한다. 반사회적인 기업에 광고를 줄 기업은 없었고, 에드워드 머로는 이 때문에 자신의 표현에 있어 압박을 받는다.


<굿나잇 앤 굿럭>에서 만날 수 있는 젊은(?) 아이언 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그 외에도 매카시를 비판한다는 건 어떤 이유가 되었든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런 비난의 화살은 자신의 동료에게도 쏟아졌다. 그리고 이런 비난을 이기지 못한 동료는 자살하고야 만다.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말을 한다는 게, 자신과 함께하던 동료보다 중요한가. 그리고 매카시를 비판한다는 게 옳은 일인지, 그리고 이게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등 그의 말 한마디의 무게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이겨내고 그는 묵묵히 할 말을 해낸다.


이념의 대립은 접점을 찾는다는 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고, 지난 역사에서도 많은 전쟁으로 이어진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립의 가장 큰 문제는 이념의 차이가 논리적인 사고를 차단하고, 서로의 소통을 차단해버린다는 데 있다. 이념의 차이는 극단적 흑백 논리로 이어져 아군과 적군을 나눠버린다. 그래서인지, 이념의 구분 짓기와 싸우는 에드워드 머로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연출한 건 탁월해 보인다. “당신은 공산주의자군요!”라는 말은 “당신은 이 사회와 격리해야 하는 병균이군요!”라는 뉘앙스가 같이 있다.


에드워드 머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모든 국민의 적이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지켜낸다. 우리는 매카시가 몰락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그는 그걸 모른 채, 믿었을 뿐이다. <굿나잇 앤 굿럭>은 에드워드 머로와 매카시의 대립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에드워드 머로가 방송을 만들 때 더 많은 제재를 받는 장면, 패배의 순간에 끝난다. 감독인 조지 클루니는 에드워드 머로의 가치가 ‘승리’보다는 패배 앞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언론인의 자세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좋은 배우이자  <굿나잇 앤 굿럭>을 연출한 조지 클루니


나의 글쓰기와 자기 검열

이런 언론 전설적인 이야기가 내 글쓰기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 ‘표현’에 관해 말하고 있는 걸까. 짧은 시간이지만, 글을 쓰면서 많은 비판과 비난을 받은 글들이 있다. 영화를 정치적으로 읽었을 때, 혹은 정치적인 영화에 관해 어떤 의견을 말했을 때, 평소보다 많은 댓글로 피드백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내용에 자체적으로 검열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성인군자가 아닌지라, 비판과 비난을 쉽게 웃어넘길 수는 없다. 그래도 적확한 비판은 잠깐 아프지만 큰 도움이 된다. 비판을 통해 글을 다시 돌아보고, 문장을 다시 되새김질한다. 그러다 글의 오류를 찾으면 무척 부끄러워지지만, 좋은 공부가 된다. 하지만 비난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앞서 무적의 논리라 말했던 ‘공산주의’처럼, ‘종북’, ‘좌빨’ 등의 단어로 도배된 댓글 앞에서는 막막해진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은 글을 읽고, 의견을 공유하고, 건설적인 대화를 바라는 것 같지 않다. 단지, ‘싫다’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요즘 가장 많은 비난을 유도할 수 있는 단어는 ‘페미니즘’인데, 이 단어를 쓰는 순간 헬게이트는 열린다. 이 단어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이와 관련된 글은 내용과는 관련 없고, 감정이 잔뜩 묻은 댓글과 피드백을 볼 수 있다. 글은 독자가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할 수 있을 때 가치 있다고 믿는 입장에서, 이 ‘페미니즘’은 스스로 피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이렇게 욕을 먹기 싫어서라도 언젠가부터 스스로 검열을 한다. 세상에 겁을 먹은 탓이기도 하고, 영화에 좋은 영향을 주는 글을 쓰고 싶기에, 무의미한 비난을 유도하는 글을 피하고 싶은 탓이기도 하다. 그래도 내 글에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 혼란스럽다. 언제쯤이면 논리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고, 대화를 끌어낼 수 있는 글을 당당히 써낼 수 있을까. 이런 내게 외친다. “굿나잇 앤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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