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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un 07. 2018

[그녀] 목소리가 들려준, 황홀한 고립

나를 세상으로 꺼내준 이들에게

안쓰럽게도 20대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기엔 내 글과 가장 많은 소통을 했다. 펜으로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써 내려가는 시간은 뭔가를 표현하는 동시에, 스스로 뭔가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었다. 종이 한 장을 두고, 자아가 분열되어 마주 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이 깊어질 것이라는 기대했었지만, 그보다 깊어진 건 내 안으로 점점 더 꺼져가는 구덩이였다. 내 글에 집착하면서 시야가 좁아졌고, 발전도 기대할 수 없었다. 내가 판 구덩이에 갇혀 꽤 오랜 시간 발버둥 쳤던 시간이 있었다. 이번 시간에 이야기할 <그녀>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남자다.


<그녀>는 '사만다'를 제외하면 현대 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청각적 시뮬라시옹사만다

<그녀>는 청각에 관한 영화다. 어떤 분야에서든 이렇게 청각적인 미래상을 보여준 작품은 없었다. 다양한 영화에서 목격할 수 있는 미래 도시는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이미지가 많다. 기계화된 최첨단의 도시, 화려한 조명과 광고, 홀로그램 등이 다가올 미래를 미리 보여주고는 한다. 하지만, 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그녀>의 도시는 시각적으로 지금과 별다를 게 없다.


대신, 이 도시엔 뛰어난 음성 인식 기술과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공지능이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매혹적인 블랙 위도우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관객이 <그녀>에서 만날 수 있는 건, 오직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뿐이다. 그런데 이 목소리만으로도 영화 속에 스칼렛 요한슨이 눈앞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청각의 힘이다.


<그녀>가 청각으로 빚어낸 존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시각과 관련된 개념 하나를 빌려와야한다. 시각과 관련된 개념 중엔 ‘보들리아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이라는 흥미로운 게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시뮬라시옹은 실재를 복사한, 혹은 재현한 이미지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지각 현상이자 착각을 뜻한다. 가상현실을 떠올리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이미지가 아닌, 소리로도 가상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들려)준다.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목소리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을 실재한다고 믿고,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녀> 속의 인물들은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서로 대화를 많이 하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그녀> 이전에는 청각이 가져올 수 있는 가상현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매일 이어폰으로 귀를 밀봉하며 청각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음에도, 이를 시뮬라시옹에 접목할 수 있었던 건, 이 영화 덕이었다. 이는 <그녀>가 시각기술의 진보 및 이 기술의 우월성을 전시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영화 속의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라면 목소리가 아닌 진짜 같은 이미지, 영상화된 사만다를 충분히 구현할 수 있었을 법한데,(<블레이드 러너 2049>처럼 말이다.) 영화는 관심이 없다. 이렇게 <그녀>는 청각, 그 자체에 집중하고, 고민하게 한다.


왜 <그녀>는 시각을 철저히 배제한 채, 청각의 영화가 되었을까. 보이지 않는 대상과의 육체, 혹은 외모를 초월한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시각적인 것에서 벗어나 내적인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영화였을까. 아니면, 인공 지능이 인간과 대등, 혹은 더 뛰어난 인격체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깊은 철학적 고민을 하게 하는 <그녀>에 다가가는 방법은 분야별로 다양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이 영화를 읽어보려고 한다.


<그녀>의 엔딩은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진한 여운을 남긴다. 에이미(에이미 아담스)가 테오도르에게 기대어 야경을 바라보는 이 장면에서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진짜 인간에게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진짜 인간과 어딘가를 ‘함께’ 응시하는 최초의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선 성숙한 테오도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성장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가 청각에 집중하고, 그것이 만든 가상현실을 다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테오도르는 무엇으로부터 성장했을까.


음악을 들을 때,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지 않을 것이다


청각적 시뮬라시옹의 판타지

청각은 유연한 감각이다. 읽으면서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은 제약이 있지만, 들으면서 다른 활동을 하는 건 비교적 쉽다. 라디오를 들으며 설거지를 할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쓸 수도 있다. 즉, ‘듣기’는 다양한 활동과 함께할 수 있다. <그녀>에서 테오도르도 음성을 통해 사만다와 교감하며, 일상을 병행했다. 덕분에 지속적인 교감이 가능하고, 사만다가 늘 함께하고 있는 것만 같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보이지 않아 아쉬웠겠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그녀와의 거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삶을 공유할 수 있었다. 시각이 바라보는 대상과 자아의 거리를 인지하게 한다면, <그녀>의 사만다는 테오도르와의 거리를 느낄 수 없게 한다. 사만다의 목소리는 테오도르와 같은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을 사랑이라 말한다면, 테오로드는 사만다에게 필연적으로 끌릴 수밖에 없었다.


매력적인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잠시 잊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청각이라는 감각을 더 생각해보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걸을 때, 그 거리가 평소와 달리 느껴진 적이 없는가? 슬픈 발라드를 들으며 텅 빈 거리를 걸을 때, 더 쓸쓸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는가? 이렇게 음악 덕에 일상적인 길이 드라마, 영화, 혹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인지되는 순간이 있다. 이를 청각이 만든 가상현실로 보면 어떨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청자의 몸을 감싸고, 그 덕분에 일상은 음악을 거쳐 새롭게 체험된다. 여기서 청각은 청자의 삶을 돋보이게 해주는 감각이 되거나, 혹은 의미 없는 공간을 청자만의 특별한 공간으로 분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세상의 주인공이 나라고 말해주는 청각의 시뮬라시옹은 환상적이고 황홀하다.


<그녀>를 두 번 이상 본다면, 테오도르의 저 미소가 굉장히 씁쓸하게 다가올 것이다


청각적 시큘라시옹의 위험

청각적 시뮬라시옹은 위험한 면도 있다. <그녀>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가상의 세계로 고립시키기도 한다. 그는 진짜 사람과의 대화엔 관심이 없었고, 가상의 존재 사만다와의 대화에만 몰입한다. 실존하는 사람보다 실체가 없는 청각적 데이터이자 알고리즘과 소통을 추구하는 이 모습은 무척 기이하다. 소외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짜 위험은 따로 있다. 학습능력이 있는 인공지능이라고는 하지만, 사만다는 고객을 위한 맞춤 시스템에 불과하다. 사만다가 생성될 때, ‘고객님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던지는 질문들을 시작해, 많은 부분이 테오도르에게 최적화되어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성향에 맞게, 그가 만족을 느낄 수 있게끔 완벽히 프로그래밍 되어 있었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반영된 허상이며, 그녀와의 대화는 테오도르의 요구를 잘 맞춰주는 프로그램과의 대화, 즉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 할 수 있다. 이 OS는 결코 불만족을 주지 않는다. 아니, 줄 수 없다.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프로그램이니까.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나눴다는 ‘섹스’는 자신이 만든 허구의 존재를 대상으로 행한 자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나눴다는 커뮤니케이션도 자신의 요구를 완벽히 충족해주는 프로그램을 이용한 자위라 할 수 있다.


자아와의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잘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


이런 테오도르의 모습은 개인이 자아와의 사랑에 빠진 상황 및 자신의 세계 속에 갇힌 상황을 보여준다. <그녀>는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내면에 고립되고, 고독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발전 없이 정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서로 기대 살아야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에게는 치명적이다.


나르시스가 결국 자신과 사랑에 빠져 물에 빠졌듯, <그녀>의 테오도르도 자신과 사랑에 빠졌고 현실과 점점 멀어졌다. 테오도르는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혹은 자신에게 파묻혀 안식을 취한다. 그는 타인과의 갈등이 싫고, 타인 때문에 고민하기가 싫었다. 자아 속으로 파고들던 테오도르는 좁은 자신의 세계만 탐닉할 뿐, 더 성숙할 수 없고, 더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재미있는 건, 테오도르의 욕구를 맞춰주던 인공지능 사만다가 성장한다는 데 있다. 스스로 진화하던 그녀는 테오도르라는 틀을 견딜 수 없게 되고 떠난다. 테오도르라는 인간은 정체되어 있고, 발전 없이 자위하고 있지만,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여겼던 허상은 진보하고 있었다는 건 아이러니하면서도 어딘가 소름 돋는 일이다.


그리고 성장한 사만다가 테오도르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건,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없기 때문이었고, 이는 캐서린이 테오도르를 떠난 이유와 같은 맥락에 있다. 테오도르가 추구한 사랑은 자신의 방식에 맞춰주는 것이었고, 이런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방식은 인간에게도 프로그램에게도 퇴짜를 당했다. 이렇게 <그녀>는 청각이 만든 가상현실이 한 인간을 피폐하게 만드는 걸 보여준다.


영화의 엔딩을 제외하면 테오도르는 혼자, 혹은 사만다와 함께 세상을 바라본다


어깨를 나눠줄 수 있는 인간테오도르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헤어졌을 때, 그를 위로해준 것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에이미였다. 그리고 테오도르도 에이미를 위로한다. 그는 어깨를 내어주고, 에이미는 그에게 기댄다.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떠나고서야 현실 속 진짜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는 한 통의 편지로 타인과 소통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전 부인 캐서린에게 보내는 편지에 테오도르는 ‘당신을 내 틀에 맞추려만 했다’며 사과하고, 사랑을 전한다.


이런 테오도르의 직설적인 표현은 생각해볼 점이 많다. 그는 대필 편지를 써서, 타인의 진심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마음은 흔들 줄 아는 테오도르는 이상하리만큼 자신의 주변인들에겐 진심을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사만다에게만 모든 걸 털어놓고 공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타인의 글로 진심을 전하고, 실체 없는 허상에게 진심을 말하는 <그녀>의 세계는 무너진 인간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런 세상 앞에 테오도르는 당당히 섰고, 자신의 진심을 직접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과는 다르고, 그래서 분명 갈등을 불러올 수 있는 진짜 인간과 소통을 시작하려 했다. 안락한 가상의 현실에서 탈출해 불편한 세상 속에서,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 하는 테오도르. 그는 관계와 사랑에 관해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해있었다.


자아와의 사랑에 빠진 인간의 모습을 잘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


나를 꺼내준 이들에게

‘쓰기’는 홀로 할 수 있는 활동이었고, 수십 권의 노트에 글을 써 내려가며 수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그래서 테오도르처럼 나 역시, 나와 나의 글이라는 세계에 고립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초고와 수십 번의 재고를 거치며 하나의 글이 완성되었을 때, 그 기쁨에 묻혀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인과의 소통에 무관심했고, 내 좁은 시야를 통해 보이는 좁은 세상에 집착했고, 글 자체도 발전이 있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고집불통인 내 잡문과 피폐해진 내 인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테오도르 같던 나를 구해준 건 내 인생의 에이미들이었다. 무뚝뚝한 내게 먼저 연락해 안부를 물어줬던 이들, 함께 뭔가를 하자고 제안해줬던 이들, 그리고 내 글이 앞으로 걸어갈 수 있게 비판해준 이들 등 수없이 많은 에이미가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줬다. 그들 덕분에 현실감각을 찾았고, 잊고 지낸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피폐한 나를 세상 앞에 설 수 있게 도와주고, 소통할 수 있게 해준 많은 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여전히 무심한 내게 반성하며, 더 성실히 좋은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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