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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un 14. 2018

[위플래쉬] 초콜릿을 거부한 짠 내 나는 남자

"피, 땀, 눈물", 데이미언 셔젤의 잔인한 성공론

 데이미언 셔젤은 샘나도록 멋진 커리어를 만들고 있는 감독이다. 그는 1985년생으로 매우 젊은 감독이지만, 단 세 편의 연출작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위대한 크리스토퍼 놀란이 여태 오스카상을 받지 못한 걸 생각해보면, 데이미언 셔젤이 얼마나 대단한 길을 걷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같은 80년대에 태어났다는 점에서 이상한 친근감이 들기도 하는데, 그는 20대의 마음을 후벼 파는 메시지를 영화에 담기도 했다.

    

데이미언 셔젤은 <공원 벤치의 가이와 매들린>, <위플래쉬>, 그리고 <라라랜드>를 연출했다. 첫 장편 연출작인 <공원 벤치의 가이와 매들린>은 정식 개봉한 적이 없기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고 한다) 국내 관객에게는 뒤의 두 편의 연출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편은 재즈가 중심에 있는 ‘음악’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심지어 <라라랜드>는 뮤지컬을 통해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더 극대화다.


이번 글에서는 <위플래쉬>에서 데이미언 셔젤이 음악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20대의 내게 어떻게 다가왔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앞선 글들에서 예상할 수 있듯, 상당히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다.


'채찍질'을 뜻하는 위플래쉬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앤드류가 연주하는 곡이다


<위플래쉬>, 재즈를 몰라도 압도당한 영화

풍선이 터지듯 영화가 끝난다. 그리고 강렬한 재즈의 선율은 영화관을 떠나도 꽤 오랫동안 귓가에 맴돈다. <위플래쉬>는 그런 영화다.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 중 가장 강렬히, 그리고 깔끔하게 끝난다. 영화는 강렬한 한방으로 스크린과 현실의 경계에 선을 긋고, 관객을 잠시 방황하게 한다. 소리가 잠잠해지고 나서야 무엇을 목격했고, 영화가 무엇을 전하지 생각할 수 있다.


음악에 압도당하는 느낌 자체만으로도 홀렸던 영화이지만, 관람 당시에 관객들이 플렛처 교수(J.K 시몬스)에 대해 주고받는 의견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가 앤드류를 교육한 방법이 위대한 음악가를 양성하기 위한 좋은 과정인지, 아니면 그저 독하고 이기적인 꼰대의 방식이었는지 등 다양한 이야기가 오다. 이렇게 <위플래쉬>는 음악으로 감정을 흔드는 데도 성공했고, 관람 이후 관객들에게 말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였다.


한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는 <위플래쉬>


음악적 성취를 향한 예술가의 고난

(1) 두 개의 문

영화의 시작과 함께 청년이 방 안에서 드럼을 고 있다. 카메라는 그를 향해 다가가다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플렛쳐가 들어온다. 이 장면 플렛처가 문을 넘어 앤드류(마일즈 테일러)의 공간으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플렛쳐가 앤드류에게 특별한 사람임을 암시하는 장면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와 대비되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있다.


카네기 홀에서 미친 듯 연주를 하는 앤드류를 문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앤드류의 아버지(폴 레이저)인데, 그 문을 넘어 앤드류에게 가지 못한다. 앤드류의 아버지는 모욕을 당한 아들이 다시 무대로 가는 걸 막지 못했고, 그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사실, 그는 음악을 하는 앤드류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앤드류가 음악을 하는 공간에서 함께 서 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앤드류의 공간으로 들어간 플렛쳐


이런 관점에서 보면, 카네기 홀의 그 문은 아버지와 앤드류가 속한 세계의 경계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울지 모르나, 그들의 간격은 굉장히 멀다. 한 사람은 위대한 드러머가 되기 위한 위태로운 세계에 앉아있고, 한 사람 돈 벌기 좋은 직업을 추구하는 평온한 세계에 서 있다.


<위플래쉬>에서 앤드류는 친아버지의 공간에서 빠져나왔고, 자신의 공간에서 플렛처를 새로운 아버지로 인정하는 듯하다. 아버지로서의 정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플렛처는 그를 찰리 파커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앤드류는 위대한 예술가를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청년이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학적 아버지의 대결이고, 생물학적 아버지의 패배라는 비극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플렛처같은 멘토가 있다면 끝까지 믿고 따라갈 수 있을까?


(2) 사회학적 아버지의 목표

플렛처라는 아버지의 목표는 아들(제자)이 찰리 파커와 같은 전설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연습을 시키고, 모욕을 주며 끝없이 채찍질한다. (Whiplash는 앤드류가 연주하는 곡의 이름이자 채찍질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여러 가지로 참 적절해 보이는 제목이다) 플렛처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욕과 행동을 퍼부으면서, 그것이 예술가에게 필요한 자극이라 말한다.


이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관객에게 남겨진 몫이다. 플렛처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방법으로 제자를 가르쳤지만, 결과적으로 앤드류의 음악적 성장을 이뤄낸다. ‘비인간적인 방법과 성공적인 결과’ 이 두 가지 사실의 간격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플렛처에 대한 이해가 달라질 것이다. 이 과정과 결과는 가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 데 모두 이용될 수 있다.


사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플렛처의 방법이 아닌 앤드류의 태도다. 앤드류에게 너무도 단호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 혹독한 길을 견뎌낼 수 있었다. 욕을 먹어도, 뺨을 맞아도, 피가 나더라도 그는 그 목표를 잊지 않았다. 피, 땀, 눈물을 모두 쏟았다. 이를 통해 예술적 대가의 길이 쉽지 않으며, 어떤 숭고한 태도까지 필요하다는 걸 보여줬다. 내게 <위플래쉬>는 플렛처보다는 예술적 성취를 위해 고난을 견뎌낸 한 남자를 향한 경외심으로 기억된다. 가끔 내게도 묻는다. “난 내 목표를 위해 피, 땀, 눈물을 얼마나 흘려봤었나”


몇 번을 봐도 J.K. 시몬스의 연기가 특별한 영화 <위플래쉬>


어른이 된 소년

(1) 취향이 아닌 선언

<위플래쉬>에서 앤드류가 타인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드물다. 영화는 앤드류의 다양한 행위 중 음악과 관련된 것만을 집중해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음악과 무관한 장면, 아버지와 영화를 보며 팝콘을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유독 눈에 띈다. 이 장면에서 앤드류는 팝콘과 초콜릿을 섞고 난 뒤, 팝콘만 먹는다.


이 편식은 앤드류의 취향 문제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앤드류가 보이는 삶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듯,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선택해서 가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단맛의 초콜릿이 아닌 짠맛의 팝콘만을 골라 먹으려 했을까. <위플래쉬>의 앤드류는 쉬운 길이 아닌, ‘버드’라는 이상향을 향해 고단한 길을 선택하는 독한 청년이다. 달콤한 인생이 아닌, 땀투성이의 짠 내 나는 인생을 걸어갈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는 인생에서 단맛만을 쫓지 않겠다는 '예술가로서의 의지'를 팝콘으로 표현다.


한 소년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 <위플래쉬>


(2) 어른이 된 앤드류 그리고 포르노

<위플래쉬>는 소년이 어른이 되는 성장담으 생각할 수 있다. '어른'이라는 것을 인간이 성숙해지고, 인생의 쓴맛을 알아간다는 성장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이 글에서는 조금 더 한국적으로 읽어봤다. ‘어른’이라는 한글 단어의 유래는 흥미롭다. 이 단어는 옛말 ‘얼다’에서 유래한 말로,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사람을 뜻하는 ‘이’가 붙어 ‘얼운이’가 되었고, 이것이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얼다’는 ‘남녀가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어른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적인 ‘어른’을 어떻게 <위플래쉬>와 엮을 수 있을까. 영화를 조금 낯설게, 성적으로 읽어보면 이렇다. <위플래쉬>는 음악이라는 겉옷을 걸친 포르노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앤드류가 드럼을 칠 때 흐르는 땀방울은 어딘가 외설적이다. 그 땀이 드럼을 적시고, 드럼은 격렬히 운동하며 격한 음성을 토해낸다. 그리고 앤드류의 표정 역시 절정에 이른 남자의 표정을 연상하게 한다. 이처럼 <위플래쉬>는 에로틱한 장면이 연상되도록 드럼 연주 장면을 연출했다.


외설적인 느낌이 나는 연주장면은 영화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성적인 관점을 더 확장하려면 여자친구였던 ‘니콜(멜리사 베노이스트)’을 봐야 한다. 앤드류는 그녀와 더 깊은 관계가 될 수 있었지만, 찰리 파커처럼 되기 위해서 그녀를 포기했다. 이는 대가의 길을 가기 위한, 한 남자의 고독한 선택으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앤드류의 연주를 포르노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설정을 가져온다면 다른 시선에서 이 장면을 볼 수도 있다.


앤드류는 두 여자(음악과 니콜) 사이에서 한 여자를 선택하는 남자이고, <위플래쉬>는 삼각관계를 표현한 로맨스가 될 수도 있다. 그는 니콜과 관계를 통해서 어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신에게 더 의미가 있는(물론, 그만큼 더 혹독한) 음악과 관계를 맺고 어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번외로 앞의 가정, 음악-앤드류-니콜이라는 구도를 조금 변형시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구도에서 음악이라는 자리에 플렛처 교수를 대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플렛처-앤드류-니콜의 삼각관계로 <위플래쉬>를 봐도 다양한 해독이 가능하다. 앤드류는 니콜대신 플렛처를 택했다. 가학적인 남성과 피를 흘리면서까지 인정받으려는 소년. 그리고 결국, 살며시 미소를 보내는 플렛처의 모습에서 동성애 코드를 대입시켜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앤드류와 플렛처의 밀당은 <위플래쉬>에서 가장 잘 연주된 악기다


데이미언 셔젤의 성공론

<위플래쉬>는 한 소년이 성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선택을 하게 하는 영화다. 앤드류에겐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함께 하는 길로 예술을 포기하고 돈이 되는 진로를 찾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학적 아버지와 함께하는 ‘찰리 파커’의 길이었다. 이 선택지가 더 가혹한 이유는 사랑도 선택해야 한다는 데 있다. 예술을 포기하면, 다른 평범한 사람처럼 연애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술을 택하면, 사랑은 사치가 된다. 앤드류가 니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되었을 때, 플렛처의 교실로 들어간 건 얄궂은 운명이었다. 언젠가 포기해야 할 것들유 양손에 쥔 꼴이다. 이 영화 일과 사랑은 결코 함께할 수 없었다.


이런 데이미언 셔젤의 일과 사랑에 관한 관점은 후속작 <라라랜드>에서도 볼 수 있다. 재즈 연주가가 되고 싶었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미아(엠마 스톤)와 재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는 재즈를 택했고, 원했던 걸 이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리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미아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룬 꿈과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사이에 방황하는 라이언 고슬링을 보면, 꿈이 사랑보다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라라랜드>는 감미롭고, 그만큼 씁쓸하며 다시 보기 두려운 영화다


데이미언 셔젤은 꿈과 사랑은 함께 얻을 수 없다는 걸 지속해서 말해왔다. 그리고 그의 남자들은 사랑보다는 꿈을 선택하며 숭고한 재즈의 길을 걷는다. 앤드류와 세바스찬을 통해 꿈을 위해서는 포기하고, 견딜 것이 무수히 많음을 보여줬다. 전 편이 앤드류의 희열에서 끝났다면, 이번 편은 세바스찬의 공허함으로 끝난다. 이런 반대의 상황을 통해 모든 선택엔 그림자가 있음을 지독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런 데이미언 셔젤의 태도는 꿈과 사랑을 동시에 추구하면, 둘 다 망쳐버릴 것이라는 경고다. 성공을 위해서는 사랑은 잊으라는 잔인한 성공론이다. 재미있게도 그의 영화는 대한민국 청년세대에 진한 메시지를 준다. 포기를 강요받는 ‘N포 세대’와 그의 성공론은 어딘가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가 더 잔인하고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만약, 그가 아카데미를 수상한 위대한 감독이면서, 사랑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꾼이라면 상당한 배신감이 들 것 같다. 그래서 난 꿈과 사랑 중 무엇을 얻었을까. 노코멘트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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