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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un 21. 2018

[졸업] 무빙워크 위의 삶

열두 편의 연재를 마치며

드디어 이 연재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마무리를 위해 남겨둔 영화는 더스틴 호프만이 출연했던 <졸업>이다. 이 영화는 20대의 끝에 있던 대사건, '나의 졸업'과 관련이 있고, 20대를 정리했던 이 연재를 끝맺음하는 데도 적절해 보인다.


난 대학 생활이 모두 끝난 뒤에도, 졸업을 유예했다. 사회로 나가기 위해 필요했던 승차권 ‘취업’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교육 과정을 마친 뒤에도 사회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조금 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무른 생각 탓일까. 결국엔 승차권을 얻지 못한 채 사회로 나와야 했다.


사회의 문턱 앞에서 내겐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지, 행복한 삶인지,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말할 수 없었다. 대단한 일탈을 한 적 없이 이 사회가 요구했던 교육을 무사히 마쳤지만, 아무런 특징이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이 사회가 준비한 교육의 끝에서 ‘대한민국 n번째 청년 공산품’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품은 사회로 팔려나가기 위해 열심히 자소설로 자신을 포장해야 했었다.



이때 떠오른 영화가 <졸업>이다. 영화는 비행기에서 내린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을 따라가며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무빙워크 위에서 출구로 가는 벤자민을 담는다. 그는 가만히 서 있지만,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무빙워크 위에선 그가 가야 하는 방향과 종착지는 미리 정해져 있다. 정해진 길로 저항 없이 걸어가는 이런 벤자민의 모습에서 20대 끝자락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무빙워크 위에 서 있는 벤자민의 상태는 그의 인생과 닮은 구석이 있다. 그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과 처지가 닮았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단계적으로 조립되며 상품이 완성되듯, 벤자민도 부모가(혹은 그 시대가) 원하는 삶대로 흘러와 졸업을 앞둔 성인이 되었다. 그는 졸업이라는 단계를 마치고(무빙워크에서 내리고) 사회로 나가야 하는 하나의 조립품이다. 부모가 만든 길 위에서 앞으로만 내 달렸던 삶은 벤자민을 어떤 존재로 만들었을까. 아니, 그는 어떤 제품이 되어있었을까.



무빙워크를 내려온 소년

벤자민이 집으로 돌아오면 그를 위한 파티가 한창이다. 그런데 벤자민은 자신을 위한 그 파티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이 파티는 그를 위한 파티가 아니다. 그의 부모가 아들이 가져온 졸업장을 비롯한 기타 경력과 학력 따위를 칭송하기 위한 자리다. 이 상황이 벤자민은 혼란스럽다. 찬사를 받는 ‘졸업’과는 달리,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불안함이 잔뜩 섞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파티 장면에선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여럿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벤자민이 받은 졸업 선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졸업 선물로 멋진 차를 선물로 받는다. 어른들은 이 차를 보며 ‘여자들이 많이 따르겠는데? 여자들은 저런 차를 보면 좋아 죽지’라는 대사를 뱉는다. 차의 기능, 차가 가져올 자유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이 비싼 물건이 벤자민을 어떻게 꾸며줄 수 있을지 이야기한다. 이 차는 벤자민이 원했던 물건이라기보다, 어른들이 그에게 사회에서의 지위를 드러낼 수 있게 이름표를 붙여준 것이다. ‘차를 몰 수 있을 정도로 잘 났음’ 이렇게 <졸업>의 벤자민의 부모는 벤자민을 빛내줄 학력과 높은 지위라는 옷을 입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졸업 후의 미래를 묻는 말에 벤자민은 대답하지 못한다. 무빙워크에서 내린 그는 길 잃은 미아일 뿐이다. 그는 어른들이 닦아 놓은 길로만 걸어왔기에 자신의 인생을 고민해본 적 이 없었을 것이다. 우수한 졸업장을 가지고 있지만, 벤자민은 많은 면에서 성장하지 못한 소년에 가깝다. 하지만 이 미아의 방황은 오래가지 않는데, 친절하게도 어른들은 이미 벤자민의 새로운 길을 그리고 있다. 어떤 일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밑그림까지 그리고 있었다.


생일파티 때, 우스꽝스러운 차림으로 물에 뛰어드는 벤자민의 모습은 그의 앞길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이 장면에서는 인생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청년의 비참함까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다행인지 이 비참함 속에서 벤자민은 안식을 발견한다. 떠밀려서 들어 온 물속에서는 외부로부터의 시선과 소리를 차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이후 많은 시간을 수영장에서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 이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이미지는 하나의 비유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정처 없이 떠도는 벤자민의 인생이 물 위를 떠다니는 상태와 겹쳐 보이기도 한다.



로빈슨 부인, 어른의 세계로 안내

로빈슨 부인(캐서린 로스)은 벤자민의 무료한 일상에 자극을 주는 인물이다. 이 자극은 벤자민을 때 묻게 하고, 변화케 한다. 그런데 그 자극이라는 것이 좀 독특하다. 자신의 어머니와 동년배인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에게 ‘어른의 세계’가 무엇인지 직접 가르쳐준다. 그녀 덕분에 벤자민은 졸업과 동시에 '성(sex)'이라는 것에 눈을 뜰 수 있었고, 쾌락을 탐닉한다. 벤자민이 처음 로빈슨 부인을 대할 때엔 우왕좌왕하며, 두려움의 감정까지 느껴진다. 그랬던 소년은 피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고, 호텔을 집처럼 다니며, 영화 속 어른 남자들처럼 변해간다.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이 졸업하기 전, 그러니까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는 그를 보살펴 줬던 부모님 같은 존재다. 그런데 그가 졸업하고 돌아온 날, 그녀의 유혹은 시작되었고 벤자민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그녀는 벤자민의 감춰진 성적 본능을 해방했고, 처음으로 뭔가를 스스로 원하게 하면서, 소년을 ‘성장’시킨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는 비겁한 선택을 하며, 전혀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로빈슨 부인은 불륜 사실이 발각된 뒤에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을 피해자로, 그리고 벤자민을 가해자로 몰아버린다. 이 어이없는 상황 앞에서 사회의 영향력이 없던 청년은 어른들을 설득할 힘이 전혀 없다.


결국, 벤자민은 어른으로서의 첫걸음을 기성세대(로빈슨 부인)의 장난감, 혹은 쾌락의 도구로 시작한 셈이다. 벤자민은 그녀가 파놓은 쾌락의 함정에 빠졌다. 그는 자신이 쾌락에 탐닉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로빈슨 부인의 자위 기구에 불과했다. 그러다 이용가치가 다하자 로빈슨 부인의 죄까지 함께 뒤집어쓰며 쓴맛을 맛본다. 그도 잘한 게 없지만, 어리숙한 상태에서 이용당하기 좋은 먹잇감, 노리개였다는 건 확실하다.


어쨌든, 벤자민은 졸업 후 처음으로 즐거운 일을 찾는 것엔 성공했다. 여기까지 <졸업>은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혹은 생의 감각을 되찾아 주는 성과 일탈에 관해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로빈슨 부인의 딸 ‘엘레인’(캐서린 로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는다. 벤자민이 갈망했던 성적 쾌락이 자신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성적 쾌락을 넘어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한순간이었다.



엘레인, 어른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

엘레인은 벤자민이 졸업 후 처음으로 '자신이 먼저' 사랑한 여인이며, 인생의 목표가 되어준 존재다. 로빈슨 부인이 성적 호기심과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탈출구였다면, 엘레인은 미래를 그려보고 싶은 여성이었다. <졸업>은 이런 대비를 드러내기 위해 엘레인을 카메라에 담을 때, 성적인 요소를 배제하려 애쓴다. 로빈슨 부인과 엘레인의 거리감, 그리고 엘레인과 스트리퍼와 대비되는 이미지를 통해 이를 표현했다.


엘레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벤자민의 모습은 앞서 로빈슨 부인을 대하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로빈슨 부인 앞에서 벤자민은 갈팡질팡하고, 타인의 눈치를 보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엘레인 앞에서는 사랑 때문에 설레고,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어른이었다. 이런 변화된 모습은 엘레인에게 버림받은 뒤에 더 잘 표현되는데, 무작정 그녀의 학교로 찾아가는 모습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이 변화와 함께, 그의 자동차의 역할이 변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자기과시를 위해 어른들이 사준 차는 사랑하는 이를 향해 ‘달려가는 도구’로서, 본래의 가치를 찾는다.


몇 번의 거절에도 포기하지 않던 벤자민은 엘레인의 결혼 소식을 듣고, 분노의 질주를 시작한다. 그리고 <졸업>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시작된다. 차가 멈추고, 남자가 달린다. 그가 미친 듯 달려 도달한 곳은 교회.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구원이 아니다. 벤자민은 성스러운 결혼식에 훼방을 놓고, 연모했던 여인과 함께 도망치면서 자신의 로맨스를 완성한다.


이 절박한 질주와 어른들과 대립하는 대담함은 졸업 직후의 벤자민에게서는 찾을 수 없던 모습이다. 엘레인은 그런 존재다. 벤자민 스스로 감정과 분노를 표현할 수 있게 해준 존재이면서, 동시에 부모님이 원하던 삶과 사회가 정해준 틀에 저항할 수 있게 해준 동력이다. 엘레인에게 벤자민도 비슷한 존재다. 그녀는 벤자민의 용기 덕분에 부모가 결정한 결혼을 거부하고, ‘아직 안 늦었어요’라며 외칠 수 있었다. 이 결혼식의 미친 질주는 구속받던 젊은 세대의 저항과 자유를 향한 의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행복할 리 없는 엔딩, 그리고 지금

벤자민은 원치 않던 결혼에 갇히려던 엘레인을 구했고 연인을 되찾았다. 여태 갇혀있던 그는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며,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것(기성세대, 결혼, 그리고 종교까지)을 통쾌하게 가두었고, 버스를 타고 떠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로맨스의 완성으로 끝난 듯한 <졸업>은 해피엔딩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며, 원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다. <졸업>의 엔딩은 오프닝의 무빙워크를 연상하게 한다.


벤자민과 엘레인이 도피의 수단으로 버스를 선택한다. 이 버스는 벤자민이 타고 왔던 자동차와 비교했을 때,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고 정해진 지역을 계속 맴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의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며, 버스는 이미 누군가 정해 놓은 길로 그들을 데려갈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의 탈출은 완벽하지 못했다. 어쩌면 돌고 돌아 그들은 부모님의 그늘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버스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두 사람이 버스의 맨 뒷자리로 앉았고, 승객들 모두가 그들을 바라본다. 이 버스의 승객 중에 젊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두 사람은 여전히 기성 사회의 적나라한 시선 속에 놓인 어린 존재다. 응시 대상이 된 두 사람의 표정에는 기쁨의 감정이 없었고, (혹은, 표현될 수 없었고) 로맨스 영화의 엔딩에 등장할 법한, 그 흔한 키스조차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 버스에 탄 뒤, 두 사람이 동시에 활짝 웃거나,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도 없다. 그들의 미래는 여전히 깜깜해 보였다.


<졸업>의 벤자민과 지금 우리 세대는 얼마나 다를까. 시야를 미국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1967년이 아닌 2018년의 젊은 세대로 옮겨보면, 의외로 큰 차이가 없음을 볼 수 있다. N포 세대, 88만 원 세대. 등의 수식어를 가진 우리 사회 속 청년들의 졸업 뒤에는 더 큰 허무와 방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스틴 호프만의 그 허망한 눈빛에 담긴 절망감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끝이라도 있었지만, 현실은 계속되고, 그렇게 절망은 이어질 수도 있다.



연재를 마치며...

<졸업>은 실험적인 촬영 기법 및 고착된 시대를 향한 저항을 드러내는 듯 생기가 넘치던 영화였다. 벤자민이 교회를 향해 뛰는 장면을 망원 렌즈를 사용해 롱테이크로 담은 장면은 특히 유명하다. 이 장면은 평면적이고 답답한 화면을 통해, 죽도록 달리고 있는 벤자민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촬영에서의 독특함과 이야기의 힘 덕분에 <졸업>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야기되는 영화다. 그리고 다양한 대중문화 안에서도 인용되며, 영화가 가진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그 덕분에 이 연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로 고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열두 편의 연재가 끝났다. 마감이란 걸 겪어보며 매주 긴장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줄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기분 좋은 떨림으로 기억된다. 너무도 장황하고 두서없고, 비평도 에세이도 아닌 어중간한 글을 써내며 부족함에 부끄러웠고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도 크다. 하지만, 무사히 연재를 끝냈다는 작은 성취감을 가진 채 끝맺음을 하고 싶다. 조금 더 읽기 좋은 글, 그리고 영화를 더 좋아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라며.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에서 졸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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