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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24. 2018

[록키] 내가 만들 사각의 링

내게 '뭔가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여태 야구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권투 이야기라니, 생뚱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록키>는 야구 외에도 다양한 스포츠를 좋아해서 선택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20대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 영화만큼 심장을 때린 스포츠 영화가 없었던 탓에 선택한 작품이기도 하다. 큰 목표 하나가 좌절되고 난 뒤, 추스르지 못했던 감정을 잡아주는 데 도움을 줬고,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게 해준 영화가 <록키>다.


다시 뛰는 서른 살 루저의 심장
그가 만든 사각의 링
실베스터 스탤론과 록키, 그리고 나


지금은 <록키>보다 이 영화에 사용된 OST가 더 유명한 것 같다. 빌 콘티(아카데미 음악상과 에미상을 받은 위대한 작곡가)의 ‘Going The Distance’, ‘Gonna Fly Now’ 등의 명곡은 다양한 영상에서 긴장감을 높일 때 자주 활용되고 있다. 특히, Going The Distance의 경우 MC 스나이퍼의 ‘Better Than Yesterday'에 활용되어 우리에게 더 익숙하다. <록키>를 보고 나면, 이 음악이 나올 때 어딘가를 달리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삶에 극적인 느낌을 부여하고 싶을 때, 아침을 깨우는 알람으로 사용해도 좋을 곡이다. (사실, 아침잠을 깨우는 데에는 어떤 곡도 다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록키>는 영화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스태디 캠’이 가장 먼저 사용된 작품이다. 스태디 캠이란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들고 찍을 때, 흔들림이 줄여주는 장비다. (늘 말하지만, 이 매거진은 고품격 영화 지식서를 지향한다.) <록키>에선 록키를 관조하던 카메라가 그의 마음이 움직일 때, 즉 그가 인생의 목표를 되찾고 훈련을 시작할 때, 스태디 캠과 함께 움직인다. 촬영 테크놀로지가 인물의 감정을 더 강렬히 표현하는 데 활용된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리고 <록키>는 실베스터 스탤론이라는 인간의 역사와 밀접한 영화이기도 하다. 록키 발보아처럼 실베스터 스탤론도 이 영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알렸는데, 이에 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 다시 이야기하겠다.


서른 살 암흑기를 통과 중이었던 '록키 발보아'는 그 또래가 된 내게 특별한 캐릭터다


다시 뛰는 서른 살 루저의 심장

첫 감상 때도 좋았지만, 서른 앞에 마주한 <록키>는 더 강렬했다. 록키와 애드리언의 나이가 서른이고, 루저라는 소리를 듣고 사는 데서 왠지 모를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이룬 게 하나 없다’는 록키의 말이 내 상황을 적확히 묘사하는 듯해, 가슴 한구석이 송곳으로 찔린 듯 아렸다.


록키는 인생의 한창 전성기일 나이에 암흑기를 통과 중이다. 카메라도 그의 인생을 어둡게 담는다. 검은 옷을 입은 그가 밤거리를 걸을 때, 어둠과 그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를 밝히는 조명도 없다. 그래서 어둠으로 들어가는 록키는 어둠과 하나가 된다. 그 모습에서 그의 인생이 거대한 그림자 속에 묻혀 있고, 희망이 없다는 걸 볼 수 있다. 록키는 지저분한 동네, 실패자들이 우글거리는 그 동네와 한 데 섞여 있었다.


록키는 과거에 두고 온 것이 너무도 많다.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관장의 대사로 추측해보면, 그는 꽤 재능이 있던 복서였다. 하지만 그 재능을 썩히고 지금은 삼류 복서들과 판돈을 걸고 싸우며, 고리 대금업자 밑에서 수금을 하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록키도 이런 자신의 인생과 환경에 안타까움을 가지고는 있다. 그가 일탈 중인 소녀에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열렬히 말하는 모습에서 그 안타까움을 엿볼 수 있다. 록키는 소녀의 엇나간 모습에서 망가진 그녀의 미래를 봤다. 자신이 사는 이 동네를, 역시나 벗어나지 못한 소녀의 모습이 그려졌을 것이다. 사실, 그가 소녀에게 했던 말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건네는 자조적인 대사로 보인다. 그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한탄하는 자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록키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많은 서른 살의 어른이었다.


<록키>의 가장 멋진 연기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공허한 눈빛 연기다


삼류 복서 록키에게 세계 챔피언이 경기를 제안하면서, 그의 인생은 다시(어쩌면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다. 록키가 오르는 링은 모두에게 기회가 열린 아메리칸 드림을 보여주기 위한 경기인데, 실상은 자본을 위해 챔피언이 기획한 쇼다. 달콤하게 치장된 이 쇼에 출연하는 록키는 미디어의 관심을 받고, 록키 주변 사람들도 그를 통해 꿈을 꾼다. 치장된 쇼라고는 하지만, 이 대결 덕에 록키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변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모욕만 주던 관장이 직접 매니저가 되어주겠다 나서고, 주변의 지인들도 그를 도우려 애쓴다. ‘아메리칸 드림’이 걸린 이 대결은 그의 삶에 빛을 내리쬔다.


무너지던 인생에 챔피언이라는 목표가 생긴 뒤, 록키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움직이고자 애쓴다. 다시 권투를 제대로 배우고, 조깅으로 아침을 연다. <록키>에서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은 록키가 새벽을 뚫고 달리는 장면에 있다. 조깅 중에 록키가 가장 높은 곳에서 만세를 부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그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며, 그의 삶이 다시 희망으로 빛난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둠 속에 묻혀있던 록키는 그 어둠을 뚫고, 아침을 향해 달린다. 그의 뜀박질, 다시 뛰는 심장이 삶의 어둠을 걷어내고 아침의 태양을 맞이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장면엔 앞서 말한 스태디 캠이 꼭 필요했다. 다시 움직이는 록키의 심장과 꿈틀대는 그의 인생을 보여주기 위해,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도 함께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모든 스포츠 경기장은 인생의 축소판이 될 수 있다 


그가 만든 사각의 링

경기가 다가올수록 주변의 사람들과 미디어는 록키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록키는 냉정한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는 챔피언을 상대로 절대 승리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승리 대신 15라운드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걸 이 경기의 목표로 설정한다. 록키는 챔피언을 상대로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경기의 끝을 보려고 한다. 록키가 설정한 개인적인 승리는 ‘경기가 끝날 때, 두 발로 서 있는 것’이다. 록키는 권투의 룰을 자신에게 맞게 바꿨고, 자신이 만든 사각의 링에서 세계 챔피언과 붙으려 한다.


이 게임에서 록키는 15라운드를 견뎌내고, 판정에 들어간다. 예상보다 록키는 대등한 경기를 했고, 그 때문에 모두, 승자가 누구인지 초점을 맞추는 상황이다. 하지만 록키는 끝까지 두 발로 서 있음으로써, 이미 자신이 만든 링에서 승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순간을 맞이했고, 타인의 판정엔 무관심하다.


오직, 그가 관심 있는 건 애드리안 뿐이다. 경기가 끝난 순간부터 록키는 애드리안만을 찾는다. 그가 만든 룰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사람, 그의 승리를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록키가 챔피언과의 경기에서 유일하게 얻고 싶었던 보상은 애드리안 앞에 자신을 증명하고, 그녀의 사랑을 얻는 것이었다. 결국, 경기의 결과는 록키의 패배였지만, 이런 승부의 결과는 <록키>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이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 <록키> 


록키와 애드리언은 서로의 삶이 루저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때, 의지했던 사이다. 남들은 무시했던 서로의 장점과 가치를 알고 응원하며 사랑을 키웠다. 서로의 응원 덕에, 두 사람은 모두 세상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다. 애드리안이 답답하다며 욕하는 사람들에게 록키는 그녀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것뿐이라 말한다. 그러고는 남들이 그녀의 단점이라고 지적하는 것들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라본다. 록키만이 애드리안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세상 밖으로 인도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록키>는 오래전 무너져 빛이 보이지 않던 인생을 끝까지 버티고, 기어이 희망에 도달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희망의 중심에 권투라는 스포츠가 있다.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맞고, 때리고, 버티는 록키의 모습은 승리 이상의 감동을 준다. 이 영화에서 권투는 승패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는 스포츠이고, 그 사각의 링 안에서 한 남자의 인생이 다시 빛난다.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발악하는 루저의 투지는 져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비릿하고 울컥한 뭔가를 전한다. <록키>의 링 안엔 패자가 없다. 가슴 벅찬 승부만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 스포츠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작위적인 승리보다 진실성 있는 패배의 서사가 얼마나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준 <록키>


실베스터 스탤론과 록키그리고 나

앞서, 글의 서두에 실베스터 스탤론이 이 영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고 했다. 말 그대로 <록키>는 그의 삶과 맞닿아 있는 영화였다.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알게 되면, <록키>를 더 뜨거운 영화가 된다.


배우가 되고 싶던 청년 실베스터 스탤론은 큰 꿈과 달리 삼류 배우였다. 심지어 포르노에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로 할리우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그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준 영화가 <록키>이고, 놀랍게도 이 영화는 실베스터 스탤론이 직접 쓴 이야기라고 한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들 때,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반드시 자신을 주연으로 쓸 것”


좀 과한 가정이지만, 실베스터 스탤론도 록키 발보아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영화의 흥행도 당연히 중요했겠지만, 일단 자신이 영화의 주연으로 당당히 연기하고 있다는 데에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록키가 사각의 링에서 뛰었듯, 그는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모든 걸 쏟고 있었다. 이런 꿈의 실현에 실베스터 스탤론은 큰 가치를 두지 않았을까. 록키가 15라운드가 끝나고도 링에 있고 싶어 했듯, 영화가 크랭크업되는 순간까지 주연으로서 그 자리에 서 있겠다는 걸 목표로 노력하지 않았을까.


내게도 '나의 링에서 뭔가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불어 영화의 록키가 보이는 자조적 태도와 지친 연기는 ‘연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삼류 배우 생활에 찌든 실베스터 스탤론 본인에게서 우러나온 진짜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실베스터 스탤론과 그가 만든 록키라는 인물의 삶은 맞닿아 있었고, 두 인물의 감정이 공명하면서 <록키>는 더 큰 감동을 준다.


내 또래의 청년들은 세상이 제시하는 수많은 게임에 참여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승리를 갈구해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다른 게임에 참여하는 이도 있겠지만, 취업의 문 앞에서 회사가 원하는 수많은 ‘자소서’를 써야 하는 입장에 놓은 이들이 더 많지 않을까. ‘자소서’를 넘어 ‘자소설’을 쓸 때면, 가끔 생각한다. ‘내가 이룬 게 뭐가 있고, 이곳에서 이룰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이런 시대에 나 자신에게 진짜 승리의 조건은 무엇일지 <록키>는 고민하게 한다.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나 자신도 ‘나의 룰’을 밀어붙이기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내가 만들 룰이 무엇인지도 불확실하다. 그런데도 <록키> 보고 나면, 내가 참여할 하나의 게임이 끝날 때, 작은 것이라도 이뤄내기를 바라게 된다. 그렇게 내 삶에 이정표를 세우고 싶어진다. 이 연재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나 스스로 글쓰기의 고독한 과정과 재고라는 지루한 반복을 잘 버텼다고 느낄 수 있을까. 그래서 드디어 뭔가를 이뤘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우선은 마지막 문장까지 버티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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