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58 변산
<사도>, <동주>, <박열>까지 연이어 역사극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이 모처럼 일상극으로 돌아왔다. <변산>은 래퍼 혁수(박정민)가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이준익 감독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이준익 감독은 앞선 세 편의 역사극에서도 세 명의 청년을 중심에 뒀었다. 사도 세자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갈등하던 청년이었고, 동주와 박열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고민하던 청년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이준익은 ‘역사극’의 대가가 되었고, 묵직한 메시지와 큰 울림을 줬다. 때문에 <변산>은 학수가 이준익의 영화를 관통하는 ‘청년’이라는 속성을 어떻게 잇고 있을지가 기대되었던 영화다.
<변산>의 학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향을 등진 채 살았다. 그는 ‘서울 출신의 고아’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래퍼다. 좁은 고시원에서 자고, 알바를 여러 개 뛰어가면서도 틈틈이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드는 학수의 삶은 많은 것을 포기하기를 권유받는 N포 세대의 현실을 비추는 듯했다. 이런 현실 속에 감독이 준비한 서사는 고향에서의 안식과 묵은 갈등의 해소인데, 올 초에 개봉한 <리틀 포레스트>의 서사와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리틀 포레스트>가 비현실적인 고향의 이미지 속에 펼쳐진 리얼리티였다면, <변산>은 리얼한 고향의 이미지 속에 펼쳐지는 판타지다. <리틀 포레스트>엔 변치 않은 친구와 옛집이 혜원(김태리)의 기억 그대로 박제되어 있다. 이 옛 고향에서 혜원은 잠시 쉬어가며 사회로의 진출을 유예한다. 현실적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게 없어 보였지만,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혜원에게 이입하며 시골에 함께 쉬고, 치유를 받을 수 있던 영화다.
이와 비교해 <변산>은 나이를 먹어 변해버린 친구들, 낡고 낯선 모습의 고향이 학수를 맞이한다. 그는 이 공간에서 무너졌던 부자 관계를 회복하고, 옛 친구와는 화해하며, 사랑도 얻고, 래퍼로서의 성장과 성공도 이뤄낸다. 그는 고향 땅에서 자신에게 부재했던 것들을 모두 얻고, 최고의 순간들을 맞이한다. 달콤한 순간이며, 현실에서는 쉽게 기대할 수 없는 판타지다.
이준익 감독은 고향을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 아름다운 시절의 내가 있는 곳, 인정할 수 없는 곳’ 등으로 표현했다. 이 메시지를 부정할 마음은 없지만, <변산>이 이를 보여주는 과정은 너무 쉽고 편해 보였다. 우선, 캐릭터의 깊이가 얕다. 영화는 인물의 내면을 그리기보다는 그들이 독특한 성격과 과거의 사연만 펼쳐두고서 웃음과 갈등을 만든다. 파편적인 사건들이 이어지며, 그 안의 캐릭터는 깊이가 없다. 이는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며 인물들 간의 갈등에 공감하기 어렵게 한다. 그리고 이런 갈등마저도 너무도 간단히 해결해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영화의 ‘장’을 구분하는 랩은 손발을 오그라들게 한다. 박정민의 랩은 나쁘지 않지만, 랩이 대중화된 근래의 관객이 듣기에 결코 뛰어난 수준이 아니다. 래퍼로서의 심정과 변화를 랩 속에 녹여 내고 이야기의 단계를 구분한 시도는 좋았지만, 그 의도를 전달할 만큼 좋은 랩을 들을 수 없다. 더구나, 학수가 뛰어난 래퍼라는 설정도 의심하게 한다. 이 영화는 랩을 너무 쉽게 봤다.
<변산>은 이준익의 영화 중, 몇 없는 비사극 영화인 <라디오 스타>와 닮은 구석이 있다. 변두리 지역 사람들의 정, 스타를 꿈꾸는 주인공, 그리고 그 지역과 주인공의 케미스트리까지 연결할 수 있는 게 많다. 그러나 영화의 깊이는 간극이 꽤 크다. <라디오 스타>가 최곤(박중훈)과 박민수(안성기)의 관계와 내면의 갈등을 조명한 것에 비교해, <변산>은 인물이 처한 상황 그 이상을 보기 어렵다. 카메라와 인물의 심적 거리가 멀어 보이며, 이는 이준익 감독이 우리 세대의 청춘들에게서도 몇 발자국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
역사극의 청년들을 통해 깊은 울림을 주고, 과거를 통해 현재의 시대를 말했던 감독이 정작, 우리 시대의 청년에게 하고팠던 말이 ‘옛 추억과 고향을 향한 찬가’였다는 점, 그리고 ‘후지게 살지는 말어’라는 메시지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앞선 세 편의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밀도 있는 연출을 느꼈다면 <변산>은 일상극이라는 걸 고려해도 가볍다. 청년들의 삶에 너무 쉽게 접근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변산>을 향한 몇몇 평들에서 ‘꼰대스럽다’라는 말을 목격할 수 있는 건, 이준익 감독이 세대와의 소통에 실패한 채, 자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인상 탓일 것이다. 연이은 역사극의 연출에 지쳐있던 걸까. 이번 영화엔 여유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변산>은 이준익 감독이 웃음과 ‘힐링’을 주고자 했지만, 결국엔 본인만 웃고 힐링할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