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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an 20. 2019

[코코] 죽음으로 그린 동화

02화. 2018년 겨울, 두 번째 - <코코>

<코코>는 자신의 가업을 거부하고 가수가 되려는 소년의 이야기로, 그의 자아실현이 이뤄지는 공간이 저승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소년의 용기에 디즈니의 가족애가 더해져 호평을 받았다. 저승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세계를 알록달록 화려한 색채로 발랄하게 묘사했으며, 마이클 지아치노 등의 대가가 함께한 음악도 인상적이다. 영화에 사용된 곡, 'Remember Me'는 아카데미 시상식 주제가상을 받기도 했다. 350만 관객을 동원했고, 키노라이츠 지수는 97.8%를 기록 중이다.


<신과함께-죄와 벌>의 흥행과 사후세계의 표현

2018년 시작과 함께 천만 영화가 탄생했었다. 스크린 독과점의 논란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워서도 안 될 영화이지만, 독과점이 천만 영화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작년의 몇몇 사례(<군함도> 등)를 통해 봤다. 그렇기에 <신과함께>의 흥행을 무작정 깎아내릴 수 없다. 탄탄한 원작,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유머+신파’ 코드의 조합, 그리고 지옥을 표현한 뛰어난 CG 등이 천만 관객의 원동력이 되어줬을 것 같다.


<신과 함께>를 언급한 건, 천만 영화를 기념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지옥을 표현한 미장센에 관해 말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신과 함께>의 흥행은 ‘덱스터’의 기술력이 완성한 사후세계에 관한 다채로운 표현이 큰 몫을 담당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신과함께>는 신의 영역인 지옥을 살벌하면서도 흥미롭게 그려낸 영화다.


죽음 이후는 그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부터 상상력의 근원이었던 우주처럼 창의성이 채워갈 여백이 많다. 인간이 살아서는 도달하지 못할 곳, 무수히 많은 신화와 상상력이 채워온 땅, 그곳이 저승이다. 그리고 영화도 부쩍 관심을 자주 보이는 무대다. 2018년엔 재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죽음 이후의 사랑을 보여주는 <고스트 스토리> 등이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 다룰 <코코>가 있다.



디즈니가 망자의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

1998년 발매된 <그림판당고>라는 게임이 있다. <코코>처럼 망자의 날이 배경이고, 죽은 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게임은 세계관이 독특했다. 망자들을 중심에 두면서도 다양한 유머와 유쾌함이 더해져 톡톡 튀는 느낌을 줬다. <코코>의 예고편을 보고 디즈니와 픽사가 <그림판당고>가 보여준 죽음과 유쾌함이라는 독특한 조합을 스크린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했다. 그리고 직접 관람한 결과 <코코>는 기대했던 유쾌함에 따스함과 가족애까지 담아낸 걸작이었다.


<신과함께>의 저승이 끔찍한 형벌이 파노라마처럼 전시되는 지옥도였다면, <코코>의 사후세계는 망자들의 삶(이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이 이어지는 공간이다. 금잔화의 꽃잎은 이승에서 저승까지 이어지고, 그곳에서는 헤어진 가족과의 재회라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코코>가 보여주는 망자의 도시는 분주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다. 디즈니와 픽사는 저승을 어둠이 아닌, 빛이 넘치는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덕분에 사후세계에 가질 법한 공포의 선입견을 지우고, 그 대신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코코>는 죽음으로 동화를 그렸고, 이 시도는 과감하면서 황홀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웃을 수 있을까. 웃어도 될까? 삶을 끝, 이별 앞에서 미소를 짓는다는 건 금기처럼 보인다. <코코>는 이에 도전한다. 죽음도 유쾌할 수 있고, 화려할 수 있으며, 웃고 환호해도 된다고 말한다. 조상이 이승의 가족을 만나러 온다는 설정은 우리의 제사와 유사하지만, <코코>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망자의 날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 덕에 <코코>의 죽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디즈니는 죽음으로도 삶을 말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에 다리를 놓는 영화

<코코>는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을 잇고 인간의 여정을 확장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음 자체를 미화하거나 죽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 삶의 의미를 더 풍성하게 한다고 말한다. <코코>의 사후세계는 이승의 삶이 그대로 이어진다. 망자의 생전 기억, 직업, 가족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이는 이승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반영한다.


더불어, <코코>는 망자가 기억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후세계의 망자는 산 자들에게 기억됨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살아있는 자들은 망자를 기억함으로써 그들과 자신을 연결하고 삶을 더 풍성하게 한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종착지 덕분에, 산 자는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살아서 더 많은 걸 이루고, 더 많이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는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있다. 미구엘과 헥터가 경연에서 합창하는 장면은 산자와 망자의 콜라보로 <코코>가 바라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선이 담겼다. 둘은 함께하고, 화음을 맞추며 노래를 하는데, 이렇듯 삶과 죽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걸 <코코>는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었다. 이렇듯 <코코>는 망자의 날을 모티브로 죽음이 삶을 완성한다고 말하는 영화다.



디즈니-픽사의 가치와 한계 

<코코>는 디즈니 픽사의 작품답게 창의성과 상상력으로 꽃 피운 이야기가 추억과 사랑, 그리고 가족으로 완성되는 영화다. 환상적인 연출로 재미와 감동, 거기에 삶의 의미까지 생각하게 한다. 특히, 픽사는 애니메이션이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가 아닐 수 있다는 걸 아주 오래전부터 보여왔다. 이번엔 죽음이라는 묵직한 소재 때문인지 다양한 세대의 관객에게 더 다채로운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코코>는 이야기의 완성도 역시 뛰어난데, 제목으로부터 시작되는 복선은 영화의 중반부에 관객의 뒤통수를 제대로 저격하는 반전으로 이어진다. 곳곳에 심어진 이야기의 복선이 감정을 차곡차곡 쌓게 하고, 마지막에 큰 감동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Remember Me’는 분위기를 더 극적으로 만든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꽤 오래 귀에 맴돈다. 이렇게 연출, 이야기, 미장센, 음악 등을 잘 버무려 <코코>는 죽음으로도 삶, 더 나아가 꿈을 말하고, 행복을 그린 디즈니-픽사의 무시무시한 걸작이다.


이 황홀함 속에서도, 물론 비판은 있었다. 특히, 멕시코의 전통인 ‘망자의 날’을 디즈니에서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으로 이슈가 되었다. 디즈니 입장에서는 백인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 탈 미국적인 관점을 보였다며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찝찝한 게 있다면, <코코>의 서사가 디즈니 프린세스의 그것과 닮았고,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는 데 있다. 디즈니는 망자의 날에 그들의 세계관을 이식하고 있다. 왕족이 아니며, 자신의 길을 개척한 소년에게서 디즈니의 고전적 느낌을 받았다면 어디에서였을까.



디즈니의 왜곡된 오딧세이아

디즈니의 공주는 성에서 나와 모험을 하고,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돌아간다. 성숙한 왕위의 계승자로서, 그리고 자신의 혈통을 확인하는 성장의 서사가 늘 있다. 이렇게 주인공이 집을 나가 모험을 하고, 조건을 갖춘 뒤 다시 돌아오는 서사는 호메로스의『오딧세이아』부터 이어진 고전적인 패턴이기도 하다. <코코>의 미구엘도 이 과정을 따라간다. 그는 자신의 집을 떠나 고조부, 고조모를 만나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한다. 공주들이 왕좌를 확보했듯, 미구엘은 가수라는 진로를 확고히 했다. 그런데 그의 고조부가 역사에 남을만한 가수였다는 게 중요한 동력이었고, 그래서 문제가 될 수 있다.


미구엘은 고조부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죽음 앞에서 자신의 꿈을 도전하는 개척자였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은 의미가 없다던 당돌한 소년은 운명 앞에서도 꿀리지 않았다. 주어진 것보다 원하던 길을 가고 싶다던 소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도전보다는 운명과 혈통을 강조한다. 디즈니의 공주들은 어떤 모험을 겪어도 결국 공주라는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며, 주어진 유전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미구엘도 결국엔 자신의 고조부 헥터가 음악을 했었기에 자랑스러워했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토로한다. 평생 남들과 제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근데 그게 다 할아버지를 닮아서였네요우리가 가족이어서 기뻐요자랑스러워요." 개척자로 집을 나갔던 소년은 혈통이란 운명에 순응하는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따지고 보면, 그의 죽음 여행의 출발지가 ‘혈통의 확인과 승인’이었다. 철저한 혈통주의, 이것이 디즈니의 가족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가능성일까.


분명, 디즈니의 스케일은 점점 확장되고 있고, 과거부터 지적받았던 인종차별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대중의 비판을 수용해 나가는 바람직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변화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들 이야기의 주요한 원형은 보존되는 듯하고 그래서 찝찝하다.



거대한 괴물 기업의 콘텐츠

디즈니가 만든 작품은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워 감탄하고, 또 같은 이유로 비판의 날을 세워야 한다. ‘죽음으로 그린 동화’라는 말처럼 디즈니는 언제나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어린이들이 디즈니란 창을 통해 보는 세상은 무엇이며, 가지는 생각은 무엇일까. 거창하게 말하면, 어떤 이데올로기를 형성할 수도 있다. 과거, 인종에 대해 가지게 된 편견과 이데올로기처럼 말이다.


금기와도 같은 것으로 유머와 감동을 주는 스토리텔링의 귀재들이기에, 디즈니는 무엇이든 그들의 의도대로 변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그들이 이미, 타국의 시체에서 꽃을 피운 걸 <코코>에서도 목격했다. 디즈니의 이야기가 가지는 파괴력은 수용자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할 수 있을까. 그저 한 편의 영화일 뿐이라고 넘겨도 될까. 수많은 합병으로 가장 큰 기업이 되고 있는, 그들의 콘텐츠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건 무모하고 무용한 일일 수도 있다. 혹은, 잠시 주목받을 흥미로운 음모론이거나.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하찮은 음모론 이상으론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가정은 가능하나, 아직은 근거를 제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디즈니가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고, 영화 사업 및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를 더 장악할 언젠가 말해져야 할 이야기라 생각한다. 지금은 아이들의 시선에서 볼 수 없기에 더 적확히 꼬집을 수 없어 답답하고, 그저 이 우려가 쓸데없는 생각이길 바라며 글을 놓아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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