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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12. 2019

[마약왕] 선명한 송강호의 얼굴과 떠도는 환영들

18화. 2018년 겨울, 첫 두 번째 <마약왕>

<마약왕>은 ‘약한’ 영화다. 영화 속 중심인물들은 ‘약을 하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그리고 서사의 연결도 약하다. 송강호를 중심으로 다수의 배우가 거대한 영화를 하나로 묶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붙지 못한 컷들은 날아다니며 영화를 산만하게 하고, 영화의 상영 시간을 더 길게 체감되게 한다. 이 긴 시간 동안 영화에 몰입하는 방법도 ‘약’에 있는 걸까.


우민호 감독의 영화는 길수록 대중의 반응이 좋았다. <파괴된 사나이>가 114분으로 101, <간첩>이 115분으로 131만 관객을 동원했다그리고 전작 <내부자들>이 130, <내부자들디 오리지널>은 180분을 사용해 각각 707, 208만을 끌어모았다이런 흥행 덕분에 이젠 긴 러닝 타임을 무난히 끌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걸까우민호의 <마약왕>은 140분의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같은 돈을 주고 더 긴 영화를 본다는 건 관객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 아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스토리는 길수록 좋다고 말한다다만, ‘통일성과 전체성'이 지켜지는 내에서라는 조건이 있다. <마약왕>은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 영화의 상영 시간이 길었다는 건 우민호가 보여주고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다는 것을 뜻한다그러나 <마약왕>은 빼야 할 것을 남겨두며 이야기를 정리하지 못했다없어야 했을 것들은 영화와 끝내 섞이지 못하고 부유하는 이미지로 남는다.



이 영화는 훨씬 더 많이 보여주거나훨씬 덜 보여줬어야 했다TV 드라마의 형식으로 한 시대를 밀도 있게 담거나몇몇 인물과 사건을 줄여서라도 하나의 주제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마약왕>은 이두삼(송강호)의 성장 및 몰락을 중심에 두면서마약 때문에 변화하는 다양한 인간상을 전시한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1970년대와 그 시대의 기득권그리고 한 사람을 풍자하려는 야심까지 가졌다.


140분에 걸쳐 다양한 걸 시도했지만관객들의 뇌에 남은 게 송강호의 연기뿐이었다는 것으로 볼 때우민호의 수많은 의도는 목표에 닿지 못했다. <마약왕>은 원하던 곳에 도착하지 못한 영화다오직 송강호만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고영화를 먹여 살렸다이 글은 송강호가 도착한 목적지를 정리하고우민호의 닿지 못한 의도를 관객과 이어주려 시도한 글쓰기다.



송강호의 인물들과 갈라서다

이두삼은 1970년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 영화에 입장한다돈은 없지만비싼 걸 만지고 싶어 금은방에서 일하고바다에 뛰어들지라도 재물을 포기하지 않는 집념 등 그는 부에 관심이 많다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송강호의 캐릭터들과 유사하다정도는 다르지만 <변호인>의 송우석(그는 욕을 먹으면서도 영업을 뛰던 변호사였다)과 <택시운전사>의 김만섭(그는 노 머니노 광주를 외치던 택시기사였다)을 초반에 움직이게 했던 동기도 돈이었다.


앞의 송강호가 연기한 인물들은 재물을 탐내던 인간에서 소시민의 삶을 목격하고 변해간다우연한 기회로 <변호인>의 진우(임시완)와 <택시운전사>의 구재식(류준열)의 삶에 들어가고그들에게 공감하며 세상의 부조리함을 느낀다이후 그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해재물을 포기하고 이웃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인간으로 성장한다그런 송강호의 캐릭터들은 정부가 휘두른 폭력의 위협 앞에서도 꿋꿋하게 저항하던 영웅이었다.


<마약왕>은 다르다이두삼은 자신이 직접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고폭력 앞에 노출된다송우석과 김만섭이 목격했던 국가의 폭력을 몸으로 직접 체험한 이두삼은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을 파악했다그리고 변한다. ‘전화 한 통 할 곳이 없어 분노하던 그는 다른 방법으로 이 시대를 돌파하려 한다이두삼은 스스로 영웅이 될 생각이 없던 사람이고동시에 그를 위해 저항해줄 송우석과 김만섭 같은 영웅도 없었다그런 그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은 권력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소시민과 소악마그리고 대악마

이두삼은 ‘마약’ 유통을 시작하며 당대의 권력에 한 단계씩 다가간다. 그리고 갚아 준다. 그는 약자일 때 받았던 폭력을 고스란히 돌려준다. 뺨을 맞고, 칼에 찔리고, 배신을 당하던 소시민은 뺨을 때리고, 칼을 찌르고 배신을 하는 소악마가 된다. 이 과정에서 끝내 등장하지 않아 궁금했던 행위가 하나 있다. 이두삼은 이두환(김대명)을 구하다 술과 오줌이 섞인 걸 마셔야 했다. 초반부 강렬하게 다가온 장면이기에 언젠가 이를 갚아주는 장면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같은 장면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이두삼이 배설물과 함께 있는 장면이 추가로 이어진다. 고문을 당하며 오줌을 지렸고, 백선생(김홍파)이 마약을 제조할 때에도 이두삼은 가축들의 배설물을 치우고 있었다.


영화의 배설물은 두 가지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보이는 그대로 이두삼이 배설물처럼, 냄새를 풍기며 천박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표현 했다. 다른 하나는 우민호가 ‘마약’을 ‘배설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약왕>에서 마약과 배설물은 추악함, 더러움이란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비슷하게 사용되는 걸 보여주며, 약육강식 세계의 서열에 관해 말한다.



이두삼이 오줌과 술을 섞어 먹었듯마약 중독자들은 이두삼에게 산 마약을 술과 함께 섞어 마신다또한그는 마약으로 번 더러운 돈을 곳곳에 먹이며 힘을 얻고 왕이 된다이렇게 <마약왕>은 배설물(마약)을 먹이는 자가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다는 걸 강조한다. <내부자들>이 언론을 통해 당대의 부조리를 꼬집었듯, <마약왕>은 마약과 배설물에 비유해 1970년대의 추악함을 보게 했다.


마약은 누군가의 영혼을 타락시키기에앞서 이두삼을 소악마라 표현한 건 더 잘 어울린다배경에 깔리는 슈베르트의 마왕이라는 곡부터, <마약왕>은 악마의 유혹에 관한 모티브를 영화 곳곳에 심어 두고 있다이 모티브를 플롯으로 구조화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지만죽음으로 인도하는 마왕이란 존재를 마약으로 표현한 건 명백해 보인다.


악마에게 유혹당해 마약을 한 자는 타인을 믿지 못하고자신의 통제권을 잃다 혼자가 된다이는 마약을 팔았던 이두삼이 걷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그를 왕의 자리에 앉힌 게 마약이었듯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것도 마약이었다이 영화에서 이두삼의 안타고니스트는 김인구 검사(조정석)이 아니다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위험을 불러왔던 건 마약이었다이두삼이 소악마였다면마약은 대악마 정도 되지 않을까.



분수를 아는 인간이 되어라

이 타락의 과정에 <마약왕>은 분수를 알라라는 메시지를 뚜렷하게 새긴다영화 속 인물들은 마약에 빠지면 자신의 분수를 모른다그리고 분수를 모르고 날뛰다 화를 자초하고 무너진다이두삼은 마약에 빠지면서조강지처를 외면했다이보다 중독이 심각해지면서 그를 지켜줄 수 있던 김정아(배두나)와도 멀어진다처음엔 가족을 버렸고이후엔 사업적으로 꼭 필요했던 인물을 버림으로써 이두삼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이후 가정과 사회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상태로 피폐해지고마약 왕국도 몰락 맞이한다.


영화에서 제 분수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은 백교수다백교수는 마약의 문제를 알았고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에 노년까지 마약을 곁에 두고서도 큰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더불어그는 빠져야 할 때를 아는 분수를 아는 인간이다그는 이두삼에게 마약 제조법을 알려주고제 몫을 챙긴 뒤 영화에서 유유히 사라진다더 많은 걸 탐하던 이두삼과 달리 필요한 만큼만 챙기고 미련 없이 떠났다.


백교수는 의상에서부터 영화 속 인물들과 차별점을 보인다대다수의 조직원이 어둡고 칙칙한 의상을 입은 것과 달리백교수는 백색의 의상을 입고 있다고결한 느낌을 주며흡사 천사의 이미지로 보일 정도다그를 천사로 봐도 무리가 없을 수 있는데, <마약왕>에서 이두삼이 배울만한 미덕을 가진 건 백교수밖에 없다마약이 대악마의 자리에 있었다면그 반대편에 제 분수와 절제를 아는 백교수는 천사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1970년대의 왕을 담고자 했던 영화

위에 언급한 이두삼의 굴곡 있는 삶과 그 사이에서 마약을 선택하는 순간들의 딜레마만 담아도 엄청난 분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민호 감독은 이 인물 외에도 그 당시의 정권과 대통령을 보여주고자 하는 야망까지 있었다. 영화의 이두삼과 유신정권은 비슷한 길을 걷는다. 유신 정부가 흥할 때, 절정에 올랐던 마약 사업은 정권이 몰락할 때, 함께 추락한다. 이들의 유사한 운명을 어떻게 연결해 볼 수 있을까. 앞서 우민호는 이를 잘 보여주지 못했다고 했다. 그를 대신해 영화에서 떠도는 이미지들을 잡아, 전달하려 했던 것들을 조립해봤다.


<마약왕>은 이두삼을 1970년대를 휩쓸었던 마약왕으로 표현한 동시에, 당시 대통령의 이미지를 겹쳐 보이게 한다. 이두삼이 줄곧 강조하는 출신지 만주(당시 대통령은 만주에서 군대를 나왔다), 그리고 그의 부인 성숙경(김소진)에게 당대 영부인의 옷을 입히거나, 그녀를 영부인처럼 살게 해주겠다는 대사 등에서 <마약왕>은 당대 대통령의 이미지를 넘보고 있다. 여기에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묘사하고, 집안에 마약에 손댄 가족이 있다는 등 노골적인 설정도 여럿 찾을 수 있다.



마약왕과 대통령은 이 영화에서 어떤 속성을 공유하고 있을까우민호 감독은 이두삼과 대통령을 비추며, 1970년대의 힘이 취하게 하는데서 나온다고 말하려 했다이두삼은 마약으로 세상을 취하게 했고왕에 올랐다그리고 1970년대의 독재 정권은 이념으로 세상을 취하게 했고권력을 유지했다. <마약왕>에서 묘사한 당대 정부는 국가 안보를 가장 중요시했으며이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 사상을 이용했다영화에서 빨갱이’ 등의 단어를 사용한 협박을 자주 들을 수 있으며국가는 이런 사상 프레임을 이용해 대중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있었다.


<마약왕>은 광기가 된 사상을 마약과 같은 것으로 본다마약이 인간을 불신하게 하고 고독하게 만들 듯도구화된 반공 사상은 이웃을 믿지 못하게 했다. <마약왕속의 마약과 반공 사상은 인간을 취하게 하고고독하게 했으며이를 이용한 자들에겐 넘볼 수 없는 권력을 선물한다마약으로 세상을 먹여 살린 이두삼의 카르텔이 힘을 얻듯반공 사상으로 세상을 통치하던 이들도 국가의 중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내가 다 먹여 살렸다 아이가라는 이두삼의 대사는 정치인들이 할 법한 대사라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저택엔 퀭한 얼굴의 고독한 남자가 서 있다그는 마약과 사상이라는 악몽에 시달리며 떨고 있다이 장면은 이두삼과 국가가 도구로 활용했던 마약과 사상에 이두삼 스스로가 취해있는 모습이다우민호는취하게 만든 자들이 자신의 광기에 휩싸여 몰락하는 모습을 송강호의 얼굴에 중첩해 보여주고 있었다이 의도가 전달될지 모르겠다만분명 송강호는 홀로 두 얼굴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너무도 생생히 그 순간을 표현해낸 배우 앞에서자신의 역할을 못했던 영화는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했다.



부질없는 환영으로 그친 영화


<마약왕>은 이두삼을 통해 ‘1970년 근현대사’라는 큰 그림을 보여주려는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미지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 이들이 자연스럽게 결합하지 못한 채 스크린에 올랐다. 이 거대하고 막돼먹은 영상 덩어리를 관객에게 소화하라는 건 가혹하다. 뚜렷하게 보인 건, 송강호의 표정이었고, 그 외의 장면과 시간은 의도를 잃고 소모된 채 잔상으로 남았다. 우민호가 비판과 풍자를 위해 사용하려던 이미지들은 <마약왕>과 섞이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이 방랑하는 이미지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환영들이다. 숨겨진 의미와 풍자의 메시지가 있을 것만 같은 환영들이 영화 여기저기 넘실대고, 관객은 이를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결국, 넘쳤던 야망이 영화의 몰입을 방해했다. 그렇게 <마약왕>은 많은 걸 과시했으나, 정작 알맹이가 없는 영화가 되었다. 지친 관객은 등을 돌렸고, <마약왕>은 연말 한파 속에 쓸쓸한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연말 박스오피스에서 <마약왕>은 <아쿠아맨>과 붙었다. 개봉 후 며칠은 박스오피스 최상위에 오르며 우민호의 의도와 영화적 재미가 모두 전달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역시 환영에 불과했고, <마약왕>은 아틀란티스의 왕 <아쿠아맨>에게 왕좌를 내줬다. 왕의 독재를 비판하려 했던 영화가 절대적 왕이 탄생하는 영화에 밀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마약왕>은 영화로 정치와 정의를 말하려는 욕구가 이야기의 완결성을 해칠 때 일어날 수 있는 참사를 보여준 예로 남지 않을까. 정치가 되었든 정의가 되었든, 모든 메시지는 영화를 거들뿐이다. 홀로 튀어선 안 되고,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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