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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26. 2019

[에필로그] 그와 영화의 시간

20화. 2019년 5월 어느 날

길었던 두 번째 연재도 무사히, 그러니까 일정에 어긋남 없이 끝났다. 엄밀히 따지면 연재 순서가 바뀌고, 중간에 목차가 수정되는 등 문제가 없던 건 아니다. 의지박약으로 늘어진 일상, 부족한 체력으로 골골대던 시간을 후회하고 반성한다. 가장 큰 교훈은 연재라는 약속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아닐까.


최초의 연재 [다행히 거기, 영화가 있었다]는 영화에 관한 비평과 개인적 사연이 섞인 잡탕의 글이었다. 그와 비교해 [그와 영화의 시간]은 나를 배제한 채 좀 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연재물이다. 나름 한해의 영화를 결산하겠다던 야심을 가졌지만, 연재 일정이 늦어져 애매한 시기에 2018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 비평을 시도했지만, 감상문 같던 글이 많았고 때로는 홀로 심취해 너무 깊게 파고드는 등 새로운 종류의 잡문을 창조해냈다. 작년에 썼던 글을 다시 꺼내며 좀 더 수정하지 못해 아쉬운 부분도 여럿 있었다.


이보다 마음이 무거운 건 첫 번째 연재보다 더 많은 글을 실었지만, 글을 읽는 분들은 더 줄었고 이전보다 글에 관한 소통도 없었다는 거다. 혼자서 의미 없는 글을 싸지르고 있지는 않았는지, 홀로 글씨 연습하며 보낸 시간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컸다. 글이 많이 부족한 걸 넘어, 이전보다 퇴보했다는 걸 실감하며 앞으로 더 신중히 써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덕분에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는 어떤 뿌듯함보다 의문과 의심 등이 넘쳐나는데, 이 글에선 그걸 풀어놓고자 한다. 두서없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봤다.



1. 영화에 관한 글을 왜 쓰고 있을까

영화에 관한 글을 수백 편을 써왔다. 개인적인 공간에 쌓아온 글부터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기고 및 연재한 글 등 종류도 다양하다. 영화의 관람 후 관성처럼 필기구를 쥐고 빈 종이를 채워 가는데, 언젠가부터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냥 쓰는 듯한 느낌이다. 덕분에 이전에 썼던 표현이나 문장이 반복되고, 썼던 글을 자가복제하는 듯한 나태함이 있다. 이 시점에 왜 이렇게 영화와 관련된 글에 집착하는지 스스로 물어본다.


분명, 최초의 시작은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감독과 배우, 시놉시스를 까먹지 않기 위한 발버둥. 그다음 단계는 '나 영화 봤어, 먼저 봤어, 많이 봤어' 이런 걸 과시하거나 수업 시간에 배웠던 이론을 적용하는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과정이었던 거 같다. 뭔가를 쓴다고 지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데, 참 어렸고 순진했던 시절이다. 그 이후엔 기억이 모호하다. 앞서 말했듯 관성이나 습관, 혹은 중독이었을 거다.


개인적인 공간을 넘어 누군가가 보는 공간에 글을 쓰게 된 이후엔 사명감을 가지려 했다. 좋은 영화를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하고, 영화의 의미와 가치를 확장하기 위해 글을 쓴다는 사명감. 더불어 앞으로 도착할 영화를 위해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쁜 영화라면 이런 영화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랐고, 더 재미있는 영화를 평생 만나고픈 바람이 있었다. 그렇게 글쓰기의 이유를 좋은 영화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러다 이 연재의 끝에서 '이 글이 정말 영화라는 것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의심을 갖는다. 차라리 지적 허영심을 위해 쓴다는 것이 더 솔직하고 맞는 말이 아닐까 하는 회의감. 수백 편의 글을 쓰면서 글쓰기의 이유는 늘 변해왔고, 어쩌면 아직도 그 이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좋은 영화의 기준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도 의문이다. 수백 편을 쓰다 보니 이런 경우도 있다. A라는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가 B라는 영화에선 싫어하는 이유가 되고, C라는 영화에 관대했던 시선이 D에는 엄격해진다. 하나의 영화가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경우가 있지만, 어떤 때는 감독과 배우 등 영화 외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서 있는 복합물로서 인식된다. 어떤 맥락을 제외하고, 직접 쓴 글의 문장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내 글은 내 글로 반박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도 있다. 그 혼란 속에 영화에 관해 글을 써도 되는지 묻는다. 자질을 의심해본다. 혹은, 영화의 복잡함을 느낀다. 영화는 사람이 만들고 그에 관한 글도 사람이 쓰니, 모든 게 인간이란 존재처럼 모호해진다.


한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라 본다. 미학과 취향. 누군가는 영화 속 이야기의 구조, 샷의 미장센, 배우의 연기 등을 근거로 영화를 평가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냥 '내가 이걸 좋아해'라는 근거를 댄다. 감상과 비평 모두 주관에서 출발하고, 한 인간의 시선에서 본 것을 서술하는 것이기에 모호함이 잔뜩 있다. 이 모호함을 하나의 문장을 단정하는 게 가능하고, 필요한 일일까. 미학은 토론이 가능하다 믿었지만, 아름다움을 수치화할 수 없듯 한계가 보인다. 취향은 당연히 토론의 주제가 않는다. 내가 떡볶이를 좋아한다는데, 그 누가 태클을 걸 수 있겠는가. 이 한계 속에 영화를 규정하려는 어떤 글을 쓰는 게 맞을까.


이런 고민을 가진 시점에서 좋은 영화는 무엇이며, 좋은 영화는 무엇을 충족해야 하는지도 묻게 된다. 예술의 관점에서 말하는 미학, 영화를 보는 이들의 취향 중 무엇을 충족하는 게 더 좋은 영화일까. 국내에서 <국제시장>이 <인터스텔라>보다 못한 영화라 단언할 수 있을까. 국제 시장은 더 많은 이들이 관람하고, 덕분에 더 즐거움을 준 영화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주관적인 이 세계에서 영화를 구체적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건 너무도 어려워 보인다. 아니, 불가능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글을 써도 될까.



3. 비평의 질식한 시대

난 비평이 질식한 시대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관객이다. 앞세대의 비평가들은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뤘지만, 그들의 생각이 지금의 대중과 만나게 하는 데엔 실패했다고 단언한다. 그들의 뛰어난 생각을 담을 적절한 그릇을 이 시대에 제시하지 못했다. 이 그릇은 '플랫폼'일 수 있고, 그들이 사용했던 '문장과 단어'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앞세대의 비평가는 영화 이론가, 영화 학자의 반열에 오를 지식이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일반 관객에게 그들의 생각이 닿기엔 멀었고, 그렇게 이제는 배제되어 간다. 나름, 대학 교육과정을 밟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건 아직도 어렵고, 주변에서 비평가들의 글을 즐겨 읽는다는 이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영화를 좋아하고, 꾸준히 보는 이들에게서도 말이다.


난 비평가들의 생각이 대중에게 닿지 못하는 게 너무도 아쉽다. 한 영화를 비평가만큼 열렬히 탐독하는 이가 없으며, 그들이 영화를 해체한 뒤 새롭게 써 내려간 글은 새로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만큼의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이는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도, 관람한 이들에게도 모두 엄청난 선물이다. 과거, 대학에서 읽었던 허문영 비평가의 글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의 글을 통해 봤던 영화는 처음에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허문영'이라는 필터를 통해 본 영화엔 숏 하나하나가 숨 쉬고 있었다. 그 숨결을 통해 영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영화가 더 좋아졌다.


비평이 질식한 시대엔 좋은 영화도 질식해간다. 제 가치를 못 알아준 영화는 사라지고, 겉만 화려한 영화가 스크린에 도착한다. 누군가는 지금 한국 영화의 부흥기라 하지만, 지금 본 상업 영화 중에 10년 뒤에도 기억할 영화는 몇 편이 될까. 다음 세대에게 권하고픈 영화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10년 전에 봤던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달콤한 인생>처럼 말이다.


부흥기라는 말과 달리, 한국 영화가 별로라는 쓴소리도 있다.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는 10년도 더 전부터 비평이 대중에게 외면을 받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 아니었을까. 영화를 뜯어보고 좋은 점을 발견하는 시간에 무관심했던 것의 결과이지 않을까. 이런 시기에 영화에 관해 글을 쓴다는 건 허무와 절망, 그리고 미래를 위한 사명감까지 느끼는 일이 된다.


하나의 연재를 끝내고 남은 건 뿌듯함이 아닌 다량의 과제다. 부산물처럼 남아 버린 이 과제를 보며 글쓰기를 고민한다. 물론, 이런 물음이 없이도 지금처럼 뭔가를 써 내려갈 수는 있을 것이다. '짬밥'이라는 게 무서운 건, 어떤 내용이든 일단 쓰고, 분량을 채울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기계적인 과정이 반복되면, 글 역시 공산품처럼 특색이 없고, 큰 의미가 없게 될까 두렵다. 운 좋게 다음 연재를 기대할 수 있다면, 이런 고민을 푸는 또 다른 글을 시도하고 있을 것 같다. 물론, 글을 읽을 이들의 수요와 그들에게 가치가 된다는 확신이 있다면 말이다.


단 한 문장이라도 [그와 영화의 시간]의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전한다. 부족한 글이라 죄송했고, 소중한 시간을 이 문장을 읽는 데 써주신 점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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