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82 지옥
연상호 감독은 지옥도를 그리는 데 늘 관심이 많았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두 무대에 관계없이 현실의 붕괴와 아수라장 속에서 소리치는 인간의 모습을 꾸준히 담아왔다. 자신이 아는 모든 공간으로 지옥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망을 가진 것처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카메라로 찍었다. 그렇다면 연상호 감독이 만들어 온 지옥의 뼈대는 무엇일까.
연상호 감독의 작품에선 '무언가'를 향한 공포가 집단의 혼란을 야기하고, 그 속에서 인물들은 공포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 인간성을 잃어간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다양한 부류로 갈라지고, 나중엔 서열도 나뉜다. 힘 없이 사냥당하는 이들, 타인을 밟으면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이들, 그 밟히는 자들을 외면하며 악의 고리에 기여하는 이들. 그리고 이 혼란을 통제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권력을 획득하는 이들까지 다양하게 변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연상호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새로 등장한 권력을 중심으로 재조직되고, 거기서 안정을 추구하려 한다. 이때, 권력의 획득 과정보다 흥미로운 건 그 힘이 유지되는 방법이다. 새로운 권력자에게 순응하는 이들은 미지의 공포보다는 통제된 상황 속에서 예상할 수 있는 공포를 원하는 듯 행동한다. 예측 가능한 곳에 공포를 배치하고, 이런 상황을 유지하려다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행위에 쉽게 순응한다. 이들 중 몇몇은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에게 행해지는 강압적인 폭력에 동조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회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몫을 찾는다. <돼지의 왕>, <사이비>, <부산행>, <반도>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던 양상이다.
<지옥>에 깔린 공포는 천사의 '고지'와 사자의 '시연'으로부터 온다. 죽음 앞에선 인간의 원초적 공포와 절망의 전시. 그런데 연상호 감독은 고지를 받는 당사자가 아닌, 시연을 목격하는 타자에게 더 집중했다. 그들이 이 초월적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여주는 데 더 공을 들였다. 드라마 속 사회는 공포를 해결할 답을 '새진리회'에서 찾는다. <지옥> 속 소시민들은 이 정체불명의 공포와 혼란을 야기한 현상이 설명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위해 새진리회를 사회의 버팀목으로 받아들인다. 이 집단은 미지의 공포, 그러니까 천사의 고지를 선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권력을 획득했다. 동시에 이 근거를 부정하려는 시도는 묵살하거나, 다른 죄를 씌워 탄압하며 방어한다.
이밖에도 새진리회는 미디어를 이용해 그들의 시스템을 강화한다.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고, 사자의 시연이란 참혹한 행위를 일반 대중이 열광할 수 있는 쇼나 스포츠처럼 가공해 중계한다. 시연을 담은 방송의 시청률이 80%가 넘는다는 건, 이 사회의 대다수가 이를 목격하고 있음을 뜻한다. 더불어 새진리회의 통제 아래에선 재난과 폭력이 하나의 스펙터클로서 소비되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새진리회는 천사의 고지와 사자의 시연에서 오는 공포와 카타르시스 덕에 유지되고 점점 더 강해진다. 이 쇼에 동참하지 않거나, 교리에 어긋났다고 낙인찍힌 죄인들은 새진리회의 안식과 번영을 위해 언제든 소비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인간의 광기와 군중 심리가 만연한 사회가 받아들인 '비정상의 정상화'. 이것이 연상호 감독이 말하는 지옥이다.
새진리회가 권력을 획득한 방식만큼, 이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도 흥미롭다. 사자는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지만, 누구도 그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시각적 스펙터클과 죽음의 정시성을 제외하면, 원인을 찾을 수 없기에 돌연사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사회를 생각해보자. 뉴스에서 전달되는 타인의 돌연사에 우리는 규칙성을 찾지 않는다. 마약, 누군가 그 원인을 일반화해 말한다고 해도 그걸 받아들일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새진리회는 권력 획득을 위해 원인 없는 죽음에 인과관계를 만들고, 죄인과 그들을 구분 짓는 데 성공한다.
새진리회의 권력이 실행한 '죄인으로의 명명'은 미셸 푸코의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가 질병으로 인지되는 과정과 유사해 흥미롭다. 권력이 규정하는 순간부터 질병이 되고 죄가 되는 기이한 현상. 결국, 현상을 규정하고 해석을 독점할 권리를 얻는다는 게 권력의 힘이자 무서움이다. 이밖에도 <지옥>에서는 미셸 푸코의 흔적을 더 찾을 수 있는데, 이번에 언급할 저서는 『감시와 처벌』이다. 이 저서에서는 구성원들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힘의 영향으로 스스로 규율을 따르게 되는 걸 설명했다.
시연의 중계가 공개 처형을 연상하는 고전적인 통제 방법이었다면, 화살촉이 개인의 정보와 신상을 공개하는 처형 방식은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한 감시 사회를 연상하게 한다. 누군가가 나의 삶을 언제든 볼 수 있고, 타인에게 공개될 수 있다는 공포. 고지를 받은 인물들 중엔 가족에게 피해자 프레임을 씌우는 걸 자신의 죽음보다 두려워한 이들도 있지 않았던가. 자신의 죽음을 검열할 정도로 공포를 주는 사회. 이렇게 <지옥>엔 집단의 권력 획득과 행사, 그리고 이것이 유지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비춘다.
<지옥>이 연상호 감독의 세계관과 가장 이질적인 부분은 제목이다. 그는 앞선 작품들에서 사회의 망가진 단면들 곳곳을 비추며 분노하고, 한국을 지옥에 비유하는 화법을 써왔다. 누가 봐도 지옥이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지옥을 직접 언급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새로운 시즌, 우리가 목격하게 될 건 인간계 밖의 악마의 쉼터일까. 아니면 연상호 감독이 체험한 지옥 같은 우리 사회의 일각일까.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그라면 후자를 준비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