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잡썰 Ep03. 하위팀 팬이 야구를 볼 이유를 만들어야 할 때
프로 스포츠는 잔인하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도 중요하나, 태생적으로 승부의 결과가 더 주목받는다. 2등도 잘했다고 하지만 승자가 모든 영광을 갖는다. 그래서 스포츠팀의 목표는 우승이고, 우승만이 그 팀의 존재 이유다. '에이, 우리 팀 우승 못해요'라는 말이 결코 '우리 팀, 우승하기 싫어요'라는 의미가 아니다. 언젠가 우승할 거라 확신하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니 오해하지 말자.
시즌 후반엔 순위 경쟁이 치열하다. 중위권 팀들까지 가을 야구에 가기 위해 매 경기 전력을 다한다. 그렇다면 이때 가을 야구에 갈 가능성이 희박한 팀들의 상황은 어떨까. 무엇을 위해 야구를 할까. 젊은 선수들의 성장? 내년 구상을 위한 테스트? 선수의 개인 기록? 이것도 아니면 프로 야구의 흥행을 위해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 프로들이기에 이 시기에도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팬들에게 이런 게 야구를 즐길 충분한 이유가 되어줄지는 의문이다. 이겨도 성적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상황에서 팬들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응원할 수 있을까.
21년 후반기 롯데와 기아는 가을 야구 진출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산술적으로 가능하지만(그러니까 남은 경기를 모두 이긴다는 경우의 수) 그쯤되면 팬들은 안다. 이미 시즌이 끝났다는 걸. 그런 상황에서도 야구잡썰 녹화를 위해 자이언츠의 경기를 보기는 해야 했다. 승패가 갈린 시즌에 이입하기 힘들었고, 자이언츠의 야구를 집중해서 볼 새로운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우리만의 가을야구, 롯데와 기아의 멸망전이다.
그들만의 게임 같지만, 두 팀 팬에겐 많은 의미가 있었다. '그래도 너네는...' 상대에게 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선 느낌. 이 경기를 더 열렬히 응원하기 위해 벌칙도 걸었고, 덕분에 한국 시리즈를 보듯 마음 졸이며 관전했다. 결과는 아찔한 패배였고, 자이언츠는 끝까지 내게 괴로움을 선물했다. 그래도 그때 '아, 이게 야구 보는 재미였지'라는 걸 느껴 즐거웠다. 이렇게라도 야구를 즐길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데? 때로는 팬이 야구를 보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물론, 팬 말고 선수가 찾아주는 게 더 정상이지만.
올해 롯데와 기아의 관계는 '반사이익론'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서로가 잘해야만 반사이익을 통해 가을 야구에 갈 수 있다'라는 이 이론이 탄생하기까지 많은 사연이 었었다. 시즌 개막 직전, 새로운 마음으로 자이언츠를 믿고 응원하겠다 다짐하면서 팀의 전력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팀은 올해 한국 야구 트렌드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 팀인가. 어디서 우승의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놀라울 정도로 전문가들의 시즌 예상과 롯데의 계획은 맞는 게 없었다. 대표적으로 올해 롯데는 내야보다 외야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최고의 외국인 유격수를 보냈고, 그 자리를 수비 잘하고 장타력 좋은 외국인 외야수로 채웠다. 그리고 외야 담장을 뒤로 밀며 외야 수비 범위를 확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올해가 땅볼과 내야 수비가 더 중요한 시즌이 될거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많은 야구인이 참여한 투표에서 롯데가 가을 야구를 갈 것이라고 표를 던진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내부에서 젊은 선수들의 포텐이란 변수를 기대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난 어떤 근거를 가지고 롯데의 가을 야구를 확신해야 하는가. 그때 옆 동네 기아에서는 대형 FA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이번 FA 시장 최고의 타자 영입과 메이저리그에 갔던 좌완 에이스의 컴백. 부러웠다. 가을을 꿈꿀 수 있다는 게. 그때, 작년에 언급한 적 있던 데이터가 문득 떠올랐다. 지난 10년간 롯데와 기아의 순위가 세 계단 밖으로 멀어진 시즌이 없다는 것. 이거다! 네, 전 올해 이 데이터를 믿어보기로 했어요.
이 데이터에 따르면 기아의 성적 상승은 롯데의 상승이기도 했다. 기아가 공격적인 투자로 전력이 상승한다면, 롯데도 따라 올라가야만 한다. 수년간 이런 모습을 일관적으로 보여줬으니, 이제는 예상 가능한 하나의 법칙으로 인정받을만하다. 기아가 FA 시장에 200억 이상 투자했으니, 롯데도 50억 정도는 반사이익이 있을 수 있을 거란 예상도 가능했다. 때론 그 시대의 일반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기에 인과관계가 불명확해 보이는 가설과 데이터가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인정을 못 받지 않았던가.
당연히 농담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라도 내 팀이 잘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기대라는 걸 하면서 즐겁게 야구를 볼 수 있다. 이게 팬이라는 존재가 매 시즌 되풀이 하고 있는 일이다. 올해 롯데와 기아는 좋은 성적으로 이 반사이익론을 증명해줘야만 한다. 그래서 기아의 승리도 최선을 다해 바라는 중이다. 단, 이 멸망전만은 예외다.
작년 멸망전은 유튜브를 통해 수백 명의 야구팬과 함께 관전했다. 이 멸망전이라는 단어가 야구잡썰의 연관 검색어가 될 정도로 많은 야구팬이 관심을 가졌던 경기다. (나름 인정받는 글로벌 하고 싶은 콘텐츠다) 그런 탓에 올해 첫 번째 멸망전 예고를 하고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경기에 야구팬을 즐겁게 해 줄 재미있는 순간이 없으면 어쩌지.
경기 시작 후 얼마나 지났을까. 세상에서 걱정하는 일 중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던 명언이 떠올랐다. 정말 무용한 걱정이었다. 송구 에러는 늘 있는 일이기에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타이거즈의 외야수는 펜스에 맞은 공을 멀뚱히 관전하는 기행을 보였고, 자이언츠는 외야수들은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바라보다 결국엔 그들 사이에 안착시키는 '멸망전판 모세의 기적'을 보여줬다. 이게 외야 수비 강화를 위해 데려 온 외국인 선수와 우리 팀 주장의 합작품이었다는 게 더충격적이었다.
이럴 때마다 생각한다. 지는 것까지는 이해하려고 하는데(아직은 힘들다), 제발 곱게 지라고. 공을 던지고 치고, 잡는 멀쩡한 야구를 하라고! 그래도 다행인 건 이번 멸망전은 자이언츠가 이겼다는 거다. 온갖 욕을 하게 되더라도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 멸망전 패배는 몇 배의 대미지가 있다. 그러니 이기는 멍청이가 지는 천재보다 낫다. 자이언츠는 이날 이긴 멍청이였다.
이번 주 롯데는 지난주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연패와 연승을 모두 경험했다. 내가 아는 이 팀은 연승을 할 때가 더 불안하다. 연승 후엔 그 이상의 연패를 당하고야 마니까. 연패를 쉽게 끊을 줄 알아야 강팀이다. 이번 시즌 고무적인 건, 아직은 장기 연패에 빠진 적이 없다는 거다.(이제 겨우 13경기를 했지만...) 한동희는 차기 4번이 자신뿐이라는 걸 홈런으로 증명했고, 4일 휴식 후 등판 중인 반즈는 일요일에 8.2이닝을 던지며 선발진의 중심을 잡아줬다. 구승민, 김유영, 최준영으로 이어지는 불펜진 역시 굳건했다. 김원중이 돌아온다면 경기 후반은 더 편안히 볼 수 있을 것이다.
5할 승률인 팀은 한 경기 웃으면 한 경기 화를 내야 한다. 올해 롯데의 상황이 그렇다. 그런데 자이언츠의 지는 날 경기력은 눈 뜨고 봐주기 힘들다. 송구 에러, 주루사, 견제사, 포수의 펀칭, 의문의 낙구 등 프로의 플레이가 아니다. 이기는 날과 지는 날의 집중력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외야 수비와 장타력을 보강하기 위해 데려온 피터스는 공을 잡는 것도, 치는 것도 다 제대로 못하고 있다. 현재 삼진이 19개(시즌 210개 페이스)로 리그에서 피터스보다 삼진이 많은 선수는 타자가 아닌 투수 중에 있다. 어쩌면 피터스는 투수여야만 했다. 내야도 난리다. 최근 복귀한 이학주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호수비와 실책을 양산 중이다. 역시, 집중력 탓이다. 이런 상황을 정의하자면 이렇다. '올해 롯데는 완벽하다. 지는 날만 빼면'
가장 암울한 건 구단의 방향성과 현재 선수들의 지표가 따로 논다는 데 있다. 외야 수비의 보강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한 시즌이었지만, 현재까지 자이언츠의 외야수 중 WAR(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 지표가 양수인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모든 선수의 WAR을 합쳐도 팀을 떠난 손아섭의 0.25를 넘기지 못한다. 아니, 선수들의 WAR을 더할 수록 그 간극이 더 멀어지는 기이한 상황이다.
자료 출처: 롯데 자이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