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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May 28. 2022

[오마주] 잠들어 있던 필름이 깨운 세 명의 감독

Appetizer#176 오마주

세 번째 작품까지 만들었지만, 흥행엔 실패한 감독 지완(이정은).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던 그녀는 한국 1세대 여성 감독인 '홍재원'의 <여판사> 복원 작업을 맡게 된다. 이 복원 작업 중 지완은 영화를 만드는 여성과 자신의 위치에 관해 생각하게 되는데...

오마주: 존경의 의미로 작품의 특정 장면 등을 인용하는 것. 신수원 감독의 신작은 제목부터 영화의 의도와 목적이 명확히 드러난다. <오마주>는 한국 1세대 여성 감독의 발자취를 쫓던 신수원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투영된 작품이다. 감독은 사라진 과거의 기록을 찾는 여정에서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봤고, 여기서 세대를 뛰어 넘어 연대하는 순간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대상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대상1. <여판사> 홍은원 감독

<오마주>는 과거의 필름을 복원하는 이야기다. 영화의 중심에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1962)가 자리 잡고 있는 액자식 구성을 취했다.(세상을 떠난 홍은원 감독의 허락을 구하지 못한 탓에, 신수원 감독은 '홍재원'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 영화는 한국 첫 번째 여성 판사의 죽음이라는 실화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당대 여성의 사회 진출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인데, 영화는 그런 시대의 시선에 당당히 맞서는 진취적인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당시 20만 관객을 동원할 정도로 화제작이었지만 최근까지 그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여판사>의 필름은 유실된 상태였다가 최근에야 발견되고, 지금의 관객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영화사적 의미가 있음에도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던 영화. 이 작품과 홍은원 감독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지금도 여성 영화인의 비율이 적지만, 1960년대의 상황은 훨씬 더 고독했다. 가부장제의 시스템이 당연했던 시절이기에 여성의 사회 활동은 드물었다. 때문에 한 편의 영화와 현장을 책임지는 감독이란 직위를 여성이 맡기는 쉽지 않았을 분위기란 걸 예상해볼 수 있다. <오마주> 속 지완이 <여판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엔 홍은원 감독이 당대 시스템 속에 홀로 고민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 반기지 않았지만, 영화를 사랑했고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던 감독. 그녀의 첫걸음 덕에 지완과 지금의 여성 영화인도 있을 수 있다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오마주>에서 만날 수 있다.


대상2. '마블'의 시대 속 영화 감독

<오마주>는 영화감독 지완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 가며 그녀의 고민을 공유한다. 지완은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하지만 대중에게도 선택을 받아야 하는 감독의 삶을 살고 있다. 개인의 개성과 대중성이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도 영화라는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은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흥행하지 못한 영화를 만들었기에 다음 작품의 제작이 가능할지 확신하지 못하는 에술인. 불안정한 상황 탓에 동료 영화인을 채기기 힘든 리더. 집에서는 엄마와 아내의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 여성. 마블 영화 속 슈퍼 히어로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녀는 마블 같지 않은 영화를 만들었고, 주변인들에게 마블 영화 속 슈퍼 히어로 같은 존재도 되어 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다.


엄마가 아닌 아빠로서의 역할을 고민한다는 게 조금 다를 뿐, 남녀에 상관없이 많은 영화인이 지완의 고민에 공감할 것이다. 세상엔 저마다의 개성으로 영화계를 지탱하는 많은 감독과 영화인이 있다. 이들은 꿈과 생계를 위해 영화 안팎으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야만 한다. 주목받지 못하기에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지완처럼 그 어떤 것 하나도 제 몫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죄책감을 가질 수도 있다. 이들의 영화가 <어벤져스>와 같은 영화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하고 슬프다. 그럼에도 영화라는 꿈을 간직한 존재들은 오늘도 고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마주>는 이런 영화인들을 조명하고 위로한다. 그렇게 함께 버티고 있음에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대상3. 필름, 기록의 매체

<오마주>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고, 극 중 두 감독(지완과 홍은원)과 영화 밖 신수원 감독을 잇는 건 흑백 필름이다. 유구한 시간 석에서 홀로 한 여성 감독의 기록을 간직해온 필름. 이 구시대의 유물은 시대가 거부했던 이야기를 기록했고 지금까지 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과거 홍은원 감독의 꿈을 지금의 지완과 신수원 감독에게 닿을 수 있게 하는 매개체 역할도 해낸다. 홍은원 감독이란 영사기가 쏜 빛이 필름을 통과해 지완과 신수원 감독이란 스크린에 상영된다. 그러면서 <오마주>는 이 필름과 함께했던 이들까지 소환해 껴안는다.


동시에 이 영화는 과거의 영화관과 영사실에 카메라를 가져가 먼지 쌓인 그 공간의 냄새를 음미하기도 한다. 낡았음에도 여전히 빛을 쏘는 영사기와 여전히 누군가를 초대하는 영화관. 그리고 그곳을 채우고 있는 오래된 사람들과 갈 곳 없는 길 고양이들. 이들이 영화관을 이용하는 목적은 제 각각이다. 중요한 건 이 공간이 누구든 포용할 수 있는 꿈의 공간으로서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와 영화관의 포용력을 보여주는 따뜻한 지점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필름과 영화관을 향한 감사의 마음과 사랑까지 전했다.

<오마주>가 흑백 필름을 스크린에 상영한 서사는 죠르주 멜리에스의 필름을 재소환한 <휴고>와 닮았고, 오래된 영화관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부분에선 <시네마 천국>과 닿아 있는 듯했다. 그리고 신수원 감독은 <오마주>를 다양한 의미에서 3D 영화라 말했다. 동의한다. 중경에 있는 <여판사>를 기준으로 지완과 신수원 감독의 서사가 근/원경을 오가며 이야기를 두껍고 입체적으로 만들고 있는 작품이다. 덕분에 모처럼 두꺼운 필름의 질감과 영화관의 안식을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P.S 아래의 링크를 통해 <오마주>를 만든 신수원 감독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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