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84 비상선언
종종 제목을 따라가는 영화가 있다. <비상선언>도 그랬다. 스크린 안팎으로 기이한 비상벨을 울린 영화. 극도로 갈린 호불호는 중요한 게 아니다. 수많은 스타 배우 그 어떤 배우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더불어 영화 외적으론 홍보에 관한 이슈까지 터지며 난리가 났다. 물론, 이런 행보가 온갖 것들의 오작동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반가운 면은 있다. 바이러스 국면이라는 긴 터널을 뚫고 영화계가 다시 움직이고는 있다는 건 보여줬으니까. 오작동이 문제라면 수리만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비상선언>은 어딘가 불안하고 불편했다. 영화의 만듦새에 관한 평가나 감상 탓이 아니다. 뭔가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이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극 영화 내에서 허구와 어떤 현실이 교차하고, 나중엔 서로를 보완/대체하는 지점에서 <비상선언>은 분명 특이한 지점이 있었다.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확연히 나뉜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을 비교할 때 앞서 느꼈던 기이함과 두려움이 더 잘 보였다. 이 영화가 조립된 방법을 좀 더 고민해보자. <비상선언>은 공간으로 봤을 때 비행기 안과 밖으로 이야기가 분리된다. 비행기 안에서는 생화학 테러가 진행되고, 밖에서는 비행기 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는 과정을 비춘다.
이를 인물이라는 측면에서 더 세밀하게 보자면, 재혁(이병헌)은 비행기 안에서 딸과 승객의 안전을 위해 테러범 진석(임시완)과 싸운다. 인호(송강호)는 지상에서 진석의 흔적과 바이러스의 백신을 찾으려 한다. 끝으로 숙희(전도연)는 공무원으로서 재난 상황 앞에서 승객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집단과 부딪힌다. 이들은 각각 하나의 장르를 대표하고 있다. 재혁은 범죄 영화, 인호는 수사 및 추리 영화, 숙희는 재난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 <비상선언>은 이 세 가지 장르를 교차하며 속도감을 얻고, 다양한 긴장감을 추구하려 했고, 분명 그럴 수 있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한재림 감독은 이런 데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비상선언>의 전반부는 오랜 시간 비행기 안에서 카메라가 머문다. 진석과 재혁의 갈등이 고조되고,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목숨을 잃는 피해자가 늘어나는 범죄 스릴러가 영화를 장악한다. 이때 테러범 진석은 주도면밀한 방법으로 바이러스를 운반하고, 확산시키는 소시오패스의 광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동시에 지상에선 진석의 과거를 파헤치는 수사/추리극이 전개되며 카메라가 단조로운 비행기 내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데도 성공한다. 강렬한 이미지로 형성된 빌런과 비행기 안팎을 오가는 교차편집으로 극에 속도감도 붙어 긴장감도 높다. 이 전반부까지는 인물들의 동기가 잘 보였고, 다음을 궁금하게 하는 이야기로서도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의 관객은 스크린 밖에서도 바이러스와 싸우는 중이기에 이 범죄의 양상에 더 몰입하게 되는 측면도 있었다.
이렇게 순항하던 <비상선언>은 진석이 제거된 이후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처럼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장 강력한 동기와 광기를 가졌던 테러범의 퇴장 이후 <비상선언>은 국가 시스템이 작동(혹은 오작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감염된 피해자들이 탑승한 비행기를 착륙시키려는 자와 막으려는 장애물들의 대립. 이 시점부터 빌런 역할을 하던 진석의 안타고니스트 자리는 착륙을 허락하지 않는 국가 및 집단이 물려받는다.
국가 시스템의 허점을 꿰뚫는 이런 구도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구도가 새롭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다수의 안전과 소수의 권리 간의 대립. 불운한 재난 앞에 놓인 국민과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 시스템. <부산행>, <감기>, <연가시> 등 한국 재난 영화에서 유독 자주 반복되기도 했다. 영화의 소재로서 그만큼 식상하지만, 또 안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사회안전망의 허상 및 붕괴를 비추는 건 새롭지 않아도 납득할 수 있고, 그 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도 가지고 있다. 실제 국가가 가지고 있을 딜레마일 테니까. 그런데 한재림 감독은 조금 특이한 수를 뒀고, 이게 일정 부분 극 영화라는 범주를 이탈하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후반부가 진행될수록 <비상선언>은 스스로가 만든 허구의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건의 이미지와 교차하더니, 나중엔 그 실제 사건이 허구를 대체하려는 듯한 순간까지 도달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탈출할 수 없는 승객과 무용한 국가 시스템, 그들의 귀환을 바라는 가족. 남겨질 가족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비상선언> 속 대사와 이미지는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굵직한 재난(국내외에 있었던 비행기, 지하철, 배 등 굵직한 사건 사고)을 꽤 직설적으로 환기한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국민/인류적인 상처로 작동하고 있는 사건을 이 영화가 소환하려 했다.
이 순간부터 영화는 인물, 이미지, 이야기가 아닌 곳에서 동력을 얻는다. 우리가 경험했던 실제 사건의 잔혹함, 충격과 슬픔 등에서 감정적 동력을 가져와 전개한다(영화 속 비행기의 연료가 떨어지는 시점은 이야기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시점이라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한재림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중심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때문에 <비상선언>의 이야기는 멈추며 현실에서 봤던 이미지들을 전시하고, 그때 오작동했던 사회 시스템의 단면도 가져와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 흥미로운 갈등을 만들어줄 인물과 사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채 우리가 봤던 무언가가 부유하는 비행기.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의 스타 배우의 존재감이 없는 건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이렇게 <비상선언> 후반부는 극으로서의 힘을 잃고, 현실 속 충격과 공포의 스펙터클을 끌어와 나열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추락했다.
<비상선언>의 후반부가 극 영화로서의 목적과 재미를 잃었다는 건 아쉽다. 이 영화는 특정한 메시지 외에는 모든 요소를 배경으로 밀어내고, 끝내 극적 재미도 휘발시킨 영화다. 다소 올드한 만듦새를 가진 좋지 못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극영화들도 종종 발견되는 일상적인 문제다. 영화가 택한 현실의 극단적인 환기와 전시도 <비상선언>만 시도했던 것이 아니다. 극적 창의성이란 면에선 분명 아쉬울 수 있지만, 무능력한 사회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해 가장 강력한 소스(현실의 사건, 이미지)를 가져온 걸 나쁘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어딘가 이 영화에만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건 왜 일까. 그건 현실을 환기한 <비상선언>이 이 이미지를 배치하고 편집,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이 교묘한 알고리즘 탓에 불안함에 빠져나오기 힘들었다. 여기서부터 나만의 망상을 풀어놓을까 한다.
<비상선언>엔 무능한 관료주의를 넘어, 특정 정당과 정치인이 노골적으로 연상되는 지점이 있다. 재난 상황에 긴급히 소집된 국가 관료들 사이에서 끝내 보이지 않는 대통령, 그러면서도 중요한 결정을 전화로 전달하고 이를 받드는 제왕적 대통령제 조직, 소수의 권리를 무시하고자 조직된 시위대 등은 특정한 정당/정치인/정권 등을 연상하게 한다. 그렇게 <비상선언>은 현실 속 존재들이 여태 보여준(혹은 한재림 감독이 목격한) 행적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구도를 취한다. 앞의 극적 구성과 재미가 무너졌기에 결과적으로 한재림 감독은 극의 구성과 재미보다도 이 비판의 메시지가 훨씬 앞에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비상선언>의 끝엔 허구의 이야기와 현실의 흔적이 혼재된 채, 무언가를 향한 짜증과 분노만 남아있었다.
누군가 말하는 정치적 메시지에 관한 생각과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장 뤽 고다르의 말처럼 '모든 영화는 정치적'일 수 있다. 현실을 모방하며 정치성을 띄지 않는다는 게 불가능하기에 <비상선언>이 정치적인 메시지가 강한 영화라고 투덜거리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한재림 감독이 비판하고자 한 현실과 대상을 옹호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비상선언>이 활용한 몽타주 기법(편집 기법)이 은연 중 무엇을 우리에게 새길 수 있는지, 그 파괴력에 관해 고민해보고 싶었다(굳이 '몽타주'라는 단어를 가져 온 이유도 곧 말하겠다). 거기서 교묘한 알고리즘의 작동을 본 듯했고, 무서웠다.
그렇다면 정치적 메시지를 띈 다른 작품들과 <비상선언>은 어떤 부분이 닮고, 또 달랐을까. 이 영화는 현실을 질료로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었고, 실화에 기반해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한 극영화도 아니었다. 그리고 허구의 사건으로 정치적 풍자의 메시지를 담는 극영화와도 나중엔 작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정리하자면 <비상선언>은 허구의 이야기와 캐릭터가 나중엔 실제 사건과 인물로 대체된 뒤 강한 정치성을 가진 메시지만 남는 영화였다. 허구의 이야기(진석의 테러)와 캐릭터가 등장하는 척 출발해, 영화의 중반 즈음엔 교묘하게 대상이 바뀌고 현실 속 인물에 게 쓴소리를 던지는 이야기. 그렇게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재난을 특정 시기의 정권 및 정치인만의 과오로 전가하는 알고리즘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비상선언>은 스크린 밖 특정 대상들에게 대한 비판 의식, 혹은 혐오를 더 강화하는 듯했다.
이런 메시지의 정당성 여부는 이 글에서 따질 것이 아니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극 영화 안에서 허구와 현실이 교차하고, 언젠가부터는 허구가 현실을 대체하면서 감독의 메시지가 보강되는 과정이 교묘하게 진행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싶었다. 한재림 감독은 다양한 인물과 이미지를 교차 편집하면서 그의 메시지를 담는 목적을 달성해낸다. 이처럼 영화를 보는 것 만으로 무의식 중에 특정 대상을 향한 혐오나 분노가 보강될 수 있다는 건 소름 돋는 일이 아닐까. 누군가(감독 등)가 의도한 대로 말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 소련에서 이데올로기 등을 보강하는 정치성 짙은 영화를 만들던 시기와 그때 주목받았던 몽타주 기법을 떠올리게 했기에 굳이 '몽타주'라는 단어도 가져와봤다.
이런 불편한 사유를 통해 <비상선언>이 '정치의 예술화'를 위해 극 영화를 감독의 확성기로 사용했던 작품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리고 이 영화를 향한 어떤 불안함과 불편함은 한재림 감독이 겨눈 대상에 관한 것 너머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작품은 감독의 관념을 보강하고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영화 같다. 더 정확히는 그가 불쾌함을 느낀 대상을 비판하는 역 프로파간다 영화다. 영화라는 게 이런 메시지만을 위해 소모되는 게 싫었고, 이런 알고리즘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다. 물론 나만의 망상일 수 있고, 한재림 감독은 전혀 동의하지 않을 가설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내게 <비상선언>은 호불호의 영역을 넘어선, 위험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