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85 놉
'놉(Nope)'은 '아니'라는 뜻을 가진 부정어다. 그러기에 <놉>이 무엇에 저항하는지 생각하면 '조던 필' 감독의 의도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해외 매체에서 'NOPE'을 약어로 풀이한 관객의 이야기가 있었지만, 조던 필은 이를 부정했다고 한다. 덕분에 이 영화가 무엇에 반대하는 것인지 더 궁금해졌다. <NOPE>은 복합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기호가 다수 등장하기에 다양한 분석과 비평이 시도되고 있다. 어디서 개인적인 사유를 시작할까 고민하다 이 영화 안에서 유독 잘 보이는 '코드'에 집중하려 했다. '본다'는 것과 '영화관'에 관한 기호가 잘 보였던 영화 <놉>. '머이브리지'를 전면에 내세우며 영화의 역사를 소환한 조던 필은 영화의 탄생과 존재 의미에 관한 고민을 유도하고 있었다.
<놉>은 시작부터 기이한 존재가 스크린을 장악한다. 미확인 물체 혹은, 운동 현상으로 등장해 시선을 사로잡은 이 존재는 나중에 '진 재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끝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말해지지 않는다. 비행물체 같은 형체에서 은막의 천으로 변신하는 외형을 가졌고, 내부엔 무엇인가를 비추는 화면이 있는 이 녀석에게 영화 속 많은 인물은 매혹당한다. 주인공 OJ가 영화의 프로타고니스트라면 이 진 재킷은 안타고니스트다(물론, 이를 반대로 생각하는 비평도 가능할 것이다). 이 진 재킷으로부터의 저항이 영화의 주요 플롯이기에, 이게 무엇인지 고민하는 건 꽤 중요해 보였다.
몇 가지 장면을 가져와 보자. 진 재킷이 등장할 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우선, 진 재킷이 등장하면 전자기기가 마비된다. <놉>은 이를 불이 꺼지고, 핸드폰이 먹통이 되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존재가 가까이 왔을 때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다. 이 비명은 중의적인데 놀라서 지르는 소리 같다가도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 재킷의 내부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작은 화면과 함께 확인할 수 있는 건 좁은 통로다. 이곳에 들어온 물체와 인간은 천으로 둘러싸인 좁은 통로를 통해 위로 빨려 들어간다. 이런 특징들로 진 재킷의 정체를 유추해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영화관'이란 공간이었다. 불꺼진 암실 속에서 핸드폰은 잠시 기능을 멈추고, 관객의 함성이 공간을 채우는 곳. 그리고 영사기를 통해 필름이 좁은 통로를 통과한 뒤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는 곳. 그러니까 진 재킷은 사람까지도 필름처럼 만들어 버린 지독한 영화관이다.
이 영화관이 토해낸 부산물에 의해 OJ(다니엘 칼루야)의 아버지가 생을 마감했다는 건 흥미로운 설정이다. 할리우드의 역사가 피 속에 흐르는 OJ의 아버지는 진 재킷에게서 떨어져 나온 동전이 눈에 박혀 생을 마감한다. 영화관이 남긴 돈이, 한 영화인의 시각(보는 것, 보려는 의지)을 마비시킨 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건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요소가 있다. 동전을 자본이라 생각한다면 자본이 영화인이자 영화를 죽였다는 것까지도 이어질 수 있을 거다. 실제 자본에 잠식당한 주류 영화 시스템이 비슷한 영화를 재생산하며 영화의 성장을 더디게 하고, 영화의 가능성을 제한했다는 점에서 영화는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영화적 가능성과 기능을 상실한 영화만 상영되는 일이 점점 더 잦아지고 있으니까.
또한 동전과 얽힌 이 죽음에서도 <놉>이 내세운 '머이브리지'처럼 영화의 역사를 소환할 만한 지점이 있다. 초창기 무한한 가능성을 가졌던 영화는 점차 산업화되면서 규격화된 상품이 되었다. 1920년대엔 니켈로디언으로 불렸던 영화관이 등장했고, 그때부터 대중은 '동전' 하나만 내면 볼거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영화 대중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1950년대 영화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면서 영화는 주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영향 아래 형식과 소재가 정형화된 대중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스타 배우, 장르 규칙,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는 소재와 주제가 정립되던 시기다. 반대로 말하면 가능성이 점차 제한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NOPE>은 동전이 한 영화인의 시각을 소멸시키는 그 장면을 통해 영화의 산업화/대중화 과정을 소환하고 있었다. 이 연장선에서 생각하면 OJ는 아버지를 통해 영화의 죽음(대중화)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자이자, 영화계의 혈통으로서 살아남은 인물이 된다.
영화의 죽음을 보고서도 OJ는 여전히 보는 것에 미쳐있다. 동시에 그의 주변엔 볼 것에 미쳐있는 자들이 모인다. 재밌는 건 이들이 본다는 행위에 매혹된 것은 맞지만,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는 데 있다. 먼저 주프(스티븐 연)는 어릴적 '고디'라는 고릴라의 난동으로 피를 목격하며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이 끔찍한 경험 탓에 트라우마를 가질 법도 하지만, 성장한 주프는 폭력이 주는 쾌감에 홀린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진 재킷의 폭력적인 면을 통제하고 볼거리로 가공하려 했다. 주프는 시각적 폭력성과 자극에 빠져 있는 인간이었다.
엔젤(브래든 페레아)은 타인을 훔쳐보는 걸 좋아한다.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그는 카메라 설치 후 동의 없이 OJ 남매를 훔쳐보는 모습을 보인다. 엔젤은 관음적인 욕망에 미친 인간이었다. 끝으로 카메라 감독 앤틀러스 홀스트(마이클 윈콧)은 특별한 순간을 기록해 남기려는 장인이다. 더 명확히는 쉽게 볼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의 기록에 미쳐있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기이한 존재인 진 재킷을 담으려 한다. 필름에 이미지를 남기고자 하는 그의 모습은 기록자로서의 숭고함까지 엿볼 수 있으며, 여기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사명감까지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OJ는 본다는 것의 어떤 속성에 미쳐있었을까. 그는 진 재킷을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보여주려 한다. 오프라 윈프리 쇼를 계속 언급하는 그는 볼거리를 카메라에 담아 세상에 상영하고, 돈을 벌고 싶어 한다. 즉, OJ가 추구하는 건 새롭고 재미있는 볼거리의 촬영과 상영이었다. 이렇게 <놉>은 본다는 것을 다양한 층으로 나누고, 보여주며 생각해보게 한다. 본다는 행위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의 의미가 있는지를. 그러면서 <놉>은 하나의 가치에 손을 들어주는 모습도 보인다. 이 영화에서 OJ 남매만이 무언가를 성취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진 재킷을 필름에 담는 것에 성공하며 목표를 달성했고, 승자로서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들의 승리는 영화가 선택한 본다는 것의 가치이며, 영화 제작사로서 조던 필의 자세를 보여주는 데 까지 나아갈 수 있다.
OJ가 조던 필 감독의 페르소나로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던 필은 할리우드 시스템이 정착한 시대에 영화를 보고 자랐다. 앞서 말했듯 이 시스템은 점차 새로운 형식, 이야기, 인물 등에 무관심했고 영화의 가능성은 점차 축소되어 갔다. 기술 발전에 비해 창의성 면에서의 성장은 정체기였고, 누군가는 영화의 죽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헤게모니를 획득한 문화와 가치관이 반영된 작품이 재생산되는 시대에 흑인이 제작한 영화나 흑인 주인공의 영화는 당당히 설 곳이 없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도 즐겨 봤다는 '블랙 익스플로테이션'으로 묶인 작품들이 있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하위문화로 존재했을 뿐이다.
조던 필은 그런 시대를 통과해 고착화된 영화계에 돌을 던진 감독이다. <겟 아웃>을 시작으로 <어스>와 <놉>까지 그의 작품은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는 게 무척 어렵다. 이야기의 양상과 구조도 기존 상업 영화의 그것을 변형해 균열을 일으키고 독특한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기존 장르의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독특한 무드를 만들며 충격을 줬다. <놉>에서 호러 영화의 클리셰를 가져와 유머러스하게 변주하는 장면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또한 장르뿐만 아니라 흑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흑인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흥미로운 충돌이었다. 젠더 스와프가 그랬듯 다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이 극을 이끌고, 관객이 그 인물에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결은 상당히 바뀌게 된다. 그렇게 조던 필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대중을 홀렸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각본상을 받으며 전문가들에게도 인정받았다. OJ처럼 조던 필도 새로운 볼거리를 찍고, 그걸 세상에 보이는 데 미쳐있는 인간이다. 이 점이 OJ와 닮았고, OJ가 조던 필의 페르소나로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조던 필의 페르소나 OJ가 돈을 추구하던 인물이란 측면은 앞서 자본이 영화를 죽였다는 것과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OJ도 돈을 추구하는 자고 영화의 존재를 위협하는 존재는 아닐까.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놉>의 창조주 조던 필 감독이 영화의 수익성 자체를 부정하려고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영화라는 예술은 그 시작부터 이윤을 추구하는 대중문화 상품으로 출발했다. 조던 필 역시 영화 제작자이고 대중에게 상영하는 걸 업으로 삼는 자이기에 자신의 존재와 작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을 거다. 다만, 그가 돈과 자본의 시스템이 영화/보는 것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영화로 돈을 벌겠지만, 돈이 영화를 망치는 걸 원하지는 않았을 거다.
조던 필의 새로운 작업 덕분에 우리는 여태 본 적 없던 인물 및 이야기와 분위기가 중심에 있는 영화를 만나고 있다. 한 제작자의 시도가 정체되고 메말라 가던 영화의 창의성을 부활시키고 있는 거다. 조던 필은 그렇게 영화의 가능성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영화의 붕괴에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Nope'은 영화의 죽음을 반대하는 감독의 외침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