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잡썰] Ep20. 그 시작이 끝을 결정하지 않는다

야구잡썰 Ep20. 조금 다른 시작 앞에서

이번 신인 드래프트가 자극적인 이야기로 물들었지만, 원래 이 자리는 많은 아마추어의 땀이 열매를 맺는 자리다. 다양한 모양의 꿈이 이뤄지고, 그걸 보며 뭉클함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말했던 픽이 더 원망스럽다. 그 빛나는 순간이 제대로 조명받을 기회를 빼앗았으니까. 유년기부터 시작해 프로 지명이란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땀 흘렸던 많은 선수와 더 많은 가족의 노력과 희생이 환희로 바뀌는 그 순간이 더 주목받았어야 했다.


물론, 신인 드래프트는 누군가의 노력이 외면당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같이 뛰었던 동료들의 무한한 기쁨 앞에서 마음 편히 축하해줄 수 없는 선수들이 더 많다. 그들은 드래프트 현장을 떠나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진로와 '야구를 더 사랑해도 되는지'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올해는 유독 눈에 들어오는 선수가 있었다. 단정한 정장을 입고서 가장 앞에 앉아 있던 한 선수. 그는 끝내 지명을 받지 못한 채 형형색색의 유니폼을 입은 동료들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이 밖에도 올해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900명이 넘는 선수가 지명을 받지 못했다. 프로의 세계란 이렇게 냉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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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종종 잔인하게 느껴진다. 또, 불공평해 보일 때도 있다. 간절한 마음과 진심이 냉정히 외면당하고, 오랜 시간 쌓은 공든 탑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거지 같은 날도 있다. 신인 드래프트 현장에선 선수들이 야구를 얼마나 좋아했고, 간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증명할 수도 없다(그리고 많은 이가 누구보다 야구에 미쳐있었고, 열심히 했을 거다). 단 하나, 그 순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으로만 평가받을 뿐이다. 여기에 구단별 육성 시스템과 프로세스 등 복잡한 단계를 더 거쳐 지명이 이뤄진다. 이럴 땐 '재능'이라는 영역은 불공평해 보인다. 동시에 자신이 재능 있는 영역을 아는 것도 재능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뽑는 일엔 다양한 변수와 상황이 관여하기에 쉽게 납득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신인 드래프트가 그렇고, 우리 삶에서 겪는 무수히 많은 면접이 그렇다. 그리고 모든 경쟁은 필연적으로 뒤처지는 자를 남긴다.


드래프트에서 뽑힌 선수가 미래에 1군에서 뛸 확률이 높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선택받은 선수가 잘 정리된 길에서 달린다. 반대로 선택받지 못한 선수는 거칠고 험난한 길을 뛰거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드래프트에 뽑힌 모든 선수가 성공한 게 아니고, 선택 받지 못한 모든 선수가 성공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드래프트는 그들의 과거 기록이 정리되는 자리일 뿐 그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출발지를 결정하는 시간이 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종착지는 여전히 백지 상태라는 거다. 늦게 출발할 지라도 어디든 갈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야구장 밖으로 시야를 넓혀 새로운 세상에 도전할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이 노력한 과거의 시간이 빛을 못 봤을 뿐 부정당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그들에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시간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는다.

드래프트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죽을 만큼 열심히 하고 선택받기 위해 기다렸던 순간들이 있다. 대개는 외면당했고, 세상이 끝나는 것만 같은 느낌에 둘러싸여 좁은 방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던 적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옆에 있던 사람들은 더 멀리 나아가고, 내 꿈은 멀어지면서 홀로 그 자리에 남아있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다. 여전히 성숙하지 못한 지금도 그때 결과가 달랐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해보고는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다. 그래도 결국 나라는 사람은 비슷했을 거라고. 그런 과정이 쌓이면서 하나씩 뭔가 이뤄지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하고서도 더 멋진 삶의 궤도에 오르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는 걸 봐왔다. 그렇게 세상은 재밌고 모두에게 다른 모양의 기회를 주는 것도 같다.


그래도 선택받지 못한 직후엔 맘껏 화내고 울어도 좋은 것 같다. 그건 그만큼 노력했고, 야구를 좋아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그래도 잊지 말고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자. 어차피 돌아오게는 되어 있으니까. 예전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종착지는 많고, 누군가는 자신의 자리에서 이미 출발해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보게 될 테니까. 나 역시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길 위에서 방황 중인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런 길 위에서도 특별한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계기가 된 '야구잡썰'이 있었듯. 여전히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으로서 서로를 응원하며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P.S 신인 드래프트에 참여한 분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드래프트에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야구에 진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과거를 잘 마무리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다시 뛸 수 있기를. 드래프트 이후에도 여전히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야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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