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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Dec 30. 2022

[영웅] 듣는 매력은 있었던 스펙터클한 복제품

Appetizer#180 영웅

객석에 앉기 전부터 비장함을 갖게 하는 작품이 있다. <영웅>이 그랬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위인의 삶을 담은 영화. 도마 안중근의 삶은 이미 알고 있음에도 범접할 수 없는 벽이 있다. '우린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극을 향한 존중으로 이어지는 건 별개의 일이다. <영웅>은 위대한 인물의 삶을 담아낸 위대한 영화가 될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안중근의 삶을 바탕으로 한 원작 뮤지컬이 있다. 원작은 2009년부터 관객과 만났고, 탄탄한 마니아층을 가지고 있다. 뮤지컬 10주년 기념으로 공개된 '누가 죄인인가' MV가 누적 조회수 225만 회를 기록하는 등 공연장 밖에서도 화제가 된 작품이다. <영웅>의 윤제균 감독도 뮤지컬을 여러 차례 보며 받았던 감동을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다. 그리고 '뮤지컬을 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명확한 목표도 세웠다. 영화는 명확히 이 목표를 위해 달리고 있었고, 여기서 <영웅>의 장단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영화화와 함께 주목받았던 건 캐스팅이다. 뮤지컬 초연부터 안중근 역을 맡으며 지금까지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윤제균 감독은 흥행을 위해 스타성을 고려한 캐스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뮤지컬에서 정성화가 보여준 이미지와 아우라를 대체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역시나 영화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보였다. 또한, <영웅>은 가창 씬에서 현장 녹음을 70%가량 진행하며 배우의 감정과 연기의 생생히 담으려 했고, 정성화의 노래가 가진 감성도 온전히 화면에 닮길 수 있었다.

더불어 <영웅>의 촬영도 배우들의 감정을 프레임에 옮기는 걸 최우선적 과제로 생각한 결과물이었다. 가창 씬에서는 롱테이크를 유지하며 감정선을 깨지 않으려 했고, 카메라도 때로는 부담스러울 만큼 인물 곁에 오래 머물며 그들 주변의 대기까지 담으려 했다. 이 역시 윤제균 감독이 뮤지컬에서 받았던 감동을 이식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런 연출이 때로는 단조로웠고, 영화가 아닌 뮤지컬 실황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웅>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가창 씬에서 정성화, 김고은, 나문희 등 배우들이 부른 노래엔 호소력이 있었다. 적어도 귀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던 영화다.


실황 영상이라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로 <영웅>은 '뮤지컬의 이식'이란 면에서는 성취와 만족감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영웅>이 얼마나 영화적이었냐는 질문엔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안중근의 삶을 담는 데 목표가 있지 않았다. 안중근의 삶을 담은 뮤지컬을 영상으로 재가공해 스크린에 옮기는 데 목표가 있었다. 영화와 실존 인물 사이에 뮤지컬 원작이라는 하나의 벽이 더 있어, 영화 내내 어떤 거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실존 인물이 오히려 소외된 기이한 구조다.


특히, 뮤지컬 공연의 내려티브를 충실히 이식한 탓에 영화적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씬들이 유기적으로 모여 도마 안중근에 다가가고 그의 삶을 고민하는 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영웅>도 이 흐름의 부자연스러움을 인지했는지 장면 사이에 현란한 트랜지션 효과를 자주 사용했다. 이는 잘 붙지 않는 씬과 시퀀스를 작위적으로라도 이어 붙여, 어떻게든 관객의 이탈을 막아보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동시에 안중근 외의 인물들에게도 이입이 어려웠다. 기능적으로 소모되는 장면과 캐릭터가 많았던 작품이다.

<영웅>에서 관객이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되는 부분을 고민하면 더 흥미롭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강력하게 이입 및 몰입하는 건 시대적 분위기, 실존 인물의 비극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냉정히 말해 <영웅>과 무관한, 영화로 구성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다. <영웅>은 내러티브를 통해 캐릭터의 고민이나 딜레마를 조명하지 못했다. 관객이 이미 영화관 밖에서도 느끼는 감정을 파편적으로 전시하고, 이를 스크린의 스펙터클로 보강할 뿐이다. 너무 단조롭게 표현된 인물들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준비 중인 가면들로 존재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윤제균 감독의 의도는 잘 반영된 작품이었다. 감독이 객석에서 원작 뮤지컬을 볼 때 느꼈던 그 당시의 감정을 스크린에서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던 영화다. 그래서 뮤지컬 객석에서 관객으로서 정성화를 봤던 그의 시점이 <영웅> 속 카메라의 위치가 되었다. 카메라 뒤에서도 윤제균 감독은 여전히 뮤지컬 객석에 앉아 디렉팅을 하고 있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 배우를 한 번 더 복제하려 했기에 실제 안중근의 삶과 더 멀어졌고, 관객이 영화 속 인물에게 이입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이런 결과로 <영웅>은 듣는 매력은 있는 작품이 되었지만(여기서 흥행도 기대하게 한다), 냉정히 말해 영화적이지는 못했다. 이건 영화적 재구성이 아닌, 스펙터클한 복제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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