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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an 16. 2023

[더 퍼스트 슬램덩크] 재연 이상의 가치를 만든 작품

Appetizer#181 더 퍼스트 슬램덩크

한국 농구 영광의 시절은 언제일까. 프로 리그의 규모가 커지고 산업적인 발전이 많이 진행되었음에도 90년대 농구대잔치와 그때 선수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한국 농구 전성기로 꼽는 이들이 많다. 현재 다양한 방송에서 활동 중인 서장훈, 현주엽, 허재 등이 그때 활약했던 스타들이다. 그땐 농구로 이야기할 게 많았다.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평가받았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의 시대였고,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안방을 강타했었다. 그리고 이 만화가 있었다. 수많은 소년의 가슴을 농구공처럼 튀게 했던 그 작품. 슬램덩크. 그 작품을 여전히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는 이 만화의 마지막 경기, 산왕전을 두 시간에 걸쳐 보여준다. 경기는 원작 그대로 진행되고, 결과 역시 다르지 않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현대화된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변환한 작품이다. 그러니까 원작 팬은 한 번 이상 봤던 걸 또 한 번 보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새롭고, 또 재미있었다. 주춤했던 극장가의 한기를 뚫고 슬램덩크를 작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어떻게 원작 만화의 재연을 넘어 자신만의 화제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하나, 포맷의 변환만으로도 다른 작품이 되었다. 만화는 컷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를 수많은 이미지로 나눈다. 동시에 이 분절된 이미지를 자유롭게 배열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때 컷과 컷 사이의 여백이 생기고, 독자는 이 틈에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어 붙인다. 여기서 특정 장면은 현실보다 과장 및 축소되어 표현되고, 시간이라는 것도 우리가 현실에서 인지하는 것보다 짧거나 늘어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원하는 이미지, 대사, 주제를 강조하면서 독자의 마음을 흔든다. '왼손은 거들 뿐''농구가 하고 싶어요''내 영광의 시절은 지금입니다' 등 30년이 지나도 소환되는 장면과 대사가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번 <슬램덩크>는 1초에 수십 컷을 그려 넣어 만화에 있던 여백을 최소화했다. 그래서 좀 더 현실적이고 생생한 농구를 볼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만화의 팬에게 아쉬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 원작에서 좋아했던 장면과 대사가 이번 애니메이션에서는 비교적 덜 주목 받을 수밖에 없다. 만화에서 하나의 장면이 정지된 채 주목을 받았던 것과 달리,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하나의 씬 속에 이미지와 대사가 흘러가기에 필연적인 부분이다.


더불어 우리의 상상력으로 보강된 만화 '슬램덩크'는 일종의 환상성을 획득해 개개인에게 더 특별하게 기억되는 측면이 있다. 만화의 현란한 기술이나 명장면이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애니메이션 속에 이식되었을 때, 원작보다 평범해 보일 수도 있다. 환상성 대신 리얼리티. <슬램덩크>는 현실적인 톤 앤 매너로 원작과는 또 다른 몰입을 유도한다. 판타지 스타였던 주인공들이 현실 어딘가에서 우리와 함께 고민을 공유하고 성장하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 이번 애니메이션은 더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이야기로서 '슬램덩크'를 새롭게 기억할 기회를 줬다.

하나, 애니메이션의 메인 주인공과 중심 시선이 바뀌었다. <슬램덩크>는 북산의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사실 원작에서 인기가 많았던 건 천재형 에이스 서태웅, 불꽃 남자 정대만, 사고뭉치 천재 강백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 외에도 타팀에 있던 윤대협, 이정환, 김수겸 등을 언급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듯 원작의 송태섭은 주목받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원작자이자 이번 애니메이션의 감독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만화 속 산왕 전의 골격을 바탕으로 송태섭 개인의 서사를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새로운 관점 덕에 원작에서는 봤던 경기임에도 그때 미처 못 봤던 것들이 부각될 수 있었다. 이는 송태섭의 포지션과도 관련이 있다. 포인트 가드는 선수의 장단점을 평가하고, 전술의 시작점이 되는 등 게임을 운영하는 포지션이다. 이번 <슬램덩크>는 가드의 입장에서 선수의 상태를 파악하고, 경기의 흐름을 정리해주기에 북산이란 팀을 더 입체적으로 볼 기회를 준다. 동시에 문제아였던 송태섭 개인의 문제와 갈등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원작에서는 조명되지 못했던 지점이라 같은 이야기 속에서도 새로운 감정을 자극할 수 있었다. 하나의 시점이 변화한 것만으로도 '슬램덩크'는 완전히 새롭게 탄생했다.

하나, 추억이란 상품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개인적으로 '슬램덩크'를 수십 번 봤고 볼 때마다 뜨거운 뭔가를 느끼고는 한다.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주기적으로 한 번씩 찾아볼 정도로 이 작품의 온도는 시간이 지나도 쉽게 꺼지지 않는다. 90년대에 슬램덩크를 봤다면, 비슷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만화 속 문제아들의 성장기를 통해 청년기에 위로받았거나, 좌절 속에 희망을 찾았거나, 새로운 도전을 꿈꿨을 거다. 여러 가지 순간들과 함께 30년 전 슬램덩크는 우리에게 저장되어 있다. 이 만화가 다시 플레이 된다는 건, 그 과거 속 추억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애니메이션 최고의 장면은 오프닝이었다. 선으로 이뤄진 캐릭터가 색을 입고, 움직이는 캐릭터로서 스크린 앞으로 걸어 나오는 그 장면. 그때 가슴 속 어딘가 묻혀있던 것도 함께 걸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슬램덩크'를 매개로 과거와 오늘의 내가 이어지는 듯해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번 <슬램덩크>는 90년대 방영된 TV 애니메이션의 성우진이 참여했고, 이 역시 과거 어딘가의 기억을 건드린다. 이른 아침 객석을 채운 관람객 중 중년층이 많았는데 그들도 이 벅찬 순간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추억이 건네는 인사의 힘은 무척 강했다.

영화관에서 봐야만 하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스펙터클한 이미지나 뛰어난 음향 효과를 자랑하는 작품을 추천하고는 한다. 이번 슬램덩크는 그런 의미에서는 추천하기 힘들 수 있다. 대신에 객석에서 30년 전 추억을 공유하고, 그 시절을 간직한 이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슬램덩크>를 영화관에서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추억이란 이미지도 엄청난 스펙터클임을 확인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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