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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읽어주는 남자 Jan 25. 2023

[유령] 이미지만 '유령'처럼 부유하는 영화

Appetizer#182 유령

2018년 개봉한 <독전>은 '마약'이란 소재와 닮은 지독한 캐릭터들의 충돌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경찰인 주인공은 거대 마약 조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보를 모았고, 반대로 그 조직을 움직이는 존재는 끝내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경찰 신분을 숨기고 정보를 얻는 시도를 하는데, 스파이가 등장하는 첩보물의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독전>의 연출을 맡았던 이해영 감독의 신작도 이런 긴장감을 기대해볼 수 있는 소재와 장르를 가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활약한 항일 조직 '흑색단'이 중심에 있는 <유령>은 첩보와 추리극의 구성과 무드를 가져와 독특한 색채를 가진 시대극이다.


<유령>은 시작부터 일제 강점기 시대의 미술, 의상, 소품을 전시하며 관객을 1933년 경성으로 초대한다. 당대 도시와 거리의 분위기, 영화관을 중심으로 향유하던 문화가 세심히 표현되어 있어 눈이 즐겁다. 전반부 무대가 되는 밀실 저택도 동서양의 문화가 섞여 기이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런 이미지와 함께 오프닝 시퀀스에서는 암호의 전달 과정과 그것을 해독하는 몽타주 씬을 통해 첩보극으로서의 무드도 쌓아 올린다. 교차 편집을 통해 암호화된 메시지가 전파되는 은밀한 과정이 리듬감 있게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영화의 도입부터 이해영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과 장르로 1930년대를 재구성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템포가 다르다. 전반부는 경호대장 카이토(박해수)가 흑색단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는 '유령'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모으고, 질문을 주고받는 추리극의 형식을 취한다. 거대한 밀실 저택을 무대로 용의자로 지목된 이들은 본인이 유령이 아님을 증명하고, 진짜 유령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서로를 의심한다.


그런데 <유령>은 추리극으로서 조금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관객은 범인(유령)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 범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한다. 자연스레 범인(유령)이 느끼는 불안함이 조명되고, 여기서 영화는 첩보물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아쉽게도 이 지점에서 <유령>은 긴장감을 오래 가져가지 못한다. 관객이 유령의 정체에 큰 관심을 가질 수 없고, 그 정체가 드러난다 해도 극의 전개에 치명적일 것 같지 않은 분위기 속에 이야기가 진행된다. 관객을 배제한 채 밀실에 모인 그들만 심각해 보여 극에 이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극의 템포는 중반부 한 번의 총성을 계기로 급격히 빨라진다. 영화에 활기가 충전되며 긴장감이 넘치는 후반부는 총을 든 차경(이하늬)과 유리코(박소담)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다양한 총기를 사용하며 탈출구를 찾는 두 캐릭터의 모습에선 어떤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억압된 시대와 부조리한 인물들을 향한 저항이자, 그 시대의 한을 풀어주는 액션이펼쳐진다. 다만, <유령>은 액션 연출은 극적 흥미를 오래 유지하지 못해 열기가 금방 식어버린다. 전체적인 액션 설계가 단조로웠고 카메라도 이하늬, 박소담의 얼굴 및 이미지 부각하는 데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이해영 감독은 <유령>을 통해 항일 조직 내의 치밀하고 뜨거운 활동보다 꽉 막힌 시대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두 여성의 서사를 비추는 데 관심이 많았다. 담배를 물고, 총을 든 차경과 유리코를 통해 자유롭고 강인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더 나아가 두 여성의 연대로 불합리한 시대와 폭력적인 남성의 세계를 돌파하고 극복하는 서사를 추구하려 했다.

여기서 영화 속 안타고니스트들의 활약이 미약하다는 점이 아쉽다. <유령>은 두 여성과 비교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적을 설정해뒀다. 카이토를 비롯해 쥰지(설경구)는 결점이 많고, 판단력도 좋지 못해 장애물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부족한 인물을 극복해내고 얻은 승리에 쾌감이 많을 리 없다. 박해수와 설경구의 흥미로운 연기와 별개로 영화 속 안타고니스트들이 항일 조직 소속인 주인공들의 반대항(일본의 남성 캐릭터)으로만 기능할 뿐 캐릭터로서 살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차경과 유리코의 연대'라는 서사의 매력도 덩달아 반감되어 버렸다.

 

<유령>은 새로운 느낌으로 경성을 복원해 장르적 재미를 추구했고, 이런 시도를 했던 작품들을 다수 소환한다. 전반부 첩보극에서는 김지운 감독의 <밀정>을, 총을 든 여성 주인공의 은밀한 작전에서는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두 여성의 연대로 일제 강점기와 부조리한 남서의 세계에 맞서는 지점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도 겹쳐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유령>만의 성취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이 작품이 남긴 건 1930년 경성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미장센과 이하늬, 박소담의 표정뿐이다. 매혹적이거나 혹은 과잉된 이미지가 유령처럼 부유하는 영화. 어쩌면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목록 속에서 유령처럼 떠도는 영화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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