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더 글로리] 제4의 벽을 넘은 드라마의 가치

영화 일기#089 더 글로리

복수는 끝났지만, 여전히 뜨겁다. 3월 10일 공개 이후, 2주 연속 키노라이츠 통합 콘텐츠 랭킹 1위에 오른 '더 글로리'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하나의 작품을 넘어 문화 현상으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는데,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이 광고나 패러디로 재생산되어 시청자들과 다시 만나고 있다. '더 글로리'가 조형된 방법을 고민해봤을 때, 악역을 맡은 캐릭터들이 조명받는 건 당연해 보인다. 이 드라마는 악한 캐릭터들이 극을 주도했고, 더 부각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감정을 증폭시킨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가 이 작품에 영광(glory)의 시간을 선물했다.

still_02.jpg

단순한 이야기와 조명 받지 않는 주인공

'더 글로리'의 서사 구조 자체는 복잡한 편이 아니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오랜 시간 만든 계획을 실행하며 가해자를 하나씩 응징하고 복수하는 걸 볼 수 있다. 세상이 외면했기에 자기 능력으로 거대한 계획을 천천히 하나씩 이뤄가는 피해자를 따라가는 이야기. 학교 폭력이라는 소재를 제외하면, 한 번의 패배를 맛본 캐릭터가 훈련 후 상대에게 재도전해 승리를 쟁취하는 성장 영화와 닮았다. 아니면 치밀한 계획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케이퍼 무비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 글로리'는 두 장르와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보는 재미'와 극적 쾌감을 만든다.


우선, 이 드라마는 성장 드라마가 결코 아니다. 송혜교가 연기하는 시점부터 문동은이라는 캐릭터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때부터는 완성된 캐릭터로 극의 중심에 서있다. 어른이 된 동은은 상대를 파멸시킬 완벽할 계획을 하나씩 이행하는 인물이다. 사무적으로 계획을 달성해나가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차갑다. 동요 없이 큰 계획의 조각을 하나하나 모으는 것부터 계획이 달성된 후에도 감정적 변화를 잘 보이지 않는 것까지. 때로는 그녀가 동은, 혹은 학교 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대리하는 AI처럼 보일 정도였다(많은 학교 폭력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현실을 고민해볼 때, 이런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기에 복수가 가능하다는 설정이 오히려 개연성을 획득하는 면도 있다).

still_01.jpg

그녀의 복수 과정 역시 케이퍼 무비나 타 복수극과 비교했을 때 치밀해 보이지 않는다. 긴 시간 공을 들여 진행되는 계획을 방해하는 요소도 많지 않다. 변수마저도 그녀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느낄 정도로 동은이 준비한 복수는 큰 위기 없이 비교적 쉽게 이뤄진다. '더 글로리'는 계획이 이뤄질 것 같은 순간에서 오는 긴장감에 주목하지 않는다. 더불어, 동은은 다수의 인물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정도의 능력과 정교함이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캐릭터에게서 복수를 긴 시간 준비할 분노와 동기가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녀가 이 복수극을 주도하는 게 가능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는 건 믿기 힘들었다. 인물의 개연성에 빈 곳이 있었던 거다.


재미있게도 이런 빈 부분은 '더 글로리'의 수용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동은이 계획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 가지만, 계획 자체엔 관심이 없다. 대신 그 일이 달성된 이후에 인물들의 반응에 주목한다. 지독하게 나쁜 이들이 파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응징을 받았는지 보는 데서 시청자를 몰입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건 위주의 전개 덕에 극은 빠르게 전개되고, 덕분에 악인들이 절규하는 순간을 다수 전시할 수 있었다. 카메라의 포커스가 여기 맞춰졌기에 자연스레 악인을 맡았던 배우들의 연기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still_08.jpg

제4의 벽을 넘은 캐릭터와 이야기

여기서 주목할 건 '더 글로리' 속 악인들이 조금 특별한 형태로 빚어졌다는 데 있다. 우선, 이들은 실제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이다. 이처럼 나쁜 일을 하고 인성이 나쁜 이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과잉된 감정을 내내 뿜어내는 인물들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더 글로리' 가해자 캐릭터들은 서로 소통한다기 보단 자신의 감정을 전하기 위해 대사를 뱉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악인들이 관심이 있는 건 자신의 욕망과 쾌락 뿐이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를 만화적이고 연극적인 캐릭터로 느낄 때 인물들의 리얼리티에 물음을 던지게 된다.


악인들이 동은을 대할 때도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박연진(임지연)을 비롯한 다수의 캐릭터는 동은에게 분노를 토해내지만, 대부분 동은은 미동조차 없다. 닿지 않은 분노를 지속해서 뿜어내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이 출구 없는 분노는 누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 있던 걸까.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분노는 동은을 통과해 더 멀리 나아간다. 악인들의 비열함과 추악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 얼굴은 제4의 벽을 넘어 시청자에게 닿는 데 까지 성공한다. 그리고 그들의 민낯을 정면에서 응시한 시청자는 더욱더 그들의 처벌을 학수고대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still_11.jpg

대개의 드라마가 주인공에게 이입을 유도했다면, 이 드라마는 주인공과 거리를 두고 악인에게 더 다가갔다. 동은은 피해자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어딘가에 있지만, 다른 드라마/영화와 비교해 잘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이 전략은 효과적이었다. 단순하고 조금은 허술한 복수의 서사 구조 속에서도 시청자는 악인과 직접 연결되면서 이야기에 극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 동시에 '더 글로리'가 허구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현실을 더 환기하는 측면이 있었다면, 우리가 악인의 행위에 더 직접적으로 분노하고 아팠던 탓일 거다. 어쩌면 현실에서는 목격하기 힘든 가해자 및 악인을 응징하는 이야기에 시청자가 후련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더 글로리'는 작품 속 캐릭터와 학교 폭력이라는 아픈 사건은 제4의 벽을 훌쩍 넘어 현실 속을 부유 중이다. 이들이 현실에서 더 많이 언급될수록 '더 글로리'가 가지는 가치는 높아지지 않을까. 임지연, 박성훈, 김히어라, 차주영 등이 보여준 과장된 연기가 대중문화 안에서 재소환되고, 대중이 그들의 매력을 알아가는 중이라 반갑다. 드라마 속 그들은 심연으로 떨어졌지만, 현실 속 배우들은 빛나는 시간을 만끽하기를. 그리고 다시 소환될 과거의 일들이 드라마처럼 마땅한 처벌을 받기를. 그게 진짜 '더 글로리'한 일이 될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즈메의 문단속'이 '신카이 마코토' 최고작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