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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의 세계가 수직의 세계에게

영화 일기#090 콘크리트 유토피아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 한국 영화의 부흥기엔 '재난'을 소재로 했던 영화의 성적이 꽤 좋았다. 전염병을 다른 형식으로 발현했던 영화(<부산행>, <감기>, <연가시>), 우리에게 익숙한 곳을 무대로 거대한 자연재해의 스펙터클을 보여줬던 영화(<해운대>, <백두산>), 안전불감증이 초래한 인재를 보여줬던 영화(<타워>, <판도라>, <터널>) 등 그 소재도 다양했다.


한국 재난 영화의 유사성

이런 한국 재난 영화는 약속한 듯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었다. 먼저, 대개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한국에서 일어난 재난을 믿지 않는다.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그런 태도를 보인다. 이런 심리는 한국 관객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지금까지 한국은 재난과 거리가 멀었기에 관객도 자신이 딛고 선 땅은 안전할 거란 믿음을 가진 채 영화 속 상황에 철저히 거리를 두게 된다. 결국, 한국인에게 한국의 재난 영화는 판타지였고, 영화 속 인물들을 타자화하기도 쉬웠다.

또 하나 부각되는 건 자기만 살겠다고 동분서주 움직이는 이기적인 인물과 그들이 중심이 된 집단이다. 사실, 이는 다른 재난 및 장르 영화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요소라 낯설지 않다. 국내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영화에서도 목격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한국 재난 영화에서 유독 공권력이 부각된다는 점은 특이하다. 여기서 공권력은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통제하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재난 영화 속 주인공은 가족을 구하기 위해 시스템 밖으로 뛰어나가야 한다.


<유토피아 콘크리트>는 한국의 재난 영화와 얼마나 닮고, 또 달랐을까. 이 영화도 익숙한 한국 재난 영화처럼 인간의 이기심을 카메라에 담았다. 나와 가족,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배척하는 모습을 내내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독특한 건 '집'이라는 요소를 끌어왔다는 데 있다. 집을 구하는 게 꿈이 된 시대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집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층과 계급을 나누며, 차가운 현실을 풍자한다. 그리고 그 소중한 아파트를 단번에 붕괴시킴으로써 현대인이 가진 꿈을 좌절시킨다. 마치, 그 꿈이 공허하고 거짓이라고 말하는 듯 말이다.


부재한 공권력의 자리를 채운 소시민들

<유토피아 콘크리트>의 주인공들은 재난 영화 속 인물들과 비교해 익숙하면서도 다른 행보를 보인다. 우선, 명화(박보영)는 자신의 가족이 아닌 위험에 노출된 약자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동시에 자신들만 살려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며 위험을 자초하기도 한다. 명화처럼 약자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류애 있는 인물은 재난 영화 속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클리셰처럼 이런 역할을 맡은 인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민성(박서준)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명화만큼은 아니지만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명화의 안전을 위해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만든 시스템에 합류하면서 점점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게 된다. 그리고 점점 그 집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약간의 특혜도 누리게 된다. 그렇게 민성은 이 조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서서히 인간성을 잃어 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시민들이 만든 집단이 한국 재난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던 국가 및 공권력의 자리를 대체했다는 건 재미있는 설정이다. 거대한 재난이 휩쓸고 난 뒤, 영화 속 세상엔 국민을 위해 작동하는 국가 시스템이 없다. 대개의 한국 영화가 비판했던 대상의 자리가 부재한 것이다. 정부는 재난으로 자취를 감췄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국회의원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시민들의 생존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때,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부재한 국가 자리에 그들의 조직한 집단과 시스템을 채워 넣고 재난을 통제하려 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투표로 이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인물로 영탁(이병헌)을 뽑는다. 이후 영탁은 위임받은 힘으로 조직을 결성해 생존에 필수적인 활동을 한다. 아파트 주민이 아닌 자는 폭력으로 쫓아내고,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약탈도 일삼는다. 강력한 힘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세상에 맞서 싸운다. 위험과 두려움 앞에 그들을 보호하고 통제해 줄 힘을 원했던 주민들은 영탁 덕에 안전과 생존을 보장받고, 영탁과 조직은 이 활동의 보상으로 권력과 혜택을 누린다.


수직의 세계에 사는 이들에게

아쉽게도 자발적인 의지로 만든 권력에 복종한 사람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절대적 힘을 가진 이가 통제하는 수직적인 시스템은 시간이 지날수록 균열을 보였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누군가를 배제하고 약자를 밟고 서 있는 집단은 언젠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걸, 황궁 아파트의 바리케이트가 뚫리는 장면을 통해 보여준다. 이 장면 외에도 영화에서는 극부감/앙각의 샷으로 위/아래를 구분하는 구도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장면에서는 위에 배치된 인물이 더 강력하고 안전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반대로 생각하면 위에 있는 인물들이 더 위험한 공간을 위태롭게 걷고 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시점은 점점 후자로 변해간다.


이런 수직의 세계를 향한 부정적인 생각은 영화의 말미에 더 강조된다. 명화가 마지막에 도착한 공간은 쓰러진 아파트였다. 영화는 수직적 권력이 아닌 수평적 배려가 더 강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위로 솟은 아파트가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공간. 그곳의 사람들은 식량을 나누고, 서로를 배려하며 살고 있다. 그들 주민이 아니라도 배척하지 않고 온기를 나눠준다. 위로 굳게 솟은 황궁 아파트가 아닌, 이미 무너져 높이의 개념을 상실한 수평의 공간이 더 생존에 적합했다는 현실 앞에 명화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한국 영화가 보여줬던 인간의 이기심을 다른 형태로 발현했다. 국가와 공권력이 약자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게 아닌, 일반적인 소시민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을 위해 약자를 배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한국 재난 영화에서 우리가 비난했던 인물이나 공권력처럼, 평범한 시민도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될 수 있다는 섬뜩한 메시지도 보인다.


아직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현실적 문제로 와닿지 않는다면,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을 현실과 비교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전혀 만난 적 없지만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약자들, 혹은 난민의 상황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우리의 땅과 삶을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일까. 내겐 손해뿐인 상황 앞에서도 적극적으로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명화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일까.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사회를 살고 있다는 현실. 그게 우리의 진짜 재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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