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기#088 스즈메의 문단속
시각적 스펙터클이 영화관을 점령한 시대, 그리고 영화관에서 볼만한 영화를 규정하는 시대에 1월에 개봉해 400만 관객을 동원한 <더 퍼스트 스램덩크>는 화려한 효과만 중요한 게 아님을 선언했다. 역대 한국 애니메이션 관객 수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이야기가 최고의 스펙터클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기라도 한 걸까. 자신의 왕좌가 빼앗겼음을 알기라도 한 듯 신카이 마코토가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단편 <별의 목소리>부터 신카이 마코토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체성을 구축해왔다. 디테일하게 이식한 사물과 공간, 생동감 있으면서 매혹적으로 표현된 빛과 물의 질감 등으로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그리고 감정적 여운을 더 진하게 만드는 음악을 더해 작품의 애절한 분위기를 강화했다. 덕분에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더 순수하게 묘사될 수 있었다. 극도의 영상미와 순수성. 이는 그의 작품을 지탱하는 힘이었고, 이 자체가 이야기의 개연성과 당위성을 만드는 장치로 작동하고는 했다. 이미지와 분위기의 힘이 이야기와 인물보다 더 강했던 작품으로 신카이 마코토는 세계관을 단단하게 구축했다.
이런 경향은 <너의 이름은.>에서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줬고, 그 중심에 '재난'이라는 소재가 있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가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 이어 또 한 번 재난을 중심에 두고 작가적 메시지를 던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특유의 서정성은 유지되었지만, 더 현실적인 배경을 무대로 더 현실적인 사건을 환기하며 예전엔 비어 있던 이야기적 요소를 채워 넣은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은.> 전엔 '첫사랑' 같은 하나의 애절한 감정을 증폭시키는 이야기를 해왔다면, 최근엔 재난을 겪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에 투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야기의 밀도와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졌고, 지금 사회 및 관객과 공명하는 지점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스즈메의 문단속>의 인물 및 이야기 곳곳에서도 여전히 비어 있는 부분을 목격할 수 있다. 스즈메(하라 나노카)가 소타(마츠무라 호쿠토)를 만나러 가는 장면, 그와 함께 고양이 '다이진'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이 시작되는 부분 등은 개연성보다 운명론적 요인이 강하게 작동한다. 또한, 스즈메 주변의 인물 역시 도구적인 존재로 소모되는 측면이 있다. 인물의 여정을 위해 존재하는 작위적인 인물. 흥미롭게도 이는 신카이 마코토가 초장기에 작업한 적이 있는 일본 RPG 게임 속의 설정과 닮았다. 일본식 RPG에서 주인공은 운명론적 사명을 지닌 소년과 소녀들이었고, 그 밖의 NPC들은 주인공의 여정에 필요한 걸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신카이 마코토가 다음 단계를 위해 극복해야 할 건 일본 RPG의 서사일 지도 모른다.
아쉬움을 먼저 말했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감독 개인의 성취와 성장이 더 많이 보였던 작품이다. 우선,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과 비교해 내러티브의 구성이 훨씬 탄탄했다. 일본의 토속 신앙을 빌려와 서사의 뼈대를 만들었고, 이를 중심으로 인물과 사건을 유기적으로 묶는 데까지 나아갔다. 일본의 지금을 환기할 수 있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통해 현실과의 연결고리도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신앙과 그에 얽힌 가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운명론적 설정을 완벽히 피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과 비교해 당위성과 개연성이 훨씬 더 확보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어있던 이야기를 채우는 요소가 감독이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재난과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있었기에 메시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전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부터 재난, 더 구체적으로는 '동일본 대지진'을 소환해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사라진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는 걸 꾸준히 말해왔다.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이 메시지는 조금 더 직설적이고 현재성을 띠고 있다. 전작 <너의 이름은.>은 재난을 겪은 이들을 애니메이션의 상상력과 환상성으로 살려 위로하려는 감독의 노력이 보였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으로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을 붙잡고 있지만, 이들을 복원하는 서사를 택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재난 속에 살아남은 이들과 재난을 목격했던 이들을 응원하며 어떤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지 말하려 했다. 전작이 사라져간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예전엔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비극을 지우려 했던 신카이 마코토는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혹은, 상처가 아물고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았다. 재난을 받아들이고, 지금 세대가 당면한 과제를 함께 극복하기 위한 어른의 노력을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봤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넘어 쓸쓸하고 망가진 사회를 응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계기로 더 성숙한 작가의 길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래서 내겐 <스즈메의 문단속>이 신카이 마코토 작품 중 최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