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와 작가주의가 뭔데?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누벨바그’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옆자리에 작가주의라는 또 하나의 용어를 불러오고, 이 둘은 굉장히 어려운 무언가가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누벨바그는 프랑스의 영화운동이었고, 작가주의는 감독이 작가가 되어 개인의 주제의식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의미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최고로 간략화한 것이며, 덕분에 오류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그런데 왜 감독이 작가가 되어야만 했을까.
스튜디오 시스템으로 공정화, 산업화한 영화는 유사한 구조와 소재로 비슷한 것을 재생산하기 시작했고, 스펙터클과 볼거리에 치중하며 상상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작가주의는 더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가능성을 한정하지 않고, 영화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시네필이라 불리던 영화광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이렇듯 누벨바그는 영화를 향한 무한한 애정의 고백이었고, 낭만적인 외침이었다.
<400번의 구타>는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등과 함께 누벨바그의 중심에 있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된 이 영화는 앙트완(장 피에르 레오)이라는 소년이 사회와 부딪히며 겪는 갈등을 보여주고, 그 사회로부터 받는 폭력과 버림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이 앙트완의 시선으로 전달되기에, 관객은 소년의 관점으로 사회의 억압과 암울한 분위기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소년이 세상을 맛본다는 점에서 ‘성장’이라는 주제를 예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를 성장 영화라고 분류하기엔 걸리는 게 있다. 소년은 사회와 부딪히고, 많은 것을 경험하지만, 결국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위치, 즉 주체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종착지는 막다른 곳이었기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400번의 구타>는 성장을 억압하는 영화고, 이 중심에는 그의 부모와 부모의 가치관을 재생산하는 사회의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대 갈등의 이야기이며, 구세대가 신세대의 가능성을 뭉개고,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구세대가 신세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근거는 이렇다. 그들은 구세대에게 폭력을 가할 신체적 우위를 가졌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신세대를 교육할 학교와 수감원 등의 제도를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400번’의 구타였지만, 실제로 보여주는 구타는 몇 번 되지 않는다. 이는 아직 보여주지 않은 300번 이상의 구타가 앙트완을 따라다닐 것을 말하고, (혹은 가해졌거나) 이는 그를 지치게 만들어 제도에 순응하게 할 것이다.
앙트완이 보고 싶다고 했던 바다에 도착하며 <400번의 구타>는 끝난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공허했고, 더는 갈 곳이 없어 절망한 듯했다. 바다란 공간에서 무엇을 바랐고, 어떤 것을 꿈꿨을지 모르겠으나, 그가 도착한 바다는 그의 탈주를 막는 막다른 길이었다. 그는 바다로 나갈 수단이 없다. 그는 항해를 시도할 수 없는 존재, 배를 소유하지 못한 선장이었다. 배가 없는 존재, 그리고 배를 기대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앙트완은 자기 인생의 선장이 될 가능성을 차단당한, 억압된 소년이다.
<400번의 구타>에서 부모는 자식을 방치, 방관한다. 앙트완의 부모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그저 앙트완이 사회에 순응하길 바란다. 또한, 문제가 생겼을 때 앙트완과 대화는 시도하지 않고,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의 입장과 판단을 가치의 척도로 둔다. 그리고 문제가 심각해지면, 앙트완을 수감원이라는 시설로 격리한 뒤, 그 시설이 아이의 양육을 대신해 주길 바란다.
앙트완이 보이는 행동은 부모의 관심을 구걸하는 것이며, 관심이 거절당할수록 더 큰 반항을 통해 부모의 눈에 들려 했다. 하지만 이 반항은 앙트완을 구제불능으로 낙인찍고, 그를 문제아로 분류하며 결국 구타까지 용인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렇게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는 유치장에 온 범죄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회 구성원으로 인식되고, 자유를 뺏겼다.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는 창살 안에서 눈물을 흘릴 뿐이다.
질베르(클레어 모리어)에게 앙트완은 원치 않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을 짐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앙트완을 향한 질베르의 태도는 무관심이거나 적대적이다. 그리고 앙트완이 집에서 전담으로 맡아서 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다. 집안의 쓰레기를 배출하는 일을 앙트완에게 시킴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짐을 배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투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앙트완이 질베르의 불륜을 목격하는 순간, 이들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 그 불륜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앙트완은 질베르에게 짐이 아닌 위협적인 존재, 약점이 되었다. 그리고 앙트완 역시 현재의 가족이 지속할 수 없음을 예감했는지, 학교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학교에 오지 못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엄마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죽임으로써 앙트완은 가정에서 탈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질베르가 이렇게 묻는 장면이 있다. ‘왜 당신(앙트완의 새아버지)이 아니라 내가 죽었다고 했을까요?’ 그녀는 앙트완의 이 행동을 자신의 불륜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부정이 폭로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앙트완을 수감원에 보낸 행동은 자신의 추악함을 그 시설에 봉인하려는 행위로 보인다. 그녀는 문제를 덮음으로써 가정을 지켰다. 추악함은 사회에 남고, 진실을 품은 소년은 수감원이라는 배출구로 갔으며, 가정과 사회는 안정을 찾는다. 그게 <400번의 구타>가 보여주는 구세대의 방식이 아닐까.
<400번의 구타>에서 앙트완의 미소는 보기 힘들다. 그의 진짜 미소는 가족과 영화를 본 직후의 장면과 회전하는 놀이기구 안에서 볼 수 있다. 가족이 소통하고 즐거움을 공유하고 가정이 통합되는 유일한 장면은 ‘영화 관람’이라는 의식 뒤에 있다. 이 장면에서 부모와 아이는 공통된 소재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다. 구세대와 신세대를 통합할 수 있는 영화. 영화가 보여주는 아름다움, 가능성, 즐거움을 무한 긍정하는 시네필의 애정이 듬뿍 담긴 장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회전하는 기구 안에서 보여주는 앙트완의 미소 역시 ‘영화’와 연관이 있다. 최초의 영화가 있기 전,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던 장치 ‘프락시노스코프’가 앙트완이 탑승한 놀이기구와 닮았다. 이렇게 트뤼포는 영화의 기원을 소환하며, 동시에 앙트완의 즐거움을 미소로 표현했다. 이 장면의 긍정적 에너지의 근원 역시 영화였다. 그렇게 <400번의 구타>는 영화를 소환하고, 긍정하고, 또 애정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400번의 구타>가 보여주는 구/신세대 간의 갈등을 ‘영화’라는 코드로 풀어내면 어떨까. 영화 산업의 상황을 묘사한 은유로서 이 영화를 읽어보자. 앙트완을 억압하는 부모와 제도는 정형화되어가고 있는 구 영화 산업이고, 앙트완은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신세대 영화로 생각해볼 수 있다. 기존 산업은 영화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영화의 새로운 힘을 제도 안에 복종시키려 한다. 소수의 감독이 저항하지만 ‘400번의 구타’를 견뎌낼 자는 얼마나 있을지 모른다. 이때, 앙트완이라는 신세대는 영화의 죽음을 경계, 경고하고자 하는 저항, 반항의 몸짓을 대표한다. 이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본다면, 관습에서 탈주하려는 발버둥과 새로움 움직임을 향한 욕구·저항이 보일 것이다.
유독 <400번의 구타>에는 카메라를 땅에서 떼어 내 움직이려는 시도가 많다. 트래킹 샷이 많고, 움직이는 차에 카메라를 위치시키며 카메라를 고정된 것에서 해방하려 한다. 이는 한정적인 공간, 스튜디오가 마련한 세트에서의 카메라 워크로부터 탈주하려는 트뤼포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는 <쥴 앤 짐>에서 ‘스위시 팬’이라는 독특한 기법을 보여주는 등 새로운 표현 형식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게 관습적 영화에서 탈피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영화의 가능성을 확장하려 했던 시네필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이란 자리의 중심엔 영화를 향한 끝없는 애정이 있었고, 우리는 <400번의 구타> 속의 앙트완을 통해 그것을 볼 수 있다.
누벨바그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국내 영화계에도 있다. 2000년대 초중반의 놀라운 작품들, 산업과 감독의 비전이 혼합되어 좋은 작품들이 탄생한 이후 10년이 흘렀다. <올드 보이>, <살인의 추억>, <달콤한 인생> 등의 영화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때 등장한 감독 이후, 자신의 비전을 새롭게 보여주는 감독이 얼마나 등장했을까. 그들의 영화를 보고 자란, 축복받은 세대엔 작가라 불릴 수 있는 감독이 얼마나 나타났을까. 분명 지금 생각나는 감독들보다 훨씬 많이 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대해진 산업은 그들에게 관심이 없고, 상영관 불리기에 집착하며 관습적인 영화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다시 불러봤다. '누벨바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