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KOKUHO, 国宝)
※ 영화의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의 한 집, 연회로 시끌벅적하던 중 웬 어린 소년 한 명이 등과 얼굴을 흰 물감으로 칠하고 있다. 이 소년의 이름은 키쿠오(요시자와 료/쿠로카와 소야[兒])로, 어리지만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나가사키 야쿠자 타치바나 곤고로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지역 상인들도 괜히 화를 입을까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어느덧 깨끗한 도화지처럼 희게 변한 키쿠오의 얼굴에는 섬세하고도 붉은 화장이 덧칠해지고, 어린 나이에도 성공적으로 가부키 무대를 선보인다.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 곤고로의 옆에는 오사카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한지로는 어린 키쿠오의 생김새와 몸짓, 목소리를 보고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자 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의 재능이 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화장을 지우던 키쿠오가 마치 재롱잔치를 마친 듯 뿌듯함을 느끼던 도중, 갑자기 연회장에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칼로 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곤고로의 야쿠자 세력은 급습을 당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지만, 수장인 곤고로 만큼은 기지를 발휘해 무장한 적을 때려눕히기 시작한다.
화장을 지우다 날벼락을 맞은 키쿠오는 숨죽이며 아버지가 상황을 바로잡길 기대했지만, 수적 열세에 몰린 곤고로는 결국 아들이 보는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나가사키에 눈을 뿌리던 우중충한 먹구름처럼, 아무도 건드릴 수 없던 야쿠자의 아들 키쿠오의 앞날은 알 수 없는 형국이 돼버렸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고아가 된 키쿠오지만, 키쿠오의 가부키 재능을 높게 평가한 한지로는 가족들의 우려에도 당주로서 카미가타 가부키의 일원으로 키쿠오를 받아들인다. 한지로를 반하게 한 만큼 가부키에 재능이 있던 키쿠오는 그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성장했지만, 그럼에도 키쿠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었다.
가부키는 가족 세습의 영향이 강한 문화이기에, 한지로의 아들 오가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코시야마 케이타츠[兒])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가부키 후계자로 육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나이였던 덕에 키쿠오와 슌스케는 같이 학교를 다니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지만, 함께 가부키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재능파 견습생'과 '가부키 가(家) 도련님'이 숙명의 라이벌이 될 것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어느덧 성인으로 성장해 '한한 콤비'를 결성한 두 사람은 가부키 계에 한 획을 그으며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여성 관람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라이징 스타로 우뚝 선 두 사람. 그러던 어느 날 중요한 공연을 앞둔 한지로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된다. 오사카에서 가부키 간판 배우로 분하던 한지로였기에 배역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는 한지로의 자리를 대체해야 했는데, 투자자들과 관객들에게 명분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인 슌스케가 유력했다. 하지만 병상 위 한지로의 입에서는 뜻밖의 이름인 키쿠오의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닌가.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없듯, 한 가부키 공연에서 두 배우가 동시에 하나의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경쟁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이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발화점에 다다른 것인가. 재능과 노력만으로 정상에 오르려 하는 키쿠오, 금수저를 품고 태어났지만 키쿠오의 능력에는 못 미치는 슌스케. 과연 일본 가부키를 대표할 인간 '국보'에는 누가 올라서게 될까.
국내 박스오피스(KOFIC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 11월 27일 기준)를 보면, 1위부터 5위까지 상위권 모두 해외 영화뿐인 형국이다. 그중 5위로 상위권 문턱을 지키고 있는 영화 '국보'는 일본에서 역대급 기록을 쓰던 중에 한국으로 건너온 작품이다.
지난 6월 일본 현지에서 개봉했을 당시 일본인 친구의 적극 추천으로 알게 된 작품인데, 얼마 전 한국 프로모션을 보고 "꼭 봤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라서 극장으로 향하게 됐다. 처음에는 가부키 화장을 한 두 사람이 서 있는 메인 포스터를 보고 일본 전통문화의 색이 짙어 한국인인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로 가득했다. 하지만 175분, 약 3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이 끝난 뒤 모든 편견이 깨지고 감탄과 고뇌가 남았다.
올해 개봉한 영화들 중에서는 'F1: 더 무비'와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기억에 남는데, 영화관을 떠나는 순간 재밌었다는 감정만이 남았던 반면 '국보'는 걸음을 걸으면서도 계속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과하게 평하자면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작품은 '국보'가 처음이었다.
리뷰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떤 격언으로 정리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다음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하늘은 어찌 이 주유를 낳고 공명을 낳았는가"
'삼국지'에서 조조를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간 적벽대전 후, 주유가 죽음을 앞두고 지략으로 우열을 겨루던 제갈량에게 쏟아낸 최후의 통한이다. 각각 지략으로 오(吳), 촉(蜀)을 대표하던 인물이었으나 라이벌 제갈량에게 한계를 느낀 주유. 어쩌면 키쿠오와 슌스케를 각각 제갈량과 주유에 비유하고 싶었다.
슌스케는 오사카 가부키 간판 배우 한지로의 아들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만약 키쿠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순리대로 자연스레 뒤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키쿠오가 그의 아성을 위협했고, 혈연으로 당연하게 이어질 줄 알았던 후계자 자리마저도 위태로워진다. 제갈량이 없었다면 삼국시대 최고의 지략가가 됐을지도 모르는 주유가 그의 출생마저 하늘에 원망했던 것처럼, 슌스케는 재능으로 본인을 뛰어넘으며 본인의 것들을 앗아가려 하는 키쿠오가 늘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슌스케도 어린 시절부터 가부키 교육을 받아왔기에 실력이야 있었지만, 하루도 연습을 거르지 않는 열정과 빈틈마저 없애는 키쿠오의 재능은 슌스케가 가진 혈통의 금빛을 바래게 했던 것이다.
이렇듯 경쟁의 역기능이라면 뒤처지는 사람의 의욕을 꺾는 것이겠지만, 순기능이라면 성장의 동기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슌스케의 후계자 자리가 당연했다면 별다른 노력 없이 어정쩡한 실력으로 한지로가 이룩한 명성에 먹칠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키쿠오의 성장으로 슌스케 또한 성장함으로써 혈연으로도 후계자가 될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게 해 줬다.
무(無)와 유(有), 재능과 혈통의 싸움 속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두 사람. 비록 슌스케의 날개가 유와 혈통이었지만, 그 날개를 꺾은 것도 같은 요인이었기에 안타깝긴 하다.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사실 연민을 느낀 건 슌스케뿐만이 아니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일 수도 있겠다. 왕관의 무게는 '국보'만의 것이 아닌, 주변인들의 몫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국보의 무게'를 가늠케 했던 장면들은 키쿠오가 성공을 위해 악마와 계약한 뒤 이어졌는데, 대부분이 불쾌했다. '국보'가 최고의 자리인 만큼, 등반하려는 자의 고난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고난은 주변 인물과 연결되고 만다.
비록 타락했지만 국보의 날개를 펼친 건 헌신짝 버리듯 버려진 가족이었고, 그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 도구로 전락된 평생의 동반자였다. 신이 아닌 악마와 체결한 국보의 계약은 떠나간 이들의 눈물을 거름으로 마침내 성공한다.
흔히 성공을 위해서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일단 앞으로만 달리라고 한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 국보는 주변을 돌아보지 않으며 앞으로 달리기만 바빴고, 결국 함께하던 사람들은 모두 지쳐서 어느새 사라진다. 이런 점을 볼 때 인간의 삶을 두고 궁극적인 목표가 과연 성공에만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고찰을 하게 된다.
최종 장면에서는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국보'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친다. 현세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잃어 외로운 처지지만 무대 위에서는 한없이 아름다운 국보의 모습을 보면 찬란하고 쓸쓸하다는 표현을 덧붙이고 싶다.
"신에게 빈 게 아니라 악마와 거래한 거야.
모든 것을 버릴 테니 일본의 최고가 되게 해 달라고"
영화 '국보', 한 번 맛보며 그 순간의 감정을 느끼기보다는 수없이 곱씹으며 삶의 본질에 대해 고찰할수록 맛있어지는 영화다.
일본에서는 1천만 관객을 넘기고 22년 만에 역대 일본 실사 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했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아직 힘을 못 쓰는 분위기다. 일본 현지에서도 가부키가 젊은 층이 향유하지 않는 고전 문화이기에 '국보'의 흥행이 미미할 것이라 점쳤다고 하는데, 예상치 못하게 대성공을 거둔 분위기다.
실제로 내가 관람했을 때 극장에는 중년층 관객이 많았었는데, 젊은 층이 봐도, 가부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이해에 전혀 무리가 없으니 만약 낯설어 보인다는 이유로 관람을 고민한다면 주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