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종교를 믿던 그렇지 않던 간에 하느님, 부처님 등과 같은 신이나 초월적 절대자가 우리의 행동이나 과오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거나 언젠가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어려서부터 부모님, 학교, 교회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주입 받아온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권선징악의 도덕을 기본으로 한 사회 규율권력은 우리가 현대의 풍요로운 세상을 누리고 그나마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서로 존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류는 수 천 년 동안 탐욕에 눈이 어두워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과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적자생존의 비정한 경쟁을 일삼아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비록 이처럼 전쟁도 불사하는 약육강식의 경쟁 속에 살고 있지만, 그나마 우리 마음속의 도덕 덕분에 이렇게라도 풍요롭게 살고 있음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선의 삶을 위하여 절대자의 심판을 마냥 기다리기에는 세상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금 당장 내 앞에 처해진 상황에 대하여 즉각적인 정의의 심판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심판자가 된다. 심판자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행위에 대하여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생각은 절대자의 심판을 믿고 의지하고, 심지어 두려워하면서도 사실은 매순간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심판자로 행동하며 살고 있다.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한 사건사고, 배우자나 가족에게 전해들은 이야기, 그리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때로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때로는 직관에 따라 선악을 스스로 심판한다.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내리는 심판이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축구국가대표 경기 그것도 한일전을 한번 살펴보자. 우리에게 한일전은 응원하는 우리나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나 져서는 안 되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이다. 이는 정도차이는 있지만 일본 국민이나 선수에게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설사 심판이 매우 공정하게 판정을 한다 해도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즉 한국 공격 시 일본 수비선수의 방해로 심판이 파울을 선언해도 한국 응원단은 왜 경고를 주지 않느냐고 화를 내고, 일본 응원단은 정당한 수비인데 왜 파울로 판정하느냐 하고 심판에게 화를 낸다. 이 상황이 골 에어리어 안에서 벌어지는 절박한 상황이라면, 양측 선수와 응원단의 판단과 감정은 극에 달한다. 이미 한쪽을 격렬하게 응원하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는 비단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매일 매순간 심판이 이루어지고 그 심판은 절대적이고 완벽하며 합리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의 해답은 다니엘 캐너먼의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 있다. 캐너먼은 우리 인간은 합리적 이성 보다는 직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즉 현대 신자유주의라는 규율권력이 끊임없이 인간의 주관적인 행복을 조작하고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 본성인 욕망이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소속감, 이타심] 보다는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자율성, 이기심]에 무게 중심을 두고 직관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다시 축구경기로 예를 들면, 일본은 우리를 과거 식민지배하고 약탈을 일삼고도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비열한 집단이라는 선입관에 의한 후광효과와 회상용이성 편향에 의한 인지착각, 그래서 독립투사들처럼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는 감정예측오류에 의한 주목착각 등의 직관적 판단으로 착각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비합리적인 우리는 스스로 심판을 하면 안 된다. 이미 너와 나, 그리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 그리고 민족과 국가 간에 일어나는 외교 분쟁과 전쟁의 참상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스스로 심판할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절대자가 임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가? 나는 대안으로 마이클 샌델이 말하는 공동선의 좋은 사회 시스템이 합리적인 심판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스스로 합리성을 회복하도록 노력하여 각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공동선의 좋은 사회를 구축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니 말이다.
* 위 글 ‘우리는 스스로 심판자이다.’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브런치북 “나뚜라”[https://brunch.co.kr/brunchbook/hyunso2]
17화 ‘3.2 가야할 길 : 존엄성_2’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