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이 부른 “꿈”의 가사 일부이다. 요즘 가수 태연이 리메이크해서 ‘웰컴 투 삼달리’라는 드라마의 OST로 불러 재조명되고 있나 보다. 가사 내용처럼 우리는 대부분 꿈을 꾸고, 이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거나 아니면 그저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환희에 휩싸여 교만해지기도 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분노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결국 꿈이, 희망이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데려가기도 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의 꿈은 무얼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이 의도했던 아니던 자신도 모르게 베블런이 말하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핵인싸가 되고, 이를 한껏 누리는 것이 꿈의 기본 토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왕자 또는 공주 등과 같은 부류가 되는 꿈을 꾸고 그렇게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여기서 꿈이 왕까지는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왕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재(?)라는 엄청난 일을 해야 하고 이에 대한 책임도 져야하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소공자, 소공녀 등과 같은 동화책을 통해, 거대한 사회 규율권력을 통해 알게 모르게 왕자 또는 공주를 꿈꾸도록 길들여졌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추겨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소공자, 소공녀를 한번 떠 올려 보자. 주인공이 어려서부터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는 불행이 찾아오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착하게 성실하게 시련을 극복하며 살다보니 결국은 왕자 또는 공주 등과 같은 부류가 되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들은 대부분 스토리 전체의 바탕이 권선징악의 미덕을 강조하고 이를 교육적 교훈으로 내세우는 것으로 보이고 또 그렇게 우리가 배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의도되었든 그렇지 않던 간에 우리에게 결국은 권세와 명예, 부를 마음껏 누리며 낮에는 미술 전시회나 여행 다니다가 밤에는 오페라에 성대한 파티를 즐기며 한량처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왕자 또는 공주를 꿈꾸도록 만들어버린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베블런이 이야기하는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꿈꾸고 사생결단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꿈과 노력이 우리를 오늘날의 풍요로운 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를 신자유주의의 극단적 개인주의로 내몰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유한계급의 꿈”은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노동 계급 등과 같은 일반 서민에 대한 약탈과 갑질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우리 모두는 우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과 타인에게 이용당하는 대상화의 경험을 피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이 굴레에 빠져 허덕이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아서 쾨슬러가 “‘진화의 그릇된 방향’이라고 한탄했겠는가? 내가 유한계급의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삶을 꿈꾸고 산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누군가는 나를 위해 일하는 삶을 살아줘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두 가지 ‘소속감과 자율성’ 중에서 소속감은 도외시하고 자율성만을 추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행복, 즉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서 ‘좋은 사람과 함께’가 결여된 부조화,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사람과 함께’이다. 600만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위대한 유산, 상부상조의 평등사회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내가 존엄하면 남도 존엄하다. 따라서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유위도식(有爲徒食)의 현재를 기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라마르크의 용불용설(用不用說)을 배웠다. 생물이 살아 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사용한 결과로 획득한 형질은 점점 진화하고 심지어 다음세대에 유전되지만, 사용하지 않는 형질은 결국 퇴화한다는 이론 말이다. 이 용불용설 중 획득한 형질이 유전되어 진화한다는 내용은 현대 진화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형질이 퇴화한다는 것만큼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우리가 현실 생활에서 똑똑히 경험하고 있다. 골절상을 당해 깁스를 수개월하다 풀었을 때 근육이 퇴화하여 재활이 필요했던 경험, 당뇨 환자에게 인슐린을 주사하면 췌장의 기능이 퇴화하여 인슐린 분비를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경험 말이다. 사용하지 않는 형질은 퇴화한다는 용불용설(用不用說)은 우리의 삶이 무위도식(無爲徒食)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유위도식(有爲徒食)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의 꿈에서 깨어나라.
우리는 유위도식(有爲徒食)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불교 반야경 <사여게>의 가르침, ‘우리의 의식이 해석한 삶은 일장춘몽이요 환영에 불과하니 두려워할 것도 없고 애착과 집착을 할 것도 없으며, 그저 거품이요 그림자에 불과하니 헛된 것, 거짓에 속지 말라.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아침 이슬처럼, 번개처럼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제대로 살피고 깨달아라.’를 되새겨, 무위도식(無爲徒食)의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자. 그렇다면 유위도식(有爲徒食) 그리고 ‘좋은 사람과 함께’의 전제는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아닐까? 자비롭고 화기애애한 표정과 미소 짓기, 부드럽고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기,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말하고 칭찬하기,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대하기, 몸을 움직여 주변을 보살펴 주기, 겸손하게 자리를 양보하기, 잠자리 살펴주기의 7가지는 우리가 실생활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좋은 사람과 함께’의 좋은 규범이라 생각한다.
이제 ‘좋은 사람과 함께’도 생각하자.
우리 뇌의 생존전략인 직관오류 중 주목착각에서 벗어나자. 나에게 ‘좋은 사람’이 언제나 나를 보살펴주고 베풀어 주는 마니또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꿈을 꾼다면, 상대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상전이다. 이러한 감정예측오류의 꿈에서 깨어나 합리적 이성을 회복하자.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고, 대화는 설득이 아니라 들어 주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고 상대가 공감하지 않는 가치에 몰입하면 착각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