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가 대통령이 되면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가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검사 대통령은 자유를 외치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말았다.
유리잔에 물이 채워지면 넘쳐서 낙수효과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윗사람들이 마법을 부려 유리잔을 키워 버렸다.
‘법대로’만 외치면 싸움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싸움은 변호사만 양산하고,
오히려 정치•사회적 양극화의 골을 더 넓혀 버렸다.
가축 농장을 공장처럼 운영하면 효율이 좋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신종 전염병으로 가축을 집단 살처분하고 말았다.
정상에만 오르면 다 되는 줄 알고 땀 흘려 올랐다.
그러나 정상의 기쁨은 순간이고 내려가는 길이 그만큼 길었다.
대학 정원만 증가시키면 공교육이 정상화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사교육이 오히려 날개를 달아버렸다.
전용도로 하나 더 건설하면 쌩쌩 달릴 줄 알았다.
그러나 교통체증은 변함없고 오솔길만 잃어버렸다.
맥주 한잔만 하면 갈증이 해소될 줄 알았다.
그러나 갈증은 오히려 맥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다 비워내면 여유로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보다 더 많은 삶의 열정도 식어 버렸다.
지옥을 없애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어디가 천국인지,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모르게 되고 말았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역설이 존재했다.
그렇다.
사람들이 평화를 간절하게 갈구하면서 살지만
막상 평화가 찾아오면 권태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사람들이 편리함을 당연하게 추구하면서 살지만
막상 편리함을 누리다 보면 나태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맞다. 모든 것에는 역설이 생겨난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평화, 정의 등을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현대 철학자 미셀 푸코를 만나게 된다. 푸코는 “본질이나 중심을 기반으로 형성된 철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기준이 돼 결국 이 사회를 구분하고 배제하며 억압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서양 철학을 기본으로 교육받은 우리는 모든 것의 본질을 규정하며 살아간다. 예를 들면 누군가 선(善)을 규정하면, 그 선의 규정 범위 안에 들어가지 않은 나머지는 악(惡)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회가 본질을 규정하면 이것이 소위 규율 권력이 된다.
푸코가 아주 오래된 현자 노자를 소환하였다. 노자는 말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하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천하의 모든 사람이 선한 것이 선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다.
우리의 ‘아름답다’라는 기준은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해 왔다. 십수 년 전 자신의 사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절대 본질을 규정할 수 없다. 선과 악, 행복과 불행, 평화, 정의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제행무상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살이에는 정답이 없다. 매번 적합한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철학자 사르트르의 지혜를 생각해야 한다. 나와 인연을 맺는 사람도, 세상도, 심지어 바위조차도 즉자가 아닌 대자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심지어 나조차도 변화하고 있는데, 사랑이, 행복이, 평화가 영원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역설이다.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과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에 매달려서
어리석게도 이들에 빠져들어 집착할 뿐 아니라
이에 의해 만들어진 성과가 영원하길 바라는 것에 집착하면
고통의 늪에서 헤맬 수밖에 없다.
추수의 행복은 로또 당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잡초 무성한 황무지를 피땀 흘려 가꾼 결과가 행복한 추수인 것이다.
인생엔 정답도, 비밀도, 공짜도 없다.
그러니
바로 지금, 매 순간을 즐기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