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 앉아 산수를 감상하다 무심코 어릴 적 학교에서 따라 부르던 노래가 불쑥 떠올랐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산천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
밤은 지나가고 환한 새벽 온다. 종을 크게 울려라.
멀리 보이나니 푸른 들이로다. 희망의 나라로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
곡이 신나기도 했지만 배고팠던 시절에 초콜릿 던져주는 미국 군인들이 사는 나라, 왜놈이라 욕하긴 했지만 우리 보다 잘 살아서 부러웠던 일본이 “희망의 나라”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름 선진국이라 어깨 뽕 들어가고 문화 강국이라 칭하며 그 시절 “희망의 나라” 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는데, 여전히 “희망의 나라”는 바다 건너 저 만치 떨어져 있다. 왜?
우리에게 “희망의 나라”는 산천경개 좋고, 풍요로우며, 자유•평등•평화•행복이 가득 찬 유토피아이다.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천국이요, 극락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틈만 나면 하느님께, 부처님께 기도에 매달린다. 그저 나, 내 가족만 중요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꼭 “희망의 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갈구한다.
우리는 “희망의 나라”라는 결과만 중요하다. “희망의 나라”를 가려면 험한 바다 물결을 건너야 하고 어두운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온다는 가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호들갑을 떨면서도 정작 꽃을 피운 뿌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데, 무위도식하기만을 꿈꾸며 살아간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에게 모이 줄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어두워 잡아먹어 버릴 생각을 한다. 예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정확하게는 천국 가게 해달라고) 기도만 열심히 한다. “희망의 나라”에 가고 싶으면 먼저 험한 바다 물결을 건너야 한다. 예수님이 알려준 주 기도문을 한 번 살펴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 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 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 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오 6:9~13>
천국(아버지의 나라)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천국을 이 땅으로 뚝딱 옮겨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이 땅을 천국의 모습으로 만들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부처님도 자신의 가르침대로 수양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실천함으로서 스스로 성불하라는 것이다. 기도만 한다고 뚝딱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대로 거피취차(去彼取此), 저것(천국, 결과)을 버리고 이것(속세, 지금)을 취하자. 천국을 바란다면 지금 내가 사는 이 땅이 천국이 될 수 있도록 예수님, 부처님, 공자, 노자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며 살자. 예쁜 꽃이 피기만 기다리지 말고 뿌리에 물도 주고 거름도 주는 노력을 하자. 언제? 바로 지금. 흘러간 과거와 맞닥뜨린 현재는 내가 바꿀 수 없다. 이미 결정되어진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지금 내가 원하는 미래를 위한 원인을 만들 수는 있다. 초석을 하나 씩 쌓을 수는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카르페디엠 (Carpe Diem)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