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다가가는 것이다.

by 이성룡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기독교의 십계명 중의 하나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대전제는 예수의 십자가로 상징되는 희생이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유가경전에서는 살신(殺身) 그리고 도가에서는 외기신이신존(外其身而身存)을 외친다. 아마도 우리네 인간의 사유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요구하고 있는 핵심 공통사상이 “자기를 내 던지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우리네 인간은 최소한 수천년 이상을 이러한 사랑의 경전을 외치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사랑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할까? 왜?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치고 살고 있는 우리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우주는 스스로의 에너지에 의해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 노자 해설서를 쓴 왕필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땅은 짐승을 위하여 풀을 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짐승은 풀을 먹는다. 또 사람을 위하여 강아지를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강아지를 잡아먹는다. 이와 같이 천지가 만물에 대하여 조작함이 없으면, 만물은 제각기 그 쓰임을 얻을 뿐이다......” 그렇다. 대자연속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 갈 뿐이다. 누구를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생태계를 적정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순환한다. 이들은 냉장고가 없다,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취한다. 그러나 이 자연의 에너지를 활용할 줄 알게 됨으로써 이들 Eco-chain의 정점에 서게 된 우리 인간은 다르다. 냉장고가 필요하다. 금고가, 창고가 필요하다. 당연히 자연 생태계뿐 아니라 동족끼리도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한다. 인간이 오늘날의 문명을 이룩하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을 무참히 파괴해왔다. 우리네 인간은 자연생태계의 최정점에서 온갖 특혜를 다 누리면서도 우리의 욕심은 한이 없는 것 같다. 자신의 창고에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세습까지 한다. 아버지가 왕이면 아들도 왕이고, 아버지가 부자면 아들도 부자다. 자연의 삶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산다.


내 생각에 우리네 인간은 만물의 영장 맞다. 똑똑하다. 우리가 이 세상을 계속 영위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우리네 종교가 이야기하는 사랑이다. 문명화를 위해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한 반 문명화의 반동으로 사랑이 필요했다. 논리의 비약인가? 그냥 내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 인간이 이제까지 고안하고, 만들어내고, 생각해낸 것 중에 사랑은 가장 멋지고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긴 하지만, 사랑은 자연스러운 우리의 본성이 아니고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따르기가 어렵다. 적어도 나한테는.... 공부 많이 한다고 사랑도 잘 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아마도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사랑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자기의 의지에 의해서 사랑을 하기 때문에 대상을 소유하려하고, 지배하려한다. 각자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아파하고, 갈등하고, 두려워한다.


우리 인간의 문명세계가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에겐 사랑이 필요하다. 우리의 세상을 영원토록 유지(天長地久)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겐 사랑이 절실하다.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생태계의 적자생존의 모습 보다는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자연생태계의 사랑의 모습을 끊임없이 모델링 해야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적어도 나에겐 이를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도를 통하고, 해탈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성인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자위도 해본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마음이 개운치 않다. 도는 몰라도 덕이라도 쌓아야할 것 아닌가? 그래 생각해낸 것이 사랑의 테크닉이다. 비록 사랑의 에너지는 성인에 감히 비교할 수 없이 작지만 받는 상대의 체감 온도를 증폭할 수 있는 테크닉이 있다면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자연의 법칙 중에, 극이 다른 전하사이엔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작용하는데 그 크기는 전하의 크기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쿨롱의 법칙이 있다. 물론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랑의 크기가 기본적으로 크면 당연히 사랑의 에너지는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같은 크기의 사랑이라도 상대에게 지금의 절반거리로 다가간다면, 사랑의 에너지는 두배가 아니라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4배로 늘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단위 면적당의 빛의 밝기인 조도(Lux) 또한 같은 광도의 빛일 때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사랑의 빛 또한 상대에게 절반만큼만 다가가도 그 세기는 두배가 아닌 4배가 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거리를 줄이기 위해 상대에게 다가가는 속도는 어떨까? 같은 질량의 물체가 일정 속도로 운동할 때의 운동에너지도 그 속도의 제곱에 비례한다. 비록 우리가 수양이 덜 되어서 충분한 사랑의 에너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상대에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에너지를 최소한 제곱으로 증폭 시킬 수 있다.



맞다. 사랑은 다가가는 것이다. 아니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상대에게 사정없이 달려가 나를 던지는 것이다.

그냥 무조건 던지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상대에게 조금 다가가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keyword
이전 29화생이불유(生而不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