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십칠년전 2007년 1월을 보내면서 떠오르는 단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내 컴퓨터의 다락방을 들락거리다가 어릴적 보물 찾듯 우연히 이 글을 발견하였다. 낡은 앨범에서 추억을 떠올리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에도 서산에 기우는 지금의 생각과 그리 다르지 않음에 한번 놀라고, 그 동안 무얼 했길래 "제대로 실천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또 한번 놀랐다. 수십년에 걸쳐 책도 더 읽었을 것이고, 경험도 더 쌓았을텐데 말이다. 갑자기 고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 생각났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 오는데 70년이 걸렸다."
4~5년 더 숙성하면 가치관대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 처음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왠지 모를 야릇한 설렘과 열정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여느 때와 다를 것도 없는
일월 일일의 일출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왔지요.
이렇게 50여년을 반복하던 연례행사를
이천 칠년 일월일일에는 그냥 여느 날처럼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기말고사 마치고 한 학년 진급하는 학생 같은
설렘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청소하고 소박한 소망을 생각해 보았지요.
일년 반쯤 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을 합시다. 우리 모두...”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젠가 읽었던 글 중에 “시간관리 매트릭스”라는 게 있었습니다.
이에 의하면 우리의 활동 영역을 “긴급함”과 “중요함”이라는
2가지 기준을 가지고 다음 4개의 상한으로 나눈 답니다.
1 상한: 긴급하고 그리고 중요한 일
2 상한: 긴급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일
3 상한: 긴급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
4 상한: 긴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여기서 1, 3, 4 상한이야 상황대로 당연히 대처 할 테니까
나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항상 이상한 일입니다.
비전을 세우는 일, 독서,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노후 설계, 건강관리 등이겠지요.
그런데 1 상한 또는 4 상한 일 때문에 이걸 항상 미루기 십상이지요.
이런 우화가 있다지요?
어느 날 나무꾼이 숲에서 나무를 베는데...
도끼날이 무뎌져서 그 속도가 자꾸 줄어 가고 있었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안타까워 “도끼를 갈아보지 그러세요.” 했더랍니다.
그랬더니 나무꾼 왈 “시간이 없어서...” 라고 했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스티븐 코비는
“여러분은 운전하느라 바빠서 주유소에 갈 시간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는데...
아무리 바빠도 때 되면 주유소는 가야 되고, 도끼도 갈아야 되지요.
나는 올 일월에도 여느 때처럼 이상한 일에 대하여 생각을 했지요.
특히 장․단기적으로 내가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물 흐르듯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물은 항상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갑니다.
흐르다가 길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기다립니다.
때가 올 때까지....
결국에는 대부분 바다에 도달하지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바다에 못가는 친구도 있지요.
가다가 장애물을 만나 웅덩이가 된 친구도 있고
운 좋은 친구는 호수가 되기도 하지요.
때로는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양수기에 멱살 잡혀
높은 곳으로 끌려 올라가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들도 때가되면 낮은 곳으로 흐를 거고
언젠가는 바다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물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를 못 만난 어떤 친구는 웅덩이에서
처절하게 악취를 참아가며 주변 부유물들이 잘 썩도록 도와주지요.
불평(?)한마디 없이...
물이 없으면 낙엽이 썩지 않고
낙엽이 썩지 않으면 생명의 근원인 유기물이 태어나지 못하지요.
또 어떤 친구들은 각종 식물들의 뿌리에 빨려 들어가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요.
그들은 심산유곡을 출발할 때, “나의 목표는 바다야”라고
굳은 소망과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지요.
소망을 이룰 때 까지 매년 반성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렇진 않지요.
그냥 낮은 곳으로 흐르지요.
그리고 결국에는 대부분 바다에 도달하지요.
바다에 간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웅덩이의 탁한 물과 바다의 맑고 푸른 물이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물이라는 본질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지요.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형태로 있든
그들은 그냥 그대로 물이지요.
그리고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웅덩이의 탁한 물이든 바다의 맑고 푸른 물이든
언젠가는 똑같이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또 심산유곡에서 재잘거리며 흐르게 될 겁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직역하자면,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라. 그리고 뜻을 굽히고 뼈대를 튼튼하게 하라.”
뭐 이런 뜻인가?
나는 지금도 이 말뜻이 정확하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앞에서 언급한 물의 개념으로 해석해보자면
“배가 고프면 밥 먹고, 배가 부르면 더 먹고 싶더라도 거기서 중단해라.”
이런 뜻 같습니다.
물의 일생처럼 내 뜻, 내 의지, 내 욕심에 의해 움직이지 말고
하느님, 부처님, 또는 자연이 보기에 합당하게 움직여라.
소위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 처럼....
일월을 보내면서....
새해 가졌던 소망을 점검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 대신
소망에 대한 궤도를 수정해 보렵니다.
바다를 꿈꾸고 바다를 가기위해 열심히 노력했더니
마침내 바다에 왔습니다가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보니 어느덧 바다에 왔네....
이렇게 말이지요.
저 심산유곡에서 재잘거리는 물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