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꼬리를 찾아서... “1.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든 그냥 음식을 먹으며 살든 어떻게 살아가든 기본적으로 살아가면서 자율성과 소속감이라는 두 가지 요구가 충족되길 요구하고 원한다. 지금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눈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이 중 “자율성”에 해당한다. 스스로의 생존 본능인 욕심이라는 감성을 기본으로 이것이 비전이 되었든 탐욕이 되었든 만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이고 자신의 “자율성”의 문제이다. 우리는 앞에서 음식을 먹되 기왕이면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이제 우리는 나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공동체든 소속되어 소속감을 가지고 함께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이다. 우리 삶의 두 번째 요구 조건인 “소속감”을 바로 “좋은 사람과 함께”가 충족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공동체에 소속되어 소속감을 충족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만 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든 그냥 음식을 먹든, 만족을 하던 하지 못하든 나의 행복을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기 시작한다. 비교 대상이 생긴 것이다. 설사 내가 이미 행복하더라도 누군가 나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면 내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행복해지는 상황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합리적 이성을 불러올 필요가 생긴다. 생각해 보자. 우리 하나하나는 인간으로서 존중 받아야 할 존엄한 존재이다. 이와 동시에 저마다 다른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에 따라 각자 능력과 개성이 서로 다른 존재이다. 이 차이를 개성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여서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를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각자 자신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살아가다가 만약 누군가 더 맛있고 더 좋은 음식을 더 많이 가졌다면, 이것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의 행운도 있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지혜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맛있는 음식을 먹되 혼자만 먹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게 먹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류의 초창기에는 다른 사람은 어떻든 나 혼자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었다. 옹기종기 모여 함께 채집하고 함께 사냥해서 함께 나누어 먹으며 살았다. 이때는 “맛있는 음식”의 자율성 보다 “좋은 사람과 함께”의 소속감에 비중이 더 실려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불과 도구”를 이용하게 되면서부터 농업 생산력이 급증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사유재산이 생기고 이것이 권력으로 작용하게 되면서, “좋은 사람과 함께”의 소속감 보다는 “맛있는 음식”의 자율성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기 시작하였다. 아니 갈수록 자율성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시대로 빠져들면서 본격적으로 각자의 능력에 따른 적자생존의 무한경쟁 시대를 열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 자율성이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고 지금의 분에 넘치는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반면에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를 헤매게 하고 우리의 보금자리인 자연 마저 파괴하면서 사는 고통도 가져다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지난 수천 년 동안 탐욕의 하느님이 되겠다고 바벨탑을 쌓고 또 쌓았는데, 여전히 그 자리여서 아등바등 계속 쌓기를 반복하고 있다. 마치 어릴 때 무지개 쫓아 아무리 달려가도 무지개는 여전히 저만치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강아지 꼬리잡기처럼 말이다.
이제 행동경제학자 스키델스키의 “How Much is enough?”를 생각해야 될 때이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가 우리 인간의 주관적인 행복을 조작해서 끊임없이 탐욕을 부추기는 것에 속절없이 당하고 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너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있어? 다른 사람과 비교해봐? 너도 가져야지”하면서 우리를 탐욕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만족할 수 없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그러니 그동안 경시했던 “좋은 사람과 함께”의 소속감을 회복하여 “맛있는 음식”의 자율성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보자. 이를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키델스키의 다음과 같은 제안을 긍정적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이 제안은 구성원 모두가 자본의 탐욕에 유혹당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7가지 기본재(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를 사회가 보장할 수 있도록 서로 노력하자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7가지 기본재를 기본적으로 누리고 살 수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유혹하는 탐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적자생존의 무한 경쟁이 아닌 화이부동의 지혜가 자리 잡을 여유 공간이 생기지 않겠는가?
물론 우리 개개인이 사회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스키델스키의 7가지 기본재를 보장해주는 정책을 원하고 요구한다면, 국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동시에 우리 각자가 “맛있는 음식”의 자율성과 “좋은 사람과 함께”의 소속감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균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각자 노력하고 실천하면 어떨까? 지금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진정한 행복을 위한 우리의 실천 내용을 정리해보자.
Step 1. 내 능력의 한계 파악하기
선천적인 재능과 능력을 파악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인 다음,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비전을 설정하자.
Step 2. 설정된 비전에서 20% 덜어내 80%로 비전 재설정
파레토 법칙을 믿어보자. 이는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100% 결과를 얻기 위해 요구되는 총 시간의 20%를 투입하면 목표의 80% 성과를 거두고 나머지 20%의 성과를 위해 80%의 시간이 요구된다는 경제학법칙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비전을 20% 덜어내 80%로 설정한다면 우리는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당초 계획 보다 20% 정도의 시간과 노력만이 필요할 것이니 만족을 위해 행복을 위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다. 게다가 나머지 80% 정도의 시간을 가치 있는 일이나 봉사, 워라벨 등을 위해 사용하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산다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Step 3.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자.
실현 가능한 비전을 설정하고 최선의 노력을 한다 해도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에 따른 영향은 피할 수 없다. 이에 따른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미 일어난 상황을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하고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로 대한다. 그리고 주변 상황을 자기주도적으로 통제하고 주변 사람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우리가 위 실천 사항을 적절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강아지 꼬리잡기의 탐욕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즉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진정한 행복은 아닐지 몰라도 최소한 행복이 목적이어서 쫓아가는 삶이 아니라 성실하게 살다보니 행복이 저절로 따라오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