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들은 행복할 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댄다.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강아지는 너무 사랑스럽다. 어느 날 강아지가 어마어마한 깨달음을 얻었나 보다. 강아지가 고개를 돌려 꼬리를 잡으려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 “저 꼬리가 행복임에 틀림없어. 그러니 꼬리만 잡으면 난 항상 행복할 수 있을 거야.”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머리를 뻗어 꼬리 쪽으로 달려들면 어느새 꼬리는 저만치 멀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는 꼬리를 잡으면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오늘도 강아지는 행복을 찾아 뱅글뱅글 돌고 있다. 행복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강아지 꼬리잡기 인가? 사실 꼬리는 이미 강아지에게 있고, 자기 일을 하다보면 구태여 쫓아다니지 않아도 강아지를 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안다. 그래서 우리는 뱅뱅 도는 강아지에게 혀를 쯧쯧 차며 그만하라 혼내기도 하고, 힘들게 그럴 필요 없다고 품에 안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만물의 영장인 우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삶의 목적이다.”는 철학적 선언을 받아들이고 각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마치 어릴 때 들판 저쪽에 떠있는 무지개를 잡아 보겠다고 기를 쓰고 쫓아다닌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의 목적은 하나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후죽순처럼 끝없이 솟아 나온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목적을 다 달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달성한다 하더라도 또다시 그 보다 더 큰 목적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달성할 때까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우리가 이렇게 수천 년을 살아보니 “이것이 강아지 꼬리잡기”와 뭐가 다르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내놓은 결론은 “행복은 더 큰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인 욕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쾌감이고 행복일 뿐이라고 하면서 “행복은 좋은 사람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한마디로 선언 해버린 것이다.
현대 진화심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음식을 먹는 것”은 한마디로 “만족”이다. 우리가 거친 숲속을 헤매며 사냥을 하고 한여름 뙤약볕에 땀 흘리며 농사짓는 이유는 먹는 쾌감 때문이며, 이 쾌감을 만족시키는 것이 우리의 생존 본능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만물의 영장이 되고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사는 원동력이 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는 과음과식으로 건강을 해치고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어버렸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인 욕심이라는 감성에만 맡겨 둘 것인가? 만물의 영장인 우리가 갖고 있는 훌륭한 자산인 합리적 이성이 이제 제 역할을 해야 할 때이다. 여기서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건강과 안전”은 감성의 영역이요,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이를 만족시키는 것은 자신은 물론 공동체인 사회가 함께 보장해야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넘어서 “더 먹고 싶은 것”이 각자 개인의 자아실현 영역으로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활약 해야만 되는 영역이고 노자의 지족자부(知足者富)의 지혜를 교훈삼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노자의 지족자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그냥 현실에 만족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족자부의 지혜를 실천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능력을 겸손하게 파악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즉 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탐욕인지, 이룰 수 있는 비전인지를 겸손한 마음으로 파악한 다음, 탐욕은 침착하게 걸러내고 비전은 용기 있게 실천하는 합리적 이성의 노력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미치는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에 굴하지 않고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선천적으로 운동에 재능이 없는데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덤비는 것이 탐욕이니, 이러한 탐욕은 과감하게 버리고, 스스로 즐겁게 잘 해낼 수 있는 재능을 찾아내고 정확한 능력을 파악해서 이에 맞게 목표를 정하는 것이 비전이다. 한마디로 비전은 본능적으로 샘물처럼 솟아나는 수많은 욕심 중에서 내 능력의 한계를 넘어 섰거나 이미 갖고서 더 가지려는 탐욕을 지혜롭게 걸러낸 욕심이요 실현 가능한 목표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지혜로운 비전을 설정하고 세상을 살아가도 우리는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에 따른 화살은 피할 수 없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갑작스럽게 날아온 돌에 맞아 낭패를 볼 수도 있고, 느닷없이 눈앞에 황금덩어리가 굴러들어올 수도 있다. 이처럼 첫 번째 화살은 고통과 재난일 수도 행운일 수도 있지만, 우연에 의한 것이어서 내가 능력이 있다고, 노력한다고 피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피할 수 없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은 후 적어도 이로 인한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도록 노력할 수는 있다. 돌을 맞았다고 재수 없다고 화내고 울고불고하면서 누군가를 탓하며 싸우는 것이 사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또 행운의 황금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다고 어설픈 투자나 방탕한 생활로 거들먹거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화살이니 자청해서 맞지 말고, 합리적 이성에 의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로 이를 지혜롭게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 능력의 한계를 지혜롭게 파악하고 이에 맞는 비전을 실천하며 어떠한 선천적, 문화사회적 우연에도 굴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냥 “음식을 먹는 것”의 일시적 만족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의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계속해서 “2. 좋은 사람과 함께”가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