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6월 1일자 기사 제목이다. 인기 있는 티브이 연예 프로그램에서 한 연예인이 반려돌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몇 번 보여주더니, 이렇게 주요 일간지의 기사에 까지 버젓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반려돌이 장안의 화제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기사 내용에 지난 4월 네이버 ‘반려돌’ 검색 횟수가 4만 900건으로 전월에 비해 105%나 급증하고 인스타그램의 ‘#반려돌’ 관련 게시물 수가 2000여개에 달한다니 말이다. 실제 반려돌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도 있다. 그들은 돌에 옷을 입히고 밥과 물을 주고 모자와 선글라스 씌워 산책하고 목욕시키고 향수도 뿌려 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돌과 함께 출퇴근을 하고 사무실 책상위에 앉혀 놓고 일을 하고, 심지어 돌에게 고민을 토로 하거나 즐거운 일을 나누는 등 대화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사람을 좋아하든,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좋아하든, 심지어 돌을 좋아하든 각자의 개성이고 자유이니 함부로 판단하고 언급할 사항은 분명 아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긴 하지만, 무생물인 돌에게 밥도 주고 대화도 한다니 먹이를 앞둔 사냥개의 침처럼 호기심이 흘러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반려’라는 사전적 의미는 짝이 되는 동무 즉 동반자이니 말이다. 사람이 돌을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살아간다니 나로선 매우 의아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호기심 천국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려돌을 키우는 사람들을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본격적으로 반려돌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이해해 보고 싶은 것이다.
기사에서 심리학자 최인철 서울대 교수는 “돌은 내 삶을 100% 받아 주고 내 마음을 거부하지 않는다.”며 “자기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자극이 아닌 대상으로까지 애착 관계를 확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더하여 신정수 교수는 “관계 속에선 갈등과 상처가 생기기 마련인데, 돌은 상처를 주고받을 일이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싶은 대상이 한마디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대상을 원한다는 의미이다. 즉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언제나 따뜻하게 다 받아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그런 대상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정상적이고 평등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극심한 빈부 격차나 노예제에 의한 주종관계와 같은 극단적인 예를 제외하고 말이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동물인데,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자율성과 소속감 두 요소 중, 소속감 보다는 자율성만을 강조하는데서 발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자신은 자신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고 싶어 하면서도 이에 반하는 상대의 자율성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해 상대가 자신을 언제나 전폭적으로 받아주길 바라는 일방적인 이기심이 바로 이 문제의 발단인 것이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성과위주의 극심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갈등과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삶은 더욱 힘들어 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노력과 에너지는 최소화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상처는 주지 않는 대상을 불나방처럼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과 관계를 맺는 모든 대상이 인자한 엄마처럼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이를 요구하며 갈등과 상처를 만든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해야하는 사람보다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관계 형성을 할 수 있는 반려동물·식물 등에게서 위안을 삼으려 하는 사람이 급속하게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또한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동물이어서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고 따르지 않는다. 소파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대소변 등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다반사인 것이다. 이에 상처받은 우리는 자율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식물에 관심을 보이지만 반려식물 또한 자신의 컨디션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보살펴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자신과 대등하지도 자율적이지도 의무적인 보살핌도 필요 없는 무생물인 돌을 반려로 삼기에 이른다.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지칠 대로 지치고 깊은 상처를 입은 현대인들이 반려를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의무마저 요구하지 않는 무생물에게 위안을 삼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관계는 대상이 사람이든, 반려동물·식물이든 간에 자신과 대상 간에 쌍방향의 관심과 사랑이 오가야 한다. 하지만 돌은 일방통행이다. 돌은 요구하는 것도 말썽을 피우지도 않으니 상처받을 일도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할 때 자신의 방식대로 보살펴주고 자신이 필요할 때 자신의 방식으로 위안을 받으면 된다.
우리 사회의 모두가 반려돌에게서 위안을 받고 상처를 치유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쌍방향의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는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동물이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지옥이 되어 버리진 않을까?
문제의 본질은 소속감을 소홀히 하고 자율성만을 강조하는데 있다. 자율성만을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고 보장할 수 있지만 필연적으로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을 피할 수 없다. 이를 보완하려면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그동안 소홀히 하였던 소속감을 복원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삶의 필수요소인 자율성과 소속감이 균형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계승하여 이를 현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교육기본법 제2조)으로 삼아 살아가는 민족 아닌가? 우리의 교육이념처럼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자율성에 상응하는 소속감을 복원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자신의 자유와 존엄성이 중요한 만큼 상대의 자유와 존엄성이 중요함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에게 자신의 삶의 100%를 다 받아주고 자신에게 갈등과 상처를 주지 않도록 요구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대와의 공감을 통해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는 쌍방통행의 관계를 위해 노력하도록 하자. 이처럼 나만이 아닌 함께의 가치를 복원하는 것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을 구현하는 것이요 공동선의 좋은 세상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돌을 사랑하면 토테미즘이고, 사람을 사랑하면 휴머니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