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도 천국을 꿈꾸고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리는 천국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호기심에 천국의 이미지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shutterstock”에서 많은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더군요. 그중에 몇 개를 골라 보았습니다.
[사진] 천국의 이미지 [출처 : Shutterstock]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꿈꾸는 천국의 모습과 비슷한가요? 아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리가 꿈꾸는 천국의 이미지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단어는 빛, 밝음, 봄, 행복, 생명 등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반대인 지옥은 어떨까요?
[사진] 지옥의 이미지 [출처 : Shutterstock]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에서는 불, 불에 타 사라짐, 고통, 죽음 등이 연상됩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따뜻하고 맑은 봄날, 아름다운 꽃들이 있는 곳에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천국이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노역의 형벌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고, 종교가 없더라도 악을 피하고 선하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논리의 비약인가요? 어쨌든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도덕의 프레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 내던 지간에 교회와 절에 열심히 다니고 헌금 많이 내고 천국가게 해달라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우리는 왜 이렇게 도덕을 직접 실천하며 살기보다는 점점 더 기도에만 매달리며 사는 것일까요? 그 첫째 이유는 우리가 바라는 천국이 우리의 인식 저변에 깔려있는 “무위도식의 꿈”의 끝판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국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명확해집니다. 빛, 밝음, 봄, 행복, 생명 등 평화로움은 결국 무위도식하면서 풍요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감나무 밑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더한 둘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인식이 세상을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완벽하게 평화로운 천국과 그와 정 반대인 온갖 혐오와 절망으로 가득 찬 지옥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으로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단 한 번의 심판으로 천국 아니면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 상황에서는 절대자의 심판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실제 무언가 행동하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도하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에 절대자에 과도하게 의지하고 기도에 매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도덕 프레임이 우리를 만물의 영장으로 그나마 여기까지 함께 살아가도록 하는 원동력이 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당초 좋은 의도와 달리 우리의 편의에 의해 기복 신앙, 구원 신앙의 형태로 변질되어 본질인 도덕의 실천은 게을리하고 상대적으로 쉬운 기도에만 매달리는 부작용이 문제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절대자의 원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과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르침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예수의 가르침
예수님은 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설파했습니다.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하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0>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도덕적 지침을 내려 주었습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정의롭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요,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는 어떨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오 6:9~13>
위에 보인 주의 기도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입니다. 어디를 살펴보아도 우리에게 건강과 부, 행복, 심지어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뜻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과 이 주의 기도를 연계해서 보면 자기만을 위한 욕심으로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고 천국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매사에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서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에서와 같은 천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에서 주의 은총으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은 뒤에 천국가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천국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떨까요?
부처의 가르침
부처님은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살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통과 괴로움을 소멸하고 완전히 평온한 상태인 열반(Nirvana)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른바 불교의 핵심사상인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 즉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를 말합니다. 먼저 고성제는 인간의 모든 고통, 즉 생로병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등을 말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이 집착에 있음을 깨닫고 갈애(그치지 않는 갈증, 갈망)를 내려놓으라는 가르침이 집성제입니다. 어떤 현상의 원인을 소멸하면 결과도 소멸되는 법, 고통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하면 고통도 소멸되어 완전한 평화인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멸성제입니다. 이렇게 집착을 버리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깨달아도 이를 실천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위한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이 도성제입니다. 도성제의 핵심은 팔정도(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로서 이는 매사에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노력하고, 바른 신념을 가지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고 수행하라는 인류 보편의 가르침입니다.
어떻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팔정도를 제대로 수행하면 고통의 원인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깊은 고요와 적막상태인 열반과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방법만 다를 뿐 예수님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죽은 후, 극락(천국)을 가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도덕적 선(팔정도)을 실천하며 살다 보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자연스럽게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들어 바로 지금 이 현실이 극락이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열반에 들면 당연하게 죽은 후에도 극락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도, 부처님도 모두 도덕적 선을 수행하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르침의 본질을 망각하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장 손쉬운 기복 신앙의 기도에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욕심꾸러기들에게는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이에 대한 보상인 천국은 지금 당장이 아닌 먼 훗날 죽은 뒤의 일이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우리에게는 만능 쿠폰이 있습니다. 어릴 때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엄마에게 응석 부리고 졸라대면 들어주던 경험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응석의 기도입니다. 그저 예수님에게 부처님에게 원하는 것을 요청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도, 부처님도 원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핵심은 우리의 인식 속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무위도식의 꿈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모습처럼 말입니다.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속전으로 주려고 온 것입니다. <마가 10:45>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이유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김 받으려고, 무위도식하며 군림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천국은 풍요롭게 무위도식하며 누군가에게 군림하면서 섬김 받으며 사는 곳이 명확하게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도덕적 선을 실천하며 섬기면서 살아가는 곳입니다.
먼저 섬김 받으려는 무위도식의 꿈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를 사랑하도록 강요하지 맙시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합시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도덕적 선을 실천하고 서로 섬기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천국을 바로 지금 이 땅에 건설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