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화살
제주에 내려와 처음 맞는 맑은 아침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청량한 봄 아침이다. 선배님 부부는 아침 일찍부터 정원 꽃 가꾸느라 바쁘다. 풀 뽑고 물주고, 정원 잔디와 화단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나뭇잎 줍고, 그리고 돌아서면 또 나뭇잎이 구르고, 또 잡초가 보인다. 하고 또 해도 표도 안 나고, 끝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일을 도란도란 정겹게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매일의 일상이다. 갑자기 15년 전 호주에서 2년간의 생활이 떠오른다. 여기 선배님 부부와 비슷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대체적으로 평화롭고 좋았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2년째 접어들면서부터는 평화롭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었다. 보기에 참 여유로워 보이고 평화로워 보이는 일들이 현실이 되면 의외로 귀찮고 힘든 일이 많다. 조용히 선배님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즐거우세요?” 선배님이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평생의 한을 풀고 있어, 지금” 아, 선배님은 어려서부터 나무 가꾸기에 관심이 많았고, 은퇴 후에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이렇게 본인이 좋아하는 나무, 꽃들을 심고 가꾸며 소일거리 하며 사는 것이 꿈이었고, 지금 이를 실현하고 있단다. 선배님 부부가 지금처럼 이 집에서 건강하고 평화롭게 잘 살아가시길 기원한다.
갑자기 선배님이 제안을 하신다. “이 교수, 오늘 특별한 계획 없으면, 같이 점심할까? 점심 먹고 산책도 하고” 맛있는 집을 소개해 주겠단다. 선배님 부부와 교래리에 있는 교래 칼국수에서 토종닭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에 들렀다. 이쁜각시가 조용한 숲을 좋아해서 제주에 올 때마다 좋다는 숲은 많이 찾아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주요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은 건가? 아님 내가 무지한 건가? 아무튼 제주의 수많은 숲 중의 하나겠지 하며 들어섰는데, 일단 사람이 거의 없어 한적해서 좋고, 최소한의 개발로 자연그대로를 즐길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아무 계획도 없이 이렇게 뜻하지 않게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 행운 가득한 하루였다.
하루를 마치고 기분 좋게 샤워하고 나오는데, 이쁜각시가 저녁을 준비하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문제가 생겼단다. “하이라이트 전기레인지가 깨졌어요? 어떡해.” 국 끓이려고 냄비에 물 올리고 전원을 켰는데, 1분쯤 뒤에 갑자기 퍽 소리가 나더란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상판에 조그맣게 브이자 크랙이 생겼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하게 맞는 첫 번째 화살이다.
평소에 우리는 가스레인지만을 사용해서 이러한 문명의 이기(?)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시간이 이미 7시가 넘어 선배님 부부는 헬스크럽에 가셨고, 9시 넘어 돌아올 예정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야 할 상황이다. 일단 아내를 안심시키고 제품사용설명서를 찾아 A/S센터에 전화하니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만 업무 시간이란다. 사용설명서의 주의사항을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소비자과실은 아닌데, “A/S기간 1년(단, 소비자과실로 상판이 깨진 경우는 불가)”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이쁜각시는 아까부터 지옥을 헤매고 있다. 전기레인지가 정상적인 요리를 하다 갑자기 상판이 깨지는 것은 제품불량이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걱정이 태산이다. 두 번째 화살을 맞아 버린 것이다. 첫 번째 화살은 어쩔 수 없어도 그로인해 발생하는 두 번째 화살은 마음 다스리기에 따라 피할 수 도 있는데...
하이라이트 전기레인지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하여 각자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메이커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대문은 일단 여느 유명메이커 홈페이지 못지않게 그럴싸하게 잘 만들어 놓았다. 나의 탐험은 질의응답 코너에서 멈추었고, 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 홈페이지 만들 때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질의: A/S는 어떻게?, 응답: 상투적인 A/S센터 전화번호와 업무시간 안내” 말고는 제품과는 관계없는 수백여건의 기독교 전도, 개인 홍보성 글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는 한마디로 홈페이지 관리를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하이라이트 전기레인지 사용자들의 글을 살펴본 이쁜각시의 한마디가 더 해진다. “레인지 상판이 깨지거나 금이 간 경우는 메이커에서 제품불량이 아닌 사용자 과실로 판정해서 A/S를 해주지 않는다는 글밖에 없는데, 어떡해?” 급기야 제주 현지 설치 및 수리기사 한 분의 글을 읽고 전화 통화를 시도했는데, 그분 이야기가 “소비자 과실일 경우 대개 크랙 포인트가 발생하는데, 그러지 않은 걸로 보아 제품불량으로 판단되지만 자기 경험으로 볼 때 메이커 측에서는 소비자과실로 치부하고 제품불량으로 인정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어요.”란다. 이쁜각시는 걱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 제품을 망가뜨려 놓았으니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남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개념 없는 주부라고 할 거 아냐? 난 정말 조심조심 사용했는데, 억울해, 어떡하면 좋아...” 심지어 “똑같은 제품을 사서 교환해 놓으면 안 될까?”라고 한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당신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어, 이건 제품불량이 분명해 보여.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어.” “내일 날이 밝으면 선배님 부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 집을 시공한 분에게 A/S를 요청해서 그분의 의견을 들어 보고, A/S를 받든지 아님 새 제품을 사서 교환하도록 할 테니 너무 걱정 말고 그만 잡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실수든 아니든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정말 싫어하는 아내 성격에 걱정이 걱정의 꼬리를 물어 밤새도록 지옥을 헤맬 텐데, 어떡하면 좋지? 아내는 스스로에 대한 걱정, 나는 그런 아내에 대한 걱정, 힐링하러 온 제주에서 오늘 밤은 잠 못 이루는 밤이 될 것 같다.
어젯밤 걱정과는 달리 나는 아주 꿀잠을 잤다. 밤새 뒤척인 기색이 역력한 아내에게 살짝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선배부부를 통해 시공한 분이 방문했고, 제품불량이니 교환해 주겠다고 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잘못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밤새 고민하고 걱정한 아내가 너무 안타까운데, 심성이 착하고 여려서 그런 걸 어쩌랴.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마음속에서 이를 자꾸 되새김질해서 일을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누구나 어디선가 예기치 않게 날아 온 화살에 맞을 수 있다. 아프고 힘들다. 아마도 이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아이 참. 여기 오지 않았으면 화살에 맞지 않았을 텐데, 피할 수도 있었는데” 등등 마음으로 맞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자. 이건 마음먹기에 달린 거니까 마음을 제발 잘 다스려 보자.
자. 이제 훌훌 털고 이쁜각시가 가보고 싶다는 토요일에 열리는 벼룩시장을 향해 출발 한다. 세화리에서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세화 플리마켓이다. 또 다른 이름은 “벨롱장”이다. 별이 반짝반짝 빛나는 장이란다. 세화항구의 등대에 이어주는 방파제에서 다양한 젊은 친구들이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판다. 인간극장에서 보았던 초콜릿 가족도 보인다. 아기자기하고 젊은이들의 신선한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나는 여기까지다. 다양한 벼룩시장을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누비는 이쁜각시와 달리 방파제에 걸터앉아 바다와 놀기 시작했다.
<사진> 세화리 벨롱장
참고: 벨롱장
제주의 작은 바닷가 마을 세화리. 지역 주민과 여행자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반짝 장터가 열린다. 에메랄드빛 바닷가 아담한 노천 장터에서 마법의 물약 같은 진귀한 물건을 만날 듯한 즐거운 상상이 펼쳐진다.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해변 앞
- 날짜 : 3~10월 매주 토요일 (오일장과 겹치는 5,10,15,20,25,30일은 열리지 않음)
- 시간 : 오전 11시~오후 1시
바닷가 작은 장터인 벨롱장은 그야말로 ‘반짝’ 열리는 깜짝 플리마켓이다. ‘벨롱’이 제주말로 ‘불빛이 멀리서 번쩍이는 모양’이란 뜻이니 정말 이름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셈이다.
이번 여행만큼은 내 생각이 아닌 내 계획이 아닌 전적으로 이쁜각시의 생각과 계획에 맞추기로 스스로 다짐했고 실천하는 중이다. 그래서 평소의 나답지 않게 나는 아무 계획이 없다. 이렇게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움직이면 마음이 굉장히 평화로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뭔지 표현하긴 어렵지만 마음 깊은 곳에 왠지 어색한 기운이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하늘거린다. 자율의지 없이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산다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고 행복해하면 나도 당연히 행복해야 되는 거 아니야? 물론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묘한 생각이 살짝 들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습관이 되면 편안해지겠지? 한번 기다려 보기로 했다.
<사진> 제주 올레 1코스와 4코스 중에서
아무튼 이쁜각시가 올레길을 가보고 싶단다. 어젯밤 잠 못 이룬 이쁜각시를 고려해서 올레길을 도보와 자동차 드라이브를 적절하게 섞어서 즐겨보기로 했다. 올레 1코스 시작점인 종달리 해변에서부터 가능하면 올레코스대로 아니면 해안에 근접한 도로를 택해서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속도는 아주 천천히 가다가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차세우고 잠시 걷기도 하고, 흔들 벤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하다 보니 성산일출봉 찍고, 섭지코지를 돌아 표선해수욕장 건너 올레 1 ~ 4코스(2, 3코스의 육지는 건너뛰고)를 신선놀음하듯 마무리했다. 이것도 나름 괜찮네 하며 내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