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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심성유휘 Oct 16. 2024

좋아하는 책의 번역가님께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받았다.

내가 한창 힘들 때 나에게 굉장한 위로를 준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한병철의 피로사회, 한 권은 1990년도 출판된 루쉰의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후자의 경우 내가 책 추천글까지 블로그에 썼다. 

이 책을 읽고 루쉰에 빠져들어 많은 루쉰의 글을 거의 다 읽었는데 내가 처음 읽은 1990년도에 출판된 책만큼 나에게 와닿는 책이 없었다.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기에 항상 번역가님께 고마운 마음이어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다 생각했지만 늘 '해야지 해야지' 하다가 3년을 미뤘다. 


그리고 캐나다에 있을 때 메일을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다음 전문은 내가 보낸 메일.



[제목] 안녕하세요, 교수님이 엮으신 책의 독자입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교수님께서 1990년 번역하신 루쉰의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책을 읽은 20대 독자입니다.

갑작스러운 메일에 놀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작가님이나 번역가님께 메일을 드리는 것은 처음이라 많이 낯선 마음입니다. 메일을 보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였지만 이 책을 처음 읽고 받은 충격과 그 후에 책이 제 인생에 미친 영향이 꽤나 크기에 번역가님께 꼭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20대가 어떻게 1990년도에 나온 책을 읽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날이 기억납니다. 집에 부모님께서 젊은 시절부터 모아 오신 책들이 많은데 저는 책을 잘 읽어 버릇하지 않아 그 많은 책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공대생이라 그런지 제 지식이 짧아서 그런지 인문학을 깊이 배워본 적이 없어 인문학책에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책꽂이를 보았고 많은 책들 가운데 비닐커버에 소중히 쌓인 책이 있어서 집어 들었습니다. 앞페이지에 짧은 편지가 있어 보니 어머니께서 제 나이에 친구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책이었습니다. 신기한 마음에 읽기 시작했는데 그날 밤 처음으로 글을 저작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산문집을 몇 날며칠 들고 다니며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고, 그 후 루쉰 소설 전집도 사서 읽어보고, 루쉰 산문집 다른 번역판을 사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처음 읽었던 번역본만큼 무지한 사람을 일깨워줄 만큼 마음에 와닿고, 이해하기 쉬운 책은 없더군요. 정말 많은 루쉰 산문집을 서점에 가서 펴보았지만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것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였습니다.

제가 메일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떤 문장이 제가 힘들 때마다 저의 중심을 잡아줬기 때문입니다. “희망이란 미래에 속한 것이라, 과거에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로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번역이란 외국 불을 훔쳐다가 자기 고기를 삶는 것이라고, 루쉰의 말을 인용하셨었죠. 이 불을 가져와 고기를 맛있게 고루 익게 삶았는지는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성공하셨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글은 제 마음속에 콕 들어와서 정말 힘들 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습니다. 1년 전 번아웃으로 너무 힘들어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 있었는데, 짐이 너무 많아 딱 한 권만 가지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 문장을 한국에 두고 갈 수는 없어서 챙겨갔는데 힘들 때마다 책을 읽으며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아니셨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공대생이 중국어로 쓰인 이 문장을 보고 이만큼 감동을 받을 수 있었을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더불어 루쉰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책을 읽으며 100년 전 루쉰이 비판했던 사회와 현재 21세기 초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쉰이 그리고 있는 사회가 100년 전 중국인지, 아니면 현재의 대한민국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더라고요. 루쉰의 대표작들에서 말하는 공허한 영웅주의나 계몽에 대한 비판도 마음에 와닿았지만 산문 중 가장 와닿은 것은 ‘여성과 국난’이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여성들은 특히 더 수난을 당하는 것 같다. … 사회제도가 여성들을 이런저런 것들의 노예로 만들었고 갖가지 죄명을 씌우려 하고 있다. … 상해의 최신 유행은 기생에서 시작하여 첩의 무리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부인, 며느리, 딸들에게로 전해졌다고 한다. 이들 규방의 여인네들은 대부분 자기도 모르는 새에 기생들과 경쟁하는 꼴이 되며 그들도 몸치장 온 힘을 쏟게 되고, 남자의 마음을 끄는 모든 것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치장의 대가는 아주 톡톡히 치러진다.’

이 짧은 글보다 현재 성별갈등이 심한 한국 사회를 더 비슷하게 묘사한 글은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화론의 맥이 지금도 살아서 여성들에게 갖가지 프레임을 쓰게 하고 그 어느 때보다 심한 성별갈등을 조장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제가 놀란 부분은 그다음 부분입니다. 제가 느꼈던 케이팝의 어색한 불편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해 준 구절입니다. 저번에 마트에 갔을 때 엄마 손을 잡은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나 립스틱 하고 파운데이션 사줘!”라는 말을 듣고 놀랐는데요, 저 구절이 머리에서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대한민국의 최신유행은 100년 전 상해의 기방에서 시작된 유행과 같아서 모르는 사이에 일반 여성들에게도, 더 나아가 어린아이들에게도 전해진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매스컴에서 예쁜 아이돌을 접하면서 그에 맞도록 치장하고 자기 검열을 한 대가가 바로 이것인가 싶었습니다.

제가 감사하다는 인사만 한다는 게 어쩌다 보니 인상 깊은 구절까지 남기게 되었네요. 교수님의 글 덕분에 30년이 지난 지금, 엄마에게서 딸이 책을 물려받아서 세상을 살아가고 삶을 살아가는데 힘을 주고 다양한 성찰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이 서강대학교 중문과에서 2학기에 ‘루쉰과 현대’라는 교양 수업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좋게도) 근처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학점 교류라는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데, 꼭 뵈어서 루쉰 수업을 듣고 싶습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성찰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제가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성적을 떠나 교수님 수업 꼭 듣고 싶네요. 현재는 외국이라 내년 2학기쯤에야 들을 수 있겠지만 언젠가 꼭 수업을 듣고 교수님의 성찰을 저도 배우고 싶습니다. 혹여 수업을 듣지 못하더라도 교수님의 문장 덕분에 하루하루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000 독자 드림.



그리고 교수님의 답장

000 님께

반갑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메일을 처음 받고서 놀랐습니다. 너무 오랜 책이어서, 지금은 거의 잊혔는데 이 책을 읽었다고 하셔서 얼른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독서 경험이 제게는 너무 큰 영광이고 감사입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저로서는 이런 기쁘고 감사한 일이 없습니다.

거듭,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쉽게도, 학점교류를 통해 루쉰과 현대 강의를 들으실 수 있는데, 아쉽게도 가을 학기에는 열리지 않습니다. 제가 가을 학기는 연구 학기로 해외에 있습니다. 내년 봄에 루신과 현대 강의가 열립니다.  

반갑고, 감사한 마음과 말씀에 제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시고, 가고자 한 길로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서강대 이욱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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