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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2. 2024

요르고스 란티모스-감독론

영화 공방 운영자

 공장이 있다. 그 공장 한쪽에는 실험실이 있다. 실험실은 상황을 설정해 놓고 각종 재료를 골라 넣고 그 재료들이 다른 재료들을 만나 어떻게 변하는지 관찰한다. 실험실을 관장하는 사람은 감독이다. 감독은 가족의 무모한 폭력성을 고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폐쇄적 공간(실험실)을 설정하고 가장을 제외한 가족 전원을 외부로부터 인위적으로 단절시킨다. 실험실에 유폐된 가족은 인간의 본성과 충돌한다. 감독은 제목을 ‘송곳니’(2009)라고 붙인다.


  앰뷸런스 기사가 조직한 집단의 이름은 ‘알프스’(2011)이다. 이들은 죽은 자를 연기하고 수입을 얻어내는 일을 한다. 일종의 사자 대리 서비스를 통한 공허감 극복 프로그램이다. 교통사고, 전쟁, 기타 여러 사유로 잃어버린 가족구성원을 연기하러 다니는 간호사(사실 간호사도 아니다.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 집단 구성원 모두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불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간호사라는 직업 역시 죽은 간호사를 둔 아버지의 요청으로 간호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가 있다. 진짜 아버지, 진짜 딸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맡은 배역 간에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마치 AI가 마음이 생긴 것 같은 난센스적 현실이 발생한다. 자신을 죽은 자의 실존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 연기자가 배역과 일체화되는 혼란이 발생한다. 감독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 ‘슬픔은 대체될 수 있는 감정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실험에 임하는 자세가 자못 진지하다. 


  국민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법을 국가가 시행한다면, 독신자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자기 짝을 찾지 못하면 정부가 그들을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면? 짝이 되는 조건은 둘이 동질이어야 한다. 이질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들과의 관계, 부부가 아닌 자들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정부, 그렇게 서로가 원하는 짝이 되지 못하면 차라리 100년을 살면서 교미를 가장 많이 할 수 있다는 ‘랍스터’(2015)가 되기를 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전체주의적 폭력과 마주할 때, 관계를 지배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한다. 


  가족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만 전 가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누굴 희생시켜 ‘성스러운 사슴(sacred deer)’(2017)으로 만들 것인가? 더구나 자신의 잘못으로 희생자(sacreficed deer)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한 그 희생자를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한 집안의 가장이 지닌 불성실한 직업윤리가 가져온 불상사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그 가족이 짊어져야 할(짊어지워진) 내부적 갈등의 필연, 사회비극을 보여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모두 가족을 뿌리로 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집단에 각종 실험 재료들을 집어넣고 과정을 지켜본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감독도 잘 모른다. 감독이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이다. 가족의 구성적 모순, 희미한 연결고리, 폭력적 지배구조 등 가족을 위협하는 현실은, 가족이라는 집단이 해체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2019년에 제작된 ‘NIMIC’을 통해서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옹고집전의 서양 버전인듯한 착각과 친근함을 동시에 주는 니믹은,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가짜가 선택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가족 내부에서 내밀하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 얼마든지 사회 전체로 확장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로 발전한다. 내밀함의 비밀은 극도의 주관적 기준과 판단을 가지고 있어, 가족 구성원까지도 쉽게 대체재로 전락해 버리는 자본주의적 말단, 모든 행동은 죄다 소비라고 말하는 신자유주의 소비지향 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는 앞선 영화들에서 보여주었던 가정이라는 신성불가침의 숭고한 집단이 가지는 폭력성, 타인에 의해 대체되어 가는 가족 구성원, 강제로 집행되는 결혼과 동질성을 추구하는 가족의 문제, 죄의식을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가족 집단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제도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신랄한 비판이자 풍자다. 전통적으로 인류 사회의 뿌리라고 믿고 있었던 가족이라는 상황 속에 란티모스라는 영화 공방 운영자가 각종 실험재료를 투입하여 기계적이고 무자비하게 실험을 가하고 있다. 


  해답은 없다. 환경파괴의 원인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처럼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결자해지의 심정으로 과학자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가족을 바라보아야 한다. ‘알프스’의 리듬체조 선수가 환희의 기쁨으로 감독에게 달려가 안기는 것처럼, 단지 음악을 바꿔보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인류가 믿고 따르는 모든 진리 앞에 무표정하게, 그것을 때려 부수고 쳐다보고 서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신화의 세계로 가득 찬 그리스태생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영화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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