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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2. 2024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

누가 예수와 사슴을 죽였는가


  심장내과 의사 스티븐의 죄는, 자신의 음주 수술로 인해 무고한 한 사람의 가장을 죽였다는 일이다. 그래서 사망자의 아들 마틴에게 감정 없는 보답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망자와 그의 가족에게 무언의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부터 마틴은 스티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 오기 시작하고, 어떤 일은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티븐의 아들 킴이 하체마비로 걷지 못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 시점에 마틴이 스티븐에게 다리가 마비되고, 거식증이 일어나고, 피눈물을 흘린 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그리고 스티븐을 제외한 온 가족이 차례로 그렇게 될 거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마틴의 말처럼 스티븐의 딸 킴까지도 하체 마비가 되어 두 자식이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있게 되는 처지가 된다. 남편과 아내가 모두 의사인 행복하고 부유한 가정이 하루 아침에 불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두 개의 악이 대결한다.

  첫 번째는 원인 제공자로서의 악인 스티븐이다. 이런 류의 악은 살면서 저지르게 되는 실수, 오판, 잘못 등 우리 주변의 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 ‘그렇게 하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도덕적 판단 미스 혹은 잘못된 습성에서 오는 악이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얼굴, 선처럼 보이는 악이다.

  두 번째는, 인간이 행한 악에 대한 대가로써의 악이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심판이라고 하고 인간들은 ‘벌’이라고 말한다. 선하지 않은 선의 모습이다.      

“잘못은 스티븐이 했는데, 왜 내 자식들이 죽어야 하느냐?”

라는 스티븐의 아내 애나의 질문에,

“공평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에 가깝다.”

라고 대답하는 마틴.     

  마틴의 대답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에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모른다.’거나, ‘다 이루었다.’와 같이 예수가 했을 법한 기도 혹은 대사에 대한 응답의 현현으로 보인다. 하늘의 정의는 늘 이런 식이다. 노아의 방주가 그렇고, 소돔과 고모라도 그렇다.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폭력과 벌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너무도 기독교적이다. 음악까지도 배경에 깔고 시작한다. 타이틀 롤이 올라가면서 들려오는 음악은 장중하면서 신성하기까지 하다.     

  슈베르트의 ‘슬픈 성모’,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다,”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울려퍼진다. 범상했던 내 자식이 무고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목격한 어머니의 참담함이 담긴 곡이다.

  신성하고 고귀한 죽음에 비견되는 죽음이 화면이 밝아오면서 일어난다. 수술실에서의 의료사고, 태연하게 수술실을 나오는 의사들, 고급시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일상 앞에 살인과는 거리가 먼 평온한 일상이 묻어난다.

  음악은 신성한 예수의 죽음을 말하는데, 현실은 의료사고로 인한 ‘일종’의 살인을 말한다. 현실에서의 죽음은 어느 지점도 신성하지 못한 죽음이다. 살인자는 스티븐이 된다. 마치 그의 직업은 살인을 합법적으로 자행할 수 있는 고귀한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음악이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대단히 자족적이고 평화롭다. 한마디로 완벽한 삶인 것.

  그것이 바로 예수를 죽이고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일치하는 지점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는 핵심교리가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의 삶은 예수의 ‘대신 죽음’을 전제로 유지된다는 것, 하느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하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려고 했다는 논리가 인간을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가 나오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일상을 깨는, 분위기 반전을 이루는 타악기들을 한꺼번에 두들겨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매 순간순간, 관객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등장인물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때마다 들려오는 불협화음의 음악이 귀에 들어온다. 이 음악이 세상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 작곡가 야니 크리스타우의 ‘enantiodromia’가 바로 그 음악이다. 불협화음들로 점철된 기괴한 소리들의 집합이다. 이 음악이 불안과 위기 의식을 고조시킨다. 이 이야기(영화)의 시작과 끝은 기독교성가로 구성되어 있으나, 가운데 토막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난해하고, 시끄럽고 불안한, 부조화의 음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이 세상 만물의 구성요소인 ‘처음 중간 끝’의 구조와 같다. 정리하면, 탄생과 죽음은 신이 보내고 거두어가지만, 그 가운데 토막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부조화의 시끄러운 공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 세계를 ‘enantiodromia’가 맡고 있다.      

  ‘enantiodromia’의 세계는 칼 융에게서 온다.

  위에서 언급한 두 개의 악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대항점에 있는 것들이다. 두 개 중에 어떤 쪽이 선인지 알 수 없다, 선으로 등장했다가 악으로 변하고, 악으로 나타났다가 선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다시 악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인간의 몸이 균형을 유지하려는 작용과도 유사하다. 신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방식인 것이다.

  우리 인체 안에서 상반하는 요인이 작용하여 신체를 변함없이 유지하게 만드는 것을 항상성이라고 하고, 이것을 길항작용을 한다고 말한다. 두 개의 약물이 서로의 효능을 상쇄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 역시 길항작용이라고 한다. 이것을 융은 대립구도(enantiodromia)라고 명명했다.      

  이렇듯, 킬링 디어는 바로 우리 생의 대립구도를 그린 영화다.

      

 Here is the greatest and smallest, the remotest and nearest, the highest and lowest, and we cannot discuss one side of it without also discussing the other. No language is adequate to this paradox. Whatever one can say, no words express the whole. (Chapter 12-Late Thoughts III ,P354 MDR)

 여기에는 가장 거대한 것과 가장 조그마한 것,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나머지 또한 논의하는 것 없이 이러한 것의 한쪽 편만을 논의할 순 없다. 이런 모순에 언어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겠지만, 단어는 전체를 표출하지 않는다. <기억, 꿈, 반성들> (12장-후기의 생각들 III, P354)


 The fact, therefore, that a polarity underlies the dynamics of the psyche means that the whole problem of opposites in its broadest sense, with all its concomitant religious and philosophical aspects, is drawn into the psychological discussion. (Chapter 12-Late Thoughts II ,P349-350 MDR)

 그러므로 극성이 정신의 역동성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은 그 대립물의 전체적인 문제를 종교적, 철학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를 갖는 심리학적인 논의로 끌어들인다. (기억, 꿈, 반사상 12장 최종 사변 II – P349~350)     


  융이 말하고 있는 길항작용, 생의 대립구도에 대한 해설이다. 이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융은 말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대립과 서로에게 길항작용을 하는 관계로 얽혀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태고의 동양사상인 음양론과도 일치한다. 음과 양이 서로를 물고 돌아가면서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변화무쌍한 모습, 그것이 이 우주의 원리이며, 그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변화와 불변이 한 데 어우러져 설명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서로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것이다, 우주는 유한하지만 무한하다, 상극의 개념이 하나도 합일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신의 이름으로 드러난 세계가 다름 아닌,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어느 것이 선인지 어느 것이 악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세계이다. 이 혼돈이 영화의 주된 내용을 이룬다.      

  이 영화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계는, 공포 미스테리물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 혹은 이 세상의 가장 공포스러운 장면은, 귀신이 나온다거나, 시체를 토막낸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마틴의 스토킹에서 시작되는 긴장감이, 예언으로 이어지고, 예언이 초자연적 현상으로 구현되면서, 스티븐에 의해 자행되는 납치와 폭력에 굴하지 않고 폭력을 폭력으로 고스란히 재현하여 보여주는 장면에 있다.

  먼저 발생한 살인(의료과실로 인한 환자의 죽음)에 대해 마틴이 보여주는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목소리톤으로 일관한다. 그 어눌한 어린 중학생 아이의 목소리는 모자람에서 집요함으로, 다시 맹목성으로 변했다가 공포로 변한다. 물론 관객이 받아들이는 변화이지 마틴 자신이 스스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이 영화의 경악스러움이 있다.

  대학 영화동아리에서 기획한 공포영화제에서 본 몇몇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연쇄살인범이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보여주는 잔혹한 살인 행각들을 그린 영화였는데, 어떤 비명도 없고, 그에 따른 어떤 음향효과도 넣지 않았는데도 이 영화가 공포스러운 것은 연쇄살인 자체에 있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현실의 공간에서 마치 생활의 연장선인 마냥 그대로 죽인다는 데 있었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생활 살인(Casual Murder)쯤 되겠다.

  이제 주변을 둘러보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그 수만 가지 것들이 내게 하고 있는 짓에 다름 아닌, 내가 했거나 하고 있는 행동에 대한 반격들이다. 내가 스티븐이며, 마틴이며, 이것 저것도 아니라면 애나이며 킴이며 밥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의료사고로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은 마틴의 아빠일 수도 있고, 남편을 죽인 자와 붙어먹으려는 마틴의 엄마가 될 수도 있다.   

  감독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마틴을 통해 보여준다. 관객으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자아를 드문드문 발견하게 만드는 찜찜하고 섬찟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애나가 마틴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양발등에 키스하는 장면은, 비록 납치되어 의자와 기둥(배수관 파이프)에 결박되어 있지만, 마틴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로 만들기에 충분한 장면이다.

  또한 밥은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스티븐의 말에 복종하면서 불편한 몸으로 머리를 자르고 ‘아빠가 나의 주인이고, 나는 종이다.’라는 말을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말한다.

  도대체 누가 예수의 현신인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스티븐인가? 예언으로 가족들의 생사를 쥐고 있는 마틴인가?      

  자, 여기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새크리드 디어’, 성스러운 사슴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그 성스러운 사슴을 죽였으니, 일단 등장인물 중에 죽은 자이다. 마틴의 아버지? 아니면 스티븐의 아들 밥? 어느 쪽인가? ‘성스러운 사슴’이 죽었으니 그에 따른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라면, 이미 죽은 마틴의 아버지가 성스러운 사슴이어야 맞다. 성스러운 사슴을 죽인 대가가 바로 밥의 죽음으로 해석되면 제법 앞뒤가 맞다.

  그러나, 문제는 죽음(The killing)을 과거로 볼 것인가, 현재진행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죽이기’라고 풀면, ‘밥’이 될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한 희생=성스러운 죽음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밥의 죽음이 성스러운 죽음이며 밥이 사슴이 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제목이 가지는 현재진행상에 부합한다.

  ‘누가 성스러운 사슴인가’의 문제와 ‘누가 예수의 현신인가’하는 문제는 분분한 해석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다. 고뇌와 갈등, 충돌과 번민, 선과 악이 혼재하고 변화하는 무질서한 세계인 것이다.      

  이제 스티븐은 마틴의 예언을 실행한다. 우연적 행위에 맡긴 뺑뺑이 룰렛으로 아들 밥을 죽인다. 그리고 다시 울려퍼지는 음악, 바흐의 요한수난곡 ‘주여, 주여, 주여’의 코러스가 화면 가득 펼쳐지면서 마지막 식당장면으로 넘어가 밥이 빠진 스티븐의 가족과 마틴이 만난다. 영화 초반에 스티븐과 마틴, 단둘이 만났던 그 식당이다. 수미쌍관을 이루는 장면 배치. 악은 계속 이어진다. 킴이 감자 스틱을 먹는 모습이 보이고, 그걸 쳐다보는 마틴의 표정이 처음 등장했던 멍청하고 모자란 아이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다. 그건 무념, 무아의 표정과도 같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물자체(actus purus)로서의 마틴은 처음부터 자아가 없었던, 신성이 깃든 존재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말이 없다. 엔딩 자막이 올라간다. 음악은 계속된다.

  노래 가사의 내용은 낮은 곳으로 임하는 예수의 영광됨에 대한 예찬이다.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누가 사슴을 죽였는가?


  스티븐은 완벽하게 죄를 지은 인간이다. 식당을 나가는 스티븐처럼, 인간은 이 세상으로 돌아와 살아가고 있다. ‘그’는 낱낱의 ‘나’이고, ‘그의 가족’은 집집의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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