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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3.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괴된 균형이 초래한 균형

수상내역

2024 17회 아시아 필름 어워(작품상, 음악상)

2023 16회 아시아 태평양 스크린 어워드(심사위원대상)

67회 런던 국제 영화제(작품상)

71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LURRA- GREENPEACE상)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은사자상-심사위원 대상)

감독(각본) : 하마구치 류스케

촬영 : 키타가와 요시오

음악 : 이시바시 에이코

상영시간 : 106분

장르 : 드라마 

상영등급 : 12세 이상



떨어지는 한 개의 물방울이 바다로 흘러가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작품이다. 조용하고 은은하게 흐르는 일본인 특유의 서사방식을 사용한다. 그런 면에서 제목은 매우 이례적이다.     

  기본 서사는 간단하다. 산촌 마을에 글램핑장이 들어와 설명회를 하면서 마을과 마을 밖의 대립과 갈등이 이제 막 시작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사건은 마을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아내를 잃고 산촌에 살고 있는 야스무라 타쿠미(오미카 히토시 분, 사별인지 이혼인지 알 수 없지만 이별은 분명한, 사연을 가진 남자)가 마을에서 딸, 야스무라 하나(니시카와 료 분)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일이다. 글램핑장 설명회가 마을 공동의 문제라고 한다면 하나의 실종은 타쿠미에게 일어나는 사적 사건이다.

  마을의 사건과 개인의 사건, 이 두 사건의 연계는 시작과 결말, 겉으로는 서사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류스케 특유의 연결고리가 이들을 순환시키고 있다. 전후 정착지로 개발된 이 마을은 그동안 3세대가 정착해서 사는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화라고 한다면 최근 들어 도시에서 들어온 외지인들이 많아진 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글램핑장이라는 것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외지인의 유입이라고 볼 수 있다. 회사가 들어오고 본격적으로 도시인들이 캠핑을 오게 되는, 마을로서는 규모의 탈바꿈이라는 전환의 계기와 맞닥트리고 있는 것이다.

 시작과 종결, 개발이라는 시작은 딸의 사고라는 종결로 처리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면에서 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류스케는 담담하게 보여준다. 종결처리된 사건이 다시 시작으로 받아들여지는 몫은 전적으로 관객의 것이다.    

  

음악이 멈추자, 시간도 멈추고

  숲 속에서 타쿠마가 하나를 찾아 헤매는 장면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찾아서 업고 가는 장면이고, 또 한 장면은 결국 못 찾고 숲 속을 헤매고 있는 장면이다. 두 장면의 공통점은 음악의 흐름에 있다. 잔잔하고 고요한 이시바시 에이코의 음악이 흐르다가 갑자기 뚝, 음악이 끊어진다. 그 끊어짐은 사운드에 오류가 난 것처럼 처리되어, 음악이 뚝 끊어져 마치 갑자기 화면이 정지되어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숲에서 인간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 연출을 통해 류스케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음악으로 구분하려 한다. 음악이 주는 시간의 단절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계가 방향도 흐름도 없는 무한의 대상물이라면, 시간 예술인, 무한과 유한을 연결하는 음악이 끊겼다는 것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지금부터 인간의 시계가 등장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류스케는 그러한 표현에 천재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아내의 외도를 이해하려고 했던 가후쿠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사키 등의 인물들은 모두 상처와 죄의식,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약한 인간군상들이다. 그들이 겪는 아픔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류스케 감독은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역시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려고 한다. 시작과 끝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인간세계만이 시작과 끝을 구분하는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을 품고 있는 더 큰 우주의 시간이라는 것 속에서는 시작과 끝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잔잔한 인상으로 말하고 있다.


 균형이 만든 구분과 차별은

  타쿠마는 글램핑 설명회에서 균형을 말한다. 보전과 개발, 집단과 개인, 이들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이상적인 해결책이다. 

  이 세상에, 이 우주라는 곳에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선’ 또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 둘은 서로를 상대적 개념으로 바라보며 서로 반대편에 서서 팽팽한 긴장으로 대립하고 있다. 각자의 존재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 것이 세계이고, 류스케가 그려내는 세상의 모습이다. 류스케 감독이 바라본 세상(우주)은 그저 숲에서 올려다본 하늘의 모습으로 하루가 시작해서, 다시 숲에서 올려다본 하늘로 하루가 저물어 갈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늘 거기에 있는 것, 그 안에서 인간이 요동을 치고 소란을 일으킬 뿐이라는 조용한 생각.


악이 없으니, 선도 없고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나쁜 것, 그것을 악으로 부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 옆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늘 우리 곁에 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을, 굳이 ‘악’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너무도 큰 우주 안에서 살아가는 일상의 삶, 우리가 함께 공존의 이유, 그것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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