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G(투지)가 보여
Small, Slow But Steady(작고 느리지만 침착하게), 영어 제목이다. steady에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정서에 맞는 말은 침착인 것 같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단단하게!' 라고 번역해도 좋겠다.
ケイコ 目を澄ませて(게이코, 눈을 봐, 맑게 떠), 이 제목은 아마도 권투도장 관장('황천권투회'라는 권투도장을 일본에서는 '회'라고 이름 부르나 본데, 그래서 관장이 아니라 회장이다.)의 대사다.
이런 제목이었던 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 이라는 애매한 제목으로 바뀐다. 영어 제목이 이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식의 제목이라면, 일본어 제목은 이 영화의 정곡을 찌르는 핵심을 품고 있다. 그래서 한국어 제목은 애매하다. 문법적으로도, 단서를 제공하는 가정문인지, 물음표 없는 의문문인지 알 수가 없다.
거두절미, 그건 사족으로 치부하고,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가난한 자의 운동, 배고픈 자의 운동, 권투의 목적을 충실히 따라가는 영화다. 물론 쇼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권투영화가 아니라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인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권투와 인생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 몸인 것을,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말을 달리 할 수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말해, 권투라는 스포츠 자체가 대상인 영화가 아니란 뜻이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권투영화가 아니란 말은 스포츠영화가 아니란 뜻일 것이다.
게이코가 프로전에 데뷔한 후 기자회견 자리에서 관장은 말한다. 이 선수는 권투선수로서는 장점이 없다. 키도 작고, 리치도 짧고... 등등을 말하는 끝에 이렇게 마무리 한다.
'인간성이 좋은 선수다.'
정확한 대사인 줄은 모르겠으나, 그 비슷한 말일 것이다.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성실성, 그로 인한 정확성(스포츠 기술로서의 정확성이 아니다.), 남을 속이지 않는 진실성, 정직함이 있다는 것. 사실 우린 사극이나 무협영화에서 얼마나 많이 들어본 대사인가, '인간이 먼저 되라', 이 부분에서 게이코는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장은 권투 선수로서 최대의 약점은 '싸우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상대를 보지 않고 너는 싸우고 있다, 그래서 관장은 게이코에게 상대의 눈을 쳐다보라고 주문한다. 싸우려는 의지가 없는 권투선수가 존재할까? 그러니 특이한 선수가 아닐 수 없으며, 관장은 자신의 건강, 체육관 폐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게이코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가진다.
게이코에게 관장은 아버지와 같은 친밀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말없이 나타나 자신을 돌봐주고, 개인적으로도 연습을 시키고, 게이코의 경기를 분석한다. 그런 관장의 모습에서 부재하는 아버지의 감정을 느낀다.
관장은 게이코에게 숙제와 같은 존재다. 왜, 싸우려는 마음이 없을까? 우린 그것을 투지(2G가 아니다)라고 부른다. 투지가 없는 복서에 대한 사명감은 그에게 투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살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것과 같다.
박종팔은 말한다. '세계챔피온 벨트를 두르고 링의 세계에서 무적이었던 자신감은 삶이라는 현실의 링에 내려왔을 때 무참히 깨져버리는 것을 경험한 나는,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다.' 흔히 링을 인생에 비유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곳이 바로 우리 삶이라는 사실을 은퇴한 권투선수 박종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관장은, 게이코에세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다. 프로 데뷔 후 첫 시합에서 상대선수의 반칙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심판에게 항의하고, 상대선수에게 분노를 품고 일어선 게이코, 결국 카운트 다운으로 시합에서 지고 만다. 그 경기의 중계를 보던 관장은 낮게 속삭인다. 요시! 좋아...
드디어 게이코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이유가 생겼다는 것을 관장이 간파해낸 것이다. 그건, 게이코가 왜 살아가야하는지 이유를 가지게 된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게이코는, 누나가 왜 다른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는지에 대한 동생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마 게이코는 말을 할 수 있는 농아(귀머거리)인가보다.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대사도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대사다. 그러나 비슷할 거라 추측한다. 소통의 측면에서, 어떤 이유에선지 게이코는 타인과 소통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단지 기관의 기능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 보인다.
감독은 영화전반을 통해 주인공 게이코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아무런 정보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관장이나 동생을 통해 간접적으로 게이코의 과거사가 살짝 언급되는 수준이 전부다. 학교다닐 때 고약한 성질을 가진 학생이었다, 툭하면 싸우려 들었다, 정확히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타등등의 정보가 제공된다. 아마도 게이코는 그 때부터 귀를 닫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으로 보인다.
'잘했다. 장애인으로 그만하면 잘했다. '
게이코의 직장(호텔객실 청소)에서 함께 일하는 장애인 동료가 격려하는 말이다. 같은 장애인 조차 장애인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는 현실, 그만하면 됐으니 편히 살자는 어머니의 마음도 같은 수준으로 이해된다. 소위 말해 장애인식 개선의 문제가 스쳐지나가는 영화다. 장애인의 의식 속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이미 자리잡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이 영화는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너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니?'
이제 관객은 문득 문득 드는 생각으로 머리가 쏠린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생각(사상, 관념, 주의, 주장 어떤 것으로 불러도 좋다.)을 실천하는 도구다. 당신의 몸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에 속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의 몸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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