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특정한 날들이 일과처럼 지속되었다. 그 일은 학교를 다니는 것과는 다르게 생겼다가 안 생기기도 했고,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기도 했다. 아랫동네는 성당에서 운영하는 큰 병원이 있었고, 병원 앞길을 지나 안쪽 도로로 더 들어가면 그 동네에서 제일 큰 만화방이 있었다. 10원씩 내고 고무줄에 걸린 만화책을 빼보거나, 책꽂이에 꽂혀있는 만화책을 꺼내 빈자리에 앉아 하루 종일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만화방을 들락거린 건 그런 식으로 만화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만화책을 빌리러가기 위해서였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무슨 배짱으로 책을 빌려가고 빌려주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만화방 주인이 반납하지 않고 있는 만화책을 되찾아가기 위해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연체료를 물어야 했다. 빌렸으니 당연히 갖다 줘야하는 것으로 알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것은 학교를 빠지면 안되는 일과 같은 종류로 여겼다.
우리 동네에도 만화방이 한 곳 있었지만 동네 만화방은 그야말로 구멍가게였다. 머리를 박박 깍고 숨쉴 때마다 코를 함께 훌쩍이는 아이들이 겨울철 따사로운 햇살을 쬐며 나무걸상에 나란히 앉아 만화책에 코를 박고 앉아 있는 서러운 그림이 전부였다. 아이들에게 설탕과자를 팔고 뽑기를 하게 하고, 번데기 국물이 묻은 신문지 쪼가리를 쪽쪽 빨게 만들었던, 그런 아이들이 이용객의 전부여서 아랫동네처럼 온전히 만화책을 보기 위한 공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버스가 로터리를 돌아나가던 시내라면 시내라고 할 수 있는 아랫동네 만화방은 사방으로 빽빽하게 꽂힌 만화책부터 온갖 군것질 꺼리들이 출입문 입구에서 팔리고 있었던 대형 책방이었다. 꼬맹이들과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아저씨들도 자주 출입하는 곳이었다. 특히나 안쪽 구석 칸막이 뒤쪽에는 빨락빨락 윤이 나는 얇은 기름종이 표지 위에 총천연색으로 입술 옆에 점을 찍은 여자얼굴이 크게 그려지거나, 몸매를 드러낸 여자의 신체라인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만화책들이 공공연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쪽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나도 모르게 곁눈질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성인극화라고 써 있는 만화책들은, 나에게는 특별한 환상이 즐비한 꿈의 공간 속에 존재했다.
볼륨이 강조된 여대생이 하는 첫경험이라든가, 뒷골목 깡패들의 밤거리 이야기, 그중에서 가장 쇼킹한 스토리는 '김성주의 침실'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진 북한의 김일성이야기라든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여고생을 농락하는 엽색행각 등을 만화로 그린 것들이었다. 고우영의 역사만화도, 강철수의 무하마드 알리의 일대기도 모두 여기서 나왔다.
오빠야, 엄마가 오라칸다.
나는 툇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별채로 뛰어갔다. 우리집은 부엌을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장지문을 붙이면 두 개의 방으로 나눌 수 있는 커다란 사랑채가 하나, 부엌의 왼쪽으로는 두 개의 방이 연달아 붙었고, 방 앞으로 이어진 복도 마루를 따라 들어가면 가장 안쪽에 작은 방이 하나 더 달려 있는 동네에서 규모가 두번째로 큰 기와집이었다. 그리고 한 덩어리로 된 집채 밖에 별채의 집이 한 칸 더 있었다. 별채는 부엌이 달린 단칸방이었다. 그 쪽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을 지나고 집채 모퉁이를 돌아 변소로 가다보면 맨 끝방 바깥에 따로 지어진 독채였다. 이 독채를 지나야 변소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없던 집을 본채에 잇대어 빈 터에 간이로 하나 더 지어 세를 주었던 것인데, 주로 직장을 다니는 독신자나 지금처럼 미옥이같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새댁이 들어와 살았다.
미옥이 엄마는 늘 아팠다. 내가 아줌마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 방문을 열어놓고 방안을 휘 둘러볼 떄면 늘 자리에 누워 있거나 자고 있었다. 잔다는 것도 어쩌면 아파서 누워 있는 것일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니 아줌마는 늘 아팠던 게 분명했다.
만화 빌리러 가자!
아줌마가 가장 팔팔할 떄의 모습이었다. 만화 빌리러 아랫동네에 내려갈 때였다. 나는 좋다고 신이 나서 아줌마를 뒤세우고 앞장 서 걸었다. 보통 아줌마와 만화책을 빌리면 두 팔 벌려 품에 가득 차도록 한 보따리 빌려오는 건 내 몫이고, 아줌마 가슴엔 진짜 보자기로 싸맨 성인극화를 한 보따리 싸 안고 오기 마련이었다. 일반 만화책들은 우리 집 식구들 차지가 됐고, 성인극화는 아줌마 방에 들어가면 좀처럼 방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빌려온 만화책을 얼른 보고 그 중 몇 권을 들고 아줌마 집으로 건너갔다. 아줌마도 만화책은 볼테니까, 내가 보고 싶은 성인극화를 슬쩍이라도 볼 수 있나 싶은 마음을 품고 가보는 것이다. 미옥이가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또래 여자아이들과 소꼽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줌마의 방은 광목 천들이 빨래줄에 걸려있고, 이부자리가 깔린 아랫목 주변에는 무슨 휘장인지 커텐인지 모를 장막들이 얼키설키 방의 중심을 휘어감고 있었다. 그 속에 아줌마는 늘 누워있었고, 자리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거나 잠들어 있기 일쑤였다.
아줌마, 이거 억쑤로 무서버예!
나는 조치원이 그린, 집안의 막내 여동생이 구미호로 밝혀지는 이야기를 아줌마가 누워 있는 이불 옆으로 밀어 넣었다. 아줌마는 풀어진 눈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을 반쯤 벌린 채 무슨 말을 중얼대듯 했다.
어데 아파예?
나는 아줌마가 어디가 또 아픈가 싶어 조심스럽게 아줌마를 쳐다 보았다. 동네에서 볼 수 없는 하늘하늘한 분홍색 잠옷을 입은 아줌마는 잠결인지 뭔지 모를 상태에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다시 잠이 든듯했다. 나는 아줌마가 보고 있을 성인극화가 어디 쯤 놓여 있는지 빠르게 방안을 훑었다. 몇 권이 아줌마의 머리맡에 펼쳐져 있을 뿐 보따리에 싸온 극화 더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별 볼일 없이 되어 버린 것에 금방 낙담했고 이내 방문을 닫고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에 문 좀 열어다고.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아줌마쪽을 돌아보고 말했다.
오늘 저녁에예?
그래, 뉴스 나올 때 있제? 빗장만 소리 안 나게 살짜게... 누가 뭐라카믄 내가 아파서 그렇다 캐라.
나는 엄마가 넘겨주는 반찬 그릇들을 받아 저녁밥상을 차리다가 티비화면에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나오자 바로 달려나가 대문 빗장을 빼놓고 다시 들어왔다.
밥채리다 말고 니 어데 갔다오노?
암 것도 아인데예.
나는 아줌마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누군가가 알면 안 되는 뭔지 모를 일이 그 심부름 속에 숨겨져 있을 거라 직감했기 때문에 최대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오빠야, 엄마가 오라칸다.
하던 숙제를 팽개치고 별채로 뛰어갔다. 전날 그렇게 죽은듯이 누워만 있던 아줌마가 앞장서 걸어가는 걸음이 신나고 즐거워 보였다. 세타 밑으로 타이트하게 받쳐입은 파란 청바지가 꽉 끼어서 엉덩이가 터질듯했다. 청바지의 라인을 따라 박음질된 하얀 봉제선은 아줌마의 몸이 다 드러나도록 완만한 곡선을 만들어 냈다. 이제 막 5학년에 올라간 나는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을 본 듯했다. 이내 아줌마의 뒷모습이 극화 표지에 그려진 대학생 그림을 닮아 있다는 걸 연상해냈다. 왼 쪽 머리에 나비핀을 꽂고 가슴에 보따리를 안고 걸어가는 아줌마는 극화에서 걸어나와 어느새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지면서 아줌마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했다. 심하게는 아줌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전과 다르게 아줌마 앞에서 말도 시원히 하지 못하는 소심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오고 가는 길이 즐거운 대화로 꽃피었을 테지만 이제 나는 아줌마 옆에만 서 있어도 가슴이 뛰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일요일 오후, 아무도 없는 방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아줌마가 방문을 드르륵 열고는 너 이거 보고 싶제? 하며 만화책을 던져 넣었다. 나는 무심결에 던져진 만화책 쪽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깜짝 놀라 아줌마 쪽을 다시 쳐다봤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성인 극화였다. 하지만 아줌마는 금세 문을 닫고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며 얼른 만화를 낚아 챘고, 부엌 바깥으로 누가 없는지 살폈다. 그리고 만화책을 펼쳤다. 제목은 '여대생 아르바이트'였다.
아침 출근시간, 회사에 출근하는 아빠와 대학생 딸의 아침시간이다. 오전 강의가 없어 점심때 쯤 등교할 거라는 딸과 출근 인사를 하는 아빠. 또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행복한 남편이다. 그는 출근후 처리할 일을 마무리 하고 오늘 일과가 특별한 일이 없음을 확인한 후 회사를 빠져나온다. 거리를 무작정 걷던 그는 심심하던 차에 성인극장에 들어와 앉았다. 최근 개관한 포르노가 상영되는 성인극장이었다. 극장안은 손님이 없다. 성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극장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으로 한 때 시끄러웠으나 막상 개관 후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이다. 영화가 막 시작을 하자 잠시후 어둠 속 반대편 출입문이 열리며 손님이 한명 들어온다. 또각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여자의 힐소리다.
여자는 남자의 옆자리로 와서 앉는다. 남자는 많은 자리중에 왜 자기 옆에 앉는지 금세 알아차린다. 손을 뻗어 여자의 허벅지를 쓸어본다. 여자는 가만히 있다. 좀 더 과감하게 손을 다리사이로 넣어본다. 여자가 엉덩이를 살짝 들어준다. 남자의 목구멍으로 큰 덩어리의 침이 꼴깍 소리가 나도록 넘어간다. 그렇게 그는 뜻하지 않게 낯선 여자와 극장의 어둠 속에서 질펀한 정사를 벌인다.
남자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에서 10만원 짜리 수표를 꺼낸다. 꺼내는 중에 수표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남자는 고개숙여 극장 좌석 다리 밑으로 들어간 수표를 꺼내는 과정에 수표의 귀퉁이가 살짝 찢어져 나가버린다.
좌석에서 내려와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가 어둠속에서 하얗게 빛난다. 허벅지 사이에 내려진 팬티를 치켜올려 입는 여자의 손에 수표를 쥐어준다. 남자는 조금전까지 자신에게 등을 보이며 치마를 걷어 올리고 팬티를 내린 채 자신을 올라타고 앉았던 여자를 떠올렸다. 그녀 자신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며 몸을 비틀어대던 여자였다. 남자는 다시 육감적인 여자의 골반라인을 쓰다듬어 준다. 매무새를 여미고 다시 자려입은 여자는 그대로 일어섰다. 여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또각거리는 힐 소리를 내며 극장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남자는 혼자 남아 좌석에 등을 깊숙히 밀어넣은 채 만족스럽게 숨을 크게 한번 들여마신다. 담배가 당기는 시간이었다. 남자는 멈추었던 숨을 다시 내쉬며 바지춤을 추켜 올리고 지퍼를 올린 후 버클을 채웠다.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도 극장을 나선다.
남자는 갑자기 출출하다. 어디가서 점심이나 했으면 하는데, 이럴 때는 많은 사람들이 왁자한 백화점 식당가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근처에 젊은이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백화점이 있다. 거기 식당가는 6층, 지하의 푸드코너 보다는 6층이 더 낫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 올라온 남자는 식당가 안내판을 훑어보고 회전초밥이 혼밥을 하기엔 제격임을 발견한다.
초밥집 쪽으로 발걸을을 떼려는 찰나, 누군가 어깨를 쳤고 뒤돌아본 남자는 환한 얼굴로 미소짓고 서있는 딸의 얼굴을 마주한다.
엇? 니가 여기 웬일로?
남자는 뜻하지 않게 만난 딸이 너무도 반가웠다. 알바 잠깐 하고 학교가는 길에 여기 초밥이 맛있다고 소문나서 와본 거라고, 피크 때면 길게 줄을 서서 먹어볼 기회가 없으니까 일부러 일찍 온 거라며 수다를 떤다. 밝고 즐거운 얼굴이다.
남자는 너무 잘 됐다고 말하면서 잠깐 밖에서 오전 업무가 있어 마무리짓고 여기 뭐가 맛난가 하고 들렀는데, 이제 초밥을 같이 먹으면 되겠다고 딸의 손목을 바삐 끌었다. 나란히 테이블에 앉은 둘은 딸의 공부 얘기, 아빠의 회사얘기, 집에 있는 엄마 얘기 등 이런 저런 집안의 얘기들로 꽃을 피웠다. 부녀는 즐겁게 식사를 하고 후식 음료로 깔끔하게 입가심까지 한 후 계산대로 나갔다. 아빠가 카드를 꺼내자, 딸이 아빠 손을 막으며 말한다.
나, 오늘 알바비 받았거든!
딸의 손에 벌써 10만원짜리 수표가 들려 있었다. 지폐의 귀퉁이가 남자의 눈에 클로즈업되어 들어왔다. 빨간메니큐어가 칠해진 딸의 엄지 손톱 밑에 귀퉁이가 찢겨 나간 바로 그 10만원짜리 수표가 끼워져 있었다. 미소짓는 딸 아이의 입술 위에 작고 까만 애교점이 하나 찍혀 있는 게 남자의 눈을 더 크게 뜨게 만들었다.
나는 만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뭔가 뜨뜻한 것이 엎드린 내 바지 속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생막걸리 같이 투명하고 흐린 액체가 팬티를 가득 적셨고 그것이 어디서부터 흘러 나온 것인지 어리둥절한 채 바지속을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이다, 조방 칼잽이라고 들어봤나? 카이까네, 마, 바로 행님카는기라...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빵에 갔다왔다면서 세 달만에 집에 들어온 애꾸아저씨였다. 정말로 칼을 맞았는지 안대를 벗은 맨 눈의 눈꺼풀 위로 하얀살이 빗금치듯 표시되어 있었다. 그가 빵에 갔다온 썰은 이집 저집의 사랑방 이야기가 되어 온 동네로 퍼져나갔고, 희한한 일은 아저씨들끼리 모여 그런 얘기꽃을 피우는 걸 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주로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장기 자랑하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아저씨였다. 그것도 낮에 그랬다. 학교를 일찍 파하고 동네에 들어서면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이런 식으로 열린 대문 안쪽으로 훤히 보이는 대청마루에 아줌마들이 한 가득들 들어앉아 있는게 보였다. 가운데 앉은 애꾸아저씨의 말에 모두 귀를 세운 무리들 앞, 대청 밑에는 학교를 안 가는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와서 저희들끼리 놀고 있었고, 좀 큰 저학년 아이들은 엄마들과 좀 떨어진 대청 한쪽에서 옹기종기 모여 놀았다.
미옥아, 니 맨날 만화책 보다가 서방오믄 우짜노? 맨날 그런거 본다꼬 뭐라 안 하더나?
만다꼬예, 더 빌리오라 안 캅니꺼.
부창부수다, 그기 마 찰떡 궁합아이라?
애꾸 아저씨가 한 손으론 주먹을 쥐고 그 위로 손바닥을 탁탁 때리면서 하는 말에 아줌마들이 깔깔대고 웃고, 배를 잡고 굴렀다.
마루에 가방을 던져 놓고 공터에 나가려던 참에 엄마가 불러 세웠다.
니, 갓방 아줌마한테 전화받으러 오라캐라. 지금 바로 오라고.
나는 아랫집 마당 가운데 서서 아줌마를 부르고, 엄마 말을 전했다. 아줌마는 아쉬운 듯 치마자락을 털고 일어났다.
어데서 왔다쿠더노?
모르겠씸미더.
대문 안으로 들어온 아줌마는 반대편 안채를 향해 곧장 들어왔고, 나도 아줌마를 뒤따라 마당으로 들어섰다.
전화가 왔다꼬예?
엄마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고 대꾸했다.
응, 좀 있어봐라, 전화 금방 한다캤다.
아줌마는 마루에 걸터 앉아 방문을 반만 열어젖혔다. 문 안쪽에 작은 소반이 놓여있고 그 위로 뜨개질해서 만든 깔개를 깔고 윤기나는 까만색 전화기가 올려져 있었다.
니, 인자 학교갔다 왔나?
예, 인자 막예,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전화벨이 울렸다. 아줌마는 전화기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고, 대답만, 예예하다가 알겠다고 말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고?
부엌에서 엄마가 행주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 사람이 온다카네에.
정말이가, 올해는 좀 일찍오네, 배가 빨리 들어왔는갑제?
그렇다네예. 내일 모레니까 장 좀 봐야겠심미더.
그랄까? 내하고 같이 장에 함 가자, 내가 장봐주꾸마.
아줌마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니, 요 우에 솜틀집 알제? 거 문간방에 총각한테 가서 만화책 좀 받아 온나. 애꾸아재 집에도 몇권 있으니까 거도 좀 다녀오고.
코가 화살처럼 뾰족해서 뺑코, 혹은 켈로라고 부르는 형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동네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주로 사람 없는 막다른 골목 끝에 서로 희희덕거리며 노는 형이었다. 거기에는 우석이네 큰 형도 있었고, 내가 숙제하러 다니는 선생님네 집의 남동생도 거기서 함께 어울렸다.
마을에는 공터가 두 개 있었다. 아래 공터는 온 동네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공터로 마을 한복판에 있었고, 두번째 공터는 마을 위 쪽에 다섯칸짜리 공중화장실 앞에 마련되어 있는 공터가 그것이었다. 이 공터는 아랫공터가 아이들로 부대끼며 좁아터질 때 몰려올라오는 자리였다. 어쩌다가 몇몇 아이들이 거기까지 올라가 간이 화장실을 한바퀴 돌며 뛰어다녔다.
나는 아이들로부터 멀리 도망가기 위해 앞서 뛰었다. 뜀박질이 느린 아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재빠르게 숨을 자리를 찾았다. 공중화장실 뒤로 돌아가 아래로 뛰어 내려갈 수 있는, 밑에서 봤을 땐 담장이 길을 막고 있는 막다른 골목 위였다. 나는 여차하면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갈 준비를 한다고 담을 타고 몇 발짝을 걸었다. 몇발 걸음 걸어나간 담 아래 켈로와 공부방 선생님 남동생, 그리고 아랫집 우석이 큰형, 이렇게 셋이 머리를 맞대고 낄낄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뭐 그리 재밌는 걸 서로 보나, 하면서 고개를 아래로 쑥 내밀었고, 순간 나는 다리가 얼어붙었다고 해야하나 옴짝할 수없는 지경이 되어, 어어 하는 소리만 연발하는 상태가 되었다.
뭐고? 이 자슥아!
벽에 기대선 세 명의 치켜뜬 눈깔이 일제히 나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그들은 함께 보고 있던 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덮어버렸다. 그들이 펼친 책속에서 순간 본 사진은 내 눈을 의심케했다. 온통 그 장면이 시야에 가득 차올랐던 것이다. 나는 얼음에서 금방 땡으로 풀려난 것처럼 몸이 풀리며 스프링처럼 화장실 쪽으로 튕겨나갔다. 반대편에서 아이들이 팔을 치켜들고 고함을 치며 내 쪽을 향해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오른 쪽 샛길로 튀어 올라갔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큰 땅을 가지고 있는 동네의 유일한 부농, 산의 반쪽이 그의 것이라는 부자의 땅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