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코, 켈로

by 별사탕

맥아더가 구축함 선수에 서서 어둠이 깔린 바다를, 말대로 망망대해를 넋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던 기라. 갑자기 저짝에서 팍하고 불이 들어온기라. 등대에 불이 캐진기라. 그기 팔미도 등대 아이가, 그래가 막 쌔리 포를 싸뿟다 아이가. 우리 행님이 인민군 목따고 등대심지에 그거 있제, 태풍이 몰아치도 안 꺼진다카는, 그 휘발유 심지 라이타, 그거를 마, 심지 심장에 확 떤지따 안카나!


뺑코는 자신의 코때문에 생긴 별명이고, 켈로는 자기의 형님이 켈로부대출신이라고 해서 부르는 별칭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집을 켈로네라고 부른 것이다. 그집 할매는 평안도 사람이었는데, 작은 키에도 체구가 당당해서 여장부감이었고, 얼굴은 많은 주름에 험악하게 생겨 동네 아이들은 장군할매라고 불렀다. 나는 그집 앞을 지날 떄마다 대문 앞에 매어놓은 삽살이의 공포가 떠올랐다. 지금보다 더 어린 때 그집 개에게 엉덩이를 물린적이 있었기 떄문이었다. 눈이 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 개가 목줄에 묶인 채 대문앞에 퍼질러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길을 건너가야했고, 그 개를 지나쳐 가야했다. 그런데, 그 개는꼭 지나는 나를 물것 같은 가까운 거리에 엎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개 앞에 와서 망설였다. 그냥 천천히 갈 것인가, 확 뛰어 갈 것인가, 나는 살금살금 개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최대한 개 가까이 다가갔다. 일정거리를 확보한 순간 개울 건너듯 반대편으로 확 뛰어올랐다. 그 순간, 나는 개의 아가리속에 내 엉덩이가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고함을 치며 울어댔고, 개는 내 엉덩이를 물고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자 대문안에서 그 무서운 장군할매가 나왔다.


이 몹쓸 가이새끼!


장군 할매는 개를 내 엉덩이에서 뗴어내고, 얼굴이고 뭐고 닥치는대로 떄려서 개 집으로 몰아넣었다. 계속 울고 섰는 내 바지를 벗기고 어디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연고를 꺼내 들고 물린 엉덩이위에 발라주었다. 그리고 바지를 다시 입히고 등등 어루만지면서 말햇다.


니, 집 가서 어마이한테는 말하지 말라. 이 함매가 약을 발랐으이 금새 나을기야. 알간?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는 사이 장군 할매가 집안으로 들어가 내 입에 사탕을 집어 넣어 주었다.


이거 먹고 뚝하라.


할매가 입속에 넣어준 눈깔 사탕으로 볼이 불룩한채로 나는 울면서 현장을 빠져 나왔다. 신기하게도 사탕을 입속에서 쭐쭐 빨아대며 단물이 입속에 녹아들어오자 아픈 게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고, 실제로 아프지도 않았다. 나는 콧물을 닦고 눈물을 닦고 눈깔사탕의 단물에 빠져 아이들이 놀고있을 공터로 뛰어갔다.

그런 장군 할매의 막내 아들이 뺑코였다. 뺑코네 집에 가면 우리집에서는 못보던 물건들이 많았다. 주로 미군부대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미군들이 사용한다는 식기부터해서, 미국 성조기의별이 그려져 있는 밀가루푸대까지 다양한 것들이 집안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그 중에는 엠원 소총의 총알을 담았던 국방색 탄통도 하나 있었다. 그 집에서 나는 그게 제일 탐나는 물건이었다. 철로 된 그 통은 딱지나 구슬을 넣어서 보관하면 딱 좋은 통으로 보였다.

아줌마들이 켈로네에 들락거리며 양키물건들을 사갔다. 햄, 밀가루, 전지 분유, 초코렛, 비누, 술 없는 게 없었다. 그 중에는 책도 있었는데, 그 책이란 게 읽는 책이 아니고 보는 책이었다. 이 책들도 성인극화처럼 빨락종이로 되어있었는데, 성인극화의 종이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기름칠이 된 미끈한 책이었다. 극화가 만화였다면 이 책은 사진이었다.

그 때, 막다른 골목의 벽에 기대 나를 흡뜬 눈으로 쳐다보던 그 눈깔들로 보고 있던 책, 그 책장 안의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내 망막에 각인된 그 장면, 덮어버린 책장표지에 하얀색 영문 글자로 써 있던 책의 제목이 머릿속에 이미지로 프린트되었다. 나는 이제 그걸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그 책속의 장면이 계속 나를 지배했던 것이다.


요 있다.


뺑코가 만화책을 내 앞으로 던져 주었다. 극화들의 장점은 보통 단권으로 끝나서 시리즈로 이어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기있는 연재의 경우 계속 번호가 매겨지며 발행되었다. 김성주의 침실 같은 것이 그랬고, 강철수의 무하마드 일대기 같은 것이 그랬다. 뺑코가 던져준 것은 모두 단권 짜리들이었다. 여대생, 아줌마, 빠걸, 요정 마담, 술집 작부의 순정, 첫사랑 순결, 화류계와 뒷골목 깡패의 세계 이런 소재들이 주를 이루면서 단타성 소재로 써 먹고 있는 듯했다. 뺑코가 던져준 만화들도 그 테두리였다.


아줌마 집에 있나?

아이다, 시장에 가는갑던데?

와? 누가 집에 오는갑제?

아저씨 오는갑던데?


뺑코는 그 뽀족한 화살코 끝을 문지르며 한쪽으로 눈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를 뒤로 하고 나는 만화책을 싸 안고 마루를 돌아 나왔다. 애꾸 아저씨 집에 가서도 만화책을 회수한 나는 미옥이가 혼자 놀고 있는 아줌마의 집에 들어가 방 한 쪽에 쌓아놓은 만화책 위에 가져온 만화책을 올려놓았다. 방을 가로질러 널어놓은 빨래들 속에 아줌마의 속옷들이 그대로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팬티에 달려있는 레이스와 나비모양의 리본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떨렸다. 닿을듯 말듯, 만질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문이 덜컹 소리와 함께 열렸다.


오빠야, 삼일밤 자고나면 울 아부지 온다캤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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