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좀 복잡해. 근처 호텔로 가자."
나는 정혜를 태우고 영등포 로터리를 돌아 양화대교로 접어들었다. 정혜는 정안을 남겨두고 상기의 아파트에서 나왔다. 내가 정혜에게 전화를 걸고 40분이 지나서였다. 바깥은 겨울바람이 매섭게 코끝을 스쳤다.
"왜? 집이 편하지 않아?"
"문제가 좀 생겼어."
"지붕이라도 새?"
"그런 쪽이 아니고..."
"여자 문제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모호했고, 그 모호성을 정혜가 명확한 자기 해석으로 단정 지었던 것을 떠올렸다. 모든 사안에 대해 명확하게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것은 모두 내가 가진 태도에서 발현했다.
명확한 것은 명확했다. 그러나 지금 질문, 여자문제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분명, 명확하지 않다가 맞았다. 그러나, 모른다고 답을 한다면, 그 모른다 속에는 정혜가 알고 싶은 여자문제도 포함될 수 있다는 뜻을 내포시켜 버린다. 하지만 여자문제가 아니라고 판명이 난다면 철호는 정혜로부터 괜한 오해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어중간한 제스처를 취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민지에서부터 시작했다. 그 아이와 얽혀 있는 어떤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민지의 아버지를 관여시켰고, 그에게서 모종의 폭력적 행위가 내게로 넘어오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분명한 팩트임에 틀림없었다.
어떤 자가 수색동 산 밑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 자는 분명 민지 아버지의 사주에 따라 일련의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집 유리창이 깨지면서, 안방으로 달걀 모양의 캡슐이 날아 들어왔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남자였다. 깨진 유리 밖에 후드를 덮어쓴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옆에서 비추는 마당의 가로등 불빛에 반듯한 코, 강렬한 눈빛이 불빛에 반사되며 빛났던 남자였다. 놀랍게도, 대문을 열고 뛰어 나갔을 때 남자는 마당에서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 끝에 달린 가로등만 덩그렇게 빈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건드린 것이라고 판단했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 그게 뭔지 몇 날 며칠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것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그냥 단단한 타원의 공이었다. 한쪽은 바닥에 놓아 세울 수 있도록 평면으로 깎아 놓았고, 반대편은 약간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뾰족한 부분이 뚜껑처럼 열렸고 그 안에는 유에스비 잭이 튀어 나와 있었다. 여러가지로 변형된 저장장치였다. 겉보양은 책상 위나, 어디에 놓아둘 소품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리 저리 만지고 굴리고 두드려보아도 이만한 무게를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게 창문을 깼고, 그 속에 자신의 방을 엿본 사진이 몇장 찍힌 파일을 넣어 두었다.
그런 단순한 기능을 하기 위해 이런 무게감과 재질로 만들어졌기에 도무지 이것의 정확한 용도가 무언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어떤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고, 단지 세워놓고 보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관상용 달걀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모양이나 재료가 주는 질감 등이 예쁘다고 할만했다.
그런데, 지난 달 그것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졌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다. 캡슐이 날아들어올 때 노트북 화면을 쳤고, 시간이 지나면서 액정이 나가기 시작했고 화면은 검고 푸른 줄이 얼룩처럼 번져 나갔다. 나는 할 수 없이 데스크톱을 들여놓았다.
시내에 나가 조립 컴퓨터 가게에 들러 적당한 가격의 컴퓨터와 모니터를 구입했다. 프로그램 설정을 위해 방문 설치해 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내 주거에 대해 어떤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비공개상태에 두고 싶었다.
차에 싣고 와서 책상 위에 모니터를 세우고, 본체를 책상 밑바닥에 놓고 각종 케이블을 서로 연결했다. 기본적인 프로그램을 모두 깔아 뒀다고 했는데, 내가 필요한 건 그저 워드프로세서 한 개뿐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전화만 거는 용도가 아닌 것처럼, 컴퓨터도 그랬다. 본말이 전도된 도구들이었다. 어쩌면 세상 자체가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와이파이 비번을 치고 음악을 듣는 전용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출력 모드를 선택하는 화면을 클릭한 순간, 뭔가 다른 게 잡혔다. 산중에서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와이파이 중계기 하나뿐이었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네트워크가 잡힌다는 사실을 화면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뭔지 모를 네트워크에 접속하자, 두 개의 영상 파일이 디렉터리에 넣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첫 번째 영상의 제목은 warnnig이었다. 화면에 나타난 역시 두건을 쓴 남자는 나에게 경고했다. 민지에게 접근하지 마라. 경고에서 끝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상보다 잔인한 마지막 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 내용이었다. 상대는 나와 민지를 갈라놓는 것이 목적인 경고문을 읽었다.
이런 일처리 방식은 민지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민지가 말했다. 민지가 아버지를 만났고, 그녀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도 결국 같은 말이었다.
"아빠, 그분 다치게 하면, 나 가만 안 있어. 왜 그래? 왜 남의 사생활에 개입을 해? 내가 아빠 여자 이렇다 저렇다 말한 적 있어? 회사 경리계장하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거 같아? 엄마는 어쩔 거야? 방에서 겨우 나와서 친구들 만나고 돌아다니는 것도 감사한 줄 알아!"
"엄마 아빠 일은 둘이서 알아서 해. 넌 불미스런 일 안 생기게 아무나 만나서 구설에 오르게 하지 말란 말이야! 내가 이제 너 하나 간수하는 게 사는 이유가 됐어.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나서지 말아 줬으면 해."
민지 역시 단호하게 받아쳤다. 창문이 깨지는 것을 함께 목격한 민지였다. 그렇게 정리되나 싶었지만, 한순간에 일은 엎어졌다. 그리고 분명해졌다. 사설 네트워크가 새로 산 데스크톱에 잡히면서, 테러의 목적이 민지와의 관계라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두 번째 영상을 클릭했을 땐 심장을 멎게 할만큼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몰카 영상이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여자문제가 분명히 맞았다. 한 명은 민지였고 또 한명은 영상에 올려진 여자, 희수였다. 나를 안고 같이 울어주었던 그 여자였다. 나는 영상을 보고 또 봤다. 광각으로 찍힌 장면에는 전체 방의 모습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화면의 가운데 들어온 사람만이 왜곡 없이 정상적으로 보였다. 침대 머리맡 어딘가에 설치된 카메라였다. 그리고 카메라는 중간중간 왼쪽으로 옮겼다가, 다시 센터로 옮겨와 그녀의 정면을 찍었고, 나의 정면을 찍었다.
혜연과 나와의 정사장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상이었다. 저걸 누가 찍었고, 민지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이걸 어떻게 가지게 됐을까. 아, 그러고 보니 영상이 찍힌 방은 혜연의 침실이었다.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차려주었던 그날 밤의 일이었다. 남편은 출장 가고 없다던 그날 밤, 우린 혜연의 침대에서 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고, 나는 혜연을 내려다보며 동시에 침대옆 협탁에 엎어져 있는 가족사진의 뒷면에 새겨진 "FOREVER MY LOVE"라고 쓰여진 로고를 내려다본 기억이 났다.
남편의 잠옷이라며 내어주면 파자마와 가운을 걸치고 식탁에 앉아 생일상을 받고, 케이크에 불을 껐던 날 밤이었다. 그녀와의 여행에서 돌아와 하루가 멀다 하고 희수는 내 집에 왔고, 생일이 언제냐고 물었고, 침대보와 요, 이불을 세트로 맞춰 사 왔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오면 미역국을 끓여 주겠노라고 했다.
모든 게 분명했다. 혜연의 남편이 침실에 설치해 둔 카메라가 분명했다. 그런 증거를 가지고도, 그는 혜연을 내버려 두었고, 나를 내버려 둔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다시 민지 문제로 누군가 나를 협박하고 있었고, 그 협박은 제정신이 아닌 방식으로 공격적이었다. 이런 방식을 일삼는, 그게 민지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희수가 민지의 엄마란 말인가! 나는 내가 만든 생각의 연결고리 끝에 나타난 결과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각은 다시 한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나갔다. 그래, 그제서야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런 중에 민지가 아빠를 언급했다.
-아빠는 그런 일 안 했대요. 분명 아빠 방식이었는데... 아빤 아닌 건 아니에요. 쿨한 성격이라 두 말 안 하거든요. 안 했다면 안 한 거예요.
공장의 라인에 설치한 기계 렌털 대금을 분납 상환하는 게 그쪽 업계의 일이라고 했다. 설비에 들인 비용만큼 수익이 빠르게 회복되지 않으니 대금이 밀리고 이자가 늘어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마영길만의 보험이 필요했다. 연체 이자를 올리지 않는 대신 상환 기일을 지켜주면 이자율의 10프로를 감해주겠다는 구두 약속이었다. 보통 한 라인에 들어가는 기계가 일본에서 뜯어 오는 제품을 기준으로 했을 때 10억이었다. 10억의 10프로 1억을 먹는 약속이었다. 경리부장이 기를 쓰고 기한 내 완납을 했고, 마영길은 정확히 그들의 통장에 1억을 꽂아 주었다.
그렇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막대한 후환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청부업자를 동원했고, 그들뿐 아니라 온 가족이 암매장 협박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밀린 연체를 회사가 아니라 개인이 갚아야 했고, 그렇게 받은 돈은 고스란히 마영길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업계에 마영길의 소문이 돌자 반반의 결과로 돌아왔다. 마영길의 추종자들고 마영길과 인연을 끊는 자들로 갈라졌다. 상환 약속을 잘 지킨다면 마영길은 후한 보상을 했고, 그러지 못했을 떄는 악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성과급을 두둑히 챙겼으니, 안팎으로 주머니를 채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만큼 머리회전이 빨랐고 결단력이 있는 조직의 대가리 같은 인상을 주었다. 거기에다가 그는 스카이를 나온 인재이기도 했다는 것이 업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력 파워를 가져왔다. 지능적인 폭력배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이력을 민지로부터 들으며 그를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로 각인시켰고, 그런 여파에 따라 민지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로 굳어졌다. 그런데, 자신의 부친이 테러를 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 순간, 그 동안의 내 추리가 곤두박질쳤다.
좀 뒤죽박죽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결국 이런 협박영상을 보낸 사람이 불명확한 채로 남았다. 더구나, 달포 전에 그 캡슐의 특이점을 발견한 데서 나는 신변의 위협을 실감하게 되었다. 영상은 내려받지 못하게 설정되어 있었고, 내가 파일을 확인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파일은 삭제 되고 없었다. 누군가 이 캡슐을 원격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난달 말 내가 정혜에게 전화를 하게 된 이유를 만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캡슐에는 다시 영상이 하나 올라가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민지와 대화하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내 침실이었다. 한 달에 한번 연재 수익을 정산하는 주였다. 나는 수요일로 날을 잡아 정산을 했고, 그날이 되면 민지는 꼭 집을 방문해서 구두 보고를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반복되는 일정이었다.
"연재 웹소설의 수위가 높아 자체 심의를 했는데, 사용하는 어휘에 제한을 좀 두기로 했어요."
"직접적인 성기묘사는 안 된단 말이지?"
"예, 그리고 회당 섹스 장면이 반을 넘지 않도록 작가가 제한의식을 좀 가졌으면 좋겠다고도 권고받았어요."
"음, 그건 작가의 의식을 뭉개는 일인데..."
"좀 순화된 단어를 쓰시면 될 것 같아요. 구독자수가 변함 없이 3만을 유지하고 있어요. 들쑥날쑥한 것보다 일정한 선을 유지하는 쪽이 더 오래가죠. 회사로 봐도 그게 더 좋은 방향이에요. 주당 150 해서 4주면 6백이죠. 프리치곤 꽤 괜찮은 수익이고요. 학생들 가르치러 학교에 다시 안 나가셔도 될 거예요."
그런 대화 장면이 고스란히 영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나는 캡슐을 집어 들었다.
'이건, 실시간 녹화도 되는 물건인가?'
나는 뜨악하는 심정으로 캡슐을 내려다 보았다. 이걸 내게 던진 이유가 더 명확해졌다. 이건 단순한 협박용 영상을 보내기 위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 나를 실시간 감사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희수의 침실에 있었던 것이지만, 희수의 남편이 한 짓은 아닌 것. 그렇다면 아마도 희수이거나, 희수 역시 몰카의 피해자이거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릿속의 내용물들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희수이거나, 희수가 아니거나. 그녀의 방에 이런 물건을 가져다 놓을 사람,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희수보다 세살이 많다던 여자, 심리상담사 희경이었다.
나는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목적으로 돌아와 있었다. 돈이 아니었다. 사실, 수익은 민지가 정산하는 것보다 더 많았다. 주당 연재가 1회가 아니라, 많을 때는 매일 한편씩 올리기도 하니까, 내가 쓰는 만큼 수익은 올랐다. 문제는 수익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사람들의 의식, 그걸 깨려고 난 쓰기 시작한 거였다. 이 식상한 상투적인, 변함없이 견고한 체제와 세력들에 대한 파괴가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었다. 철저히 내면을 파괴하는 것, 그 후의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가만, 그렇다면 희수와 민지가 정말 모녀간이라면,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의 실사판 현실을 만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나는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 근육이 뭉치면서 목 주변이 뜨거워지고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그래서, 이건 여자문제에서 시작했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인간의 문제면서 관계의 주도권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시스템을 재정립하는 관계의 정의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했다. 사적인 행적이면서도 공적인 물음들을 던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물이 차올라 넘치면, 그 물은 이제 다른 방향을 향해 흘러가야한다. 나는 단지 하나의 방향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썩 비도덕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비윤리성을 띤다 할지라도 전개해 나가야 한다면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 인간은 서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은 이제 막 그 긴 대열의 꽁지에 붙어 서기 시작한 것일 뿐이다.
두 번째 올라온 영상에서 후드를 덮어쓴 남자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와이프 동반 미팅을 공지합니다. 1월 13일 토요일 저녁 9시 카리스 호텔 1024호, 꼭 만나 뵙기를 희망합니다.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참여여부를 확인받으시기 바랍니다. 캡슐은 항상 이 자리에 놓으시고 자주 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겠지만, 캡슐에게 말을 하면 제가 들을 수 있습니다. 따로 저에게 접촉하려고 시도하실 필요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카리스 호텔, 오늘이었다. 나는 강변북로를 따라 토요일 저녁 8시를 달렸다. 이 시간 강변의 남쪽 길은 일산 김포로 퇴근하는 차량으로 언제나 주차장을 방불했다. 거대한 규모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가는 긴 줄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