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가 정안을 다시 만난 것은, 정안과 함께 상기의 장례를 치르고 미국으로 돌아간 지 세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버섯의 끝에 혀끝을 대봐요. 처음엔 푸석한 질감을 느끼지만, 침이 발라지고 촉촉해지면 달콤해져요. 왜 그런지 아세요? 혀끝이 느끼는 단맛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단맛을 느낄 수 있다는 혀끝은 그저 단맛을 다른 부위보다 맛세포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지 혀 끝에서만 단맛을 감지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요. 사실 혀 전체가 융모를 통해 맛을 골고루 다 느끼는 거죠.
정혜는 차분하게 말을 끊어가며 또박또박 말하는 정안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입안에서 맛을 감지하는 센서, 미각 수용체가 있는 곳은 혀가 아니라는 거예요. 입천장에 미각 수용체가 분포한다고 해요. 놀랍지 않아요?
세간이 아무것도 없는 상기의 빈 아파트의 베란다에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정안이 그동안 무연고자 처리 업체에게 맡겨 모두 치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바깥을 내다보기 싫은 정안이 빈 거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싱크대 옆에 물을 끓인 주전자 하나와 봉지가 찢겨나간 믹스커피 봉지가 두 개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정안과 정혜가 나란히 손에 들고 있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가 그것이었다.
추워졌어요. 벌써 1월이 됐네요.
정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인간의 뇌는 참 묘한 구석이 있어요. 몇십 년을 가짜 지식에 놀아나고서도 여전히 혀끝은 단맛을 느끼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죠. 일종의 자기 최면이에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고, 믿음도 거기서 싹트는 거죠. 믿게 만드는 데 가장 유효한 건 보여주는 거죠. 그게 자신을 빠뜨리는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요.
정혜는 묘한 말을 쏟아내고 있는 정안을 옆으로 한 채, 자신이 세 달 만에 한국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했다. 상기가 자신 앞으로 이 아파트를 남긴 것이었다. 그리고 정안에겐 주식을 남겼다. 무연고자의 재산을 상속받고 상속세를 납부하는 절차가 있었다. 지난 3개월간 경찰은 친인척, 상속자를 찾기 위해 업무를 진행시켜 나갔다. 결국 연고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유서에 기재된 일부 재산들에 대한 상속절차를 집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행정 대리인을 내세울 수도 있었지만 정안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고, 또한 어머니의 첫제사와 철호와의 약속도 있었던 걸 겸사겸사 해서 한 번에 날을 맞춰 귀국한 것이었다.
와인 한잔 하실래요?
그런 게 여기 있어요?
정안은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 운동화 신은 발로 밟았다. 연기 때문에 조금 열어둔 바깥 베란다 문을 닫고 거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것도 없이 휑한 아파트에 처음부터 둘은 신을 신은 채로 들어왔었다. 정안은 싱크대를 돌아 작은 방으로 들어가 의자 두 개를 꺼내 왔다.
이건 못 버리게 방에 넣어 뒀거든요.
정안이 의자 하나를 정혜 앞으로 가져다 놓고 싱크대 찬장을 열었다. 거기에 보르도 잔 두 개가 엎어져 있고, 소주잔도 두 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상기와 함께 나눠 마셨던 그 잔이었다. 그리고 여기 소파에서부터 시작된 그날밤의 정사를 떠올렸다. 자신의 두 다리를 허리에 감고 안방 침대로 향하던 상기의 달뜬 심장소리가 먼 기차바퀴소리처럼 아련했다.
아무래도 담배를 사야 할까 봐요.
미국서는 피우지 않던 담배를 한국에 오면 꼭 이렇게 피게 된다는 사실을 정혜는 새삼 되새겼다. 정안이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던 답배갑 속에서 몸통이 하얗고 가느다란 담배를 하나 빼 주었다.
담배를 건네받고, 정안이 켜주는 라이터불을 빨라 당기면서 정혜는 생각했다. 정안도 상기의 여자였을 것이다. 이제 막 서른이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애를 사귀었었다니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핏 5년이라고 했던 걸 들은 것 같았다. 그 시간은 상기가 미국에 다시 오지 않았던 시점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나에게 오지 않았던 것이 이 아이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우리 둘은 모두 그의 여자인 셈이었다. 한 사람을 공유한 관계라는 점에서 내가 다니엘과 철호의 여자인 것과 같았다. 학교 다닐 때 수학선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 침을 손바닥에 뱉어 놓고 다시 입 속에 넣으라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겠니?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건, 입 속에 있는 침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삼키잖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큰 차이였다. 상기와 관계한 두 여자, 정안과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지금은 서로가 상기와 관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로 몰랐을 때는 입속의 침과 같은 것이어서, 언제든 꿀꺽 다시 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니엘과 철호역시 전엔 서로에 대해 몰랐지만 이제 알게 된 상태에서 전처럼 꿀꺽 삼킬 수없게 된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는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 전의 관계가 정리되고 후의 관계가 새로 맺어지는 것이다.
보일러 틀지 않고 방치된 집이라, 와인이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을 거예요.
정안이 내 잔에 쿨럭쿨럭 빨간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곤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우고 잔을 들어 내 잔과 부딪쳤다.
늘, 정혜 씨였어요.
뭐가요?
늘, 전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거든요.
보르도의 스템을 잡은 손가락 끝에 짙은 바이올렛 매니큐어가 반짝거렸다. 굴곡 없이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스템을 가지런히 쥐고 있는 모양이 어린 나이에도 품격이 있어 보였다.
저와 자던 날은 잠을 못 잤어요. 어쩌면 늘 잠을 못 잤을지도 모르죠. 혼자일 때 잘 자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전, 자꾸 올라오는 그 사람을 더 끌어안아 주었어요. 절 그만큼 사랑하는 줄 알았거든요.
정혜는 정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청바지천으로 만든 모자를 눌러쓴 정안은 긴 머리를 올려 묶은 꽁지를 모자 뒤 조임 줄 바깥으로 빼 걸었다. 폭이 좁은 챙 아래로 그녀의 눈이 반쯤 가리어졌고, 하얀 얼굴에 입술이 붉었다.
결혼하자고 했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거죠.
마음만 먹었으면 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요, 마음을 그 사람이 못 먹었어요. 뭐가 크게 걸리는 게 있나 보다 했죠.
걸리는 거?
예, 정혜 씨요. 그게 정혜 씨였어요.
정혜는 입속에서 길게 연기를 불어 냈다. 연기는 거실 허공 속으로 퍼져 베란다 쪽 상공으로 올라갔다.
왜? 나였대요?
정안이 포개 앉은 무릎의 찢어진 청바지 틈으로 하얗고 얇은 다리가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다시 벌어진 버버리 코트의 깃을 세우고 가만히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마치, 뇌가 그렇다고 명령하는 것 같았어요. 처음에 잘못된 정보가 들어온 다음부터 계속 뇌는 작동을 하고 있는 거죠. 시간이 흐르고,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도 잘못된 정보가 가동시킨 뇌는 관성처럼 계속 같은 것을 돌리고 있는, 그런 거 말이에요.
나는 가슴 한쪽으로 뭔가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손가락 사이에 꽂힌 담배에서 그대로 수직으로 연기가 타올랐다. 정안의 빨간 입술이 '-요'에서 멈춘 그대로 동그란 모양으로 정지되어 있었다. 두 사람사이에 정적이 흘렀고, 창밖에서 뜸뜸이 자동차 경적이 새들어왔고, 오토바이엔진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웠다가 사라졌다.
정혜는 한쪽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다른 손으로 보르도 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쓰고 떫은 맛이었다.
자기가 결혼하면, 누나를 볼 면목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끝까지 누나의 순수한 마음 하나로 남고 싶다는 얘길 했어요.
알듯 모를 듯한 상기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혜는 와인잔의 스템을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베이스를 지그시 눌렀다.
바보...
정혜는 낮게 신음하듯 한 개의 단어를 읊조렸다.
저기, 열린 만큼 저 난간 밖에 상기 씨가 매달려 있었어요. 날 기다린 것 같았어요. 그러지 말라고 고함을 쳤어요. 와서 자길 잡아달라고 손을 내밀었어요. 달려가 손을 잡았어요. 이러지 마, 이러면 안 돼, 소리를 질렀어요. 이걸 정혜에게 꼭 전해달라고, 약속을 해달라고 했어요. 장남처럼 웃으며 그러지 않으면, 자긴 떨어지겠다고. 그리고 봉투를 건넸어요. 전 울면서 소리쳤어요.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그 말을 남기고 그가, 내 손을 뿌리쳤어요.희미하게 단어하나만이 귓가에 남았어요. 미안…
정안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한 장을 꺼내 정혜 앞으로 내밀었다. 상기의 편지였다. 정혜가 읽은 그 편지는 한 페이지 짜리, 문서처럼 정갈한 명조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이제 누나라고 불러보지도 못할 사람, 몸도 마음도 멀어졌지만 항상 누나 옆에 있고 싶었어. 누나로 살았고 누나로 이유가 되었어. 모래알 속에서도 내 삶이 반짝거린 것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다는 지향점도 모두 누나가 내게 해놓은 일이었어.
왜 사람은 이별 후에 사랑을 알게 될까. 누나가 결혼한다고 날 떠난 날, 못 견디게 사무친다는 심정을 알겠더라. 그때부터 난 병든 것 같아.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커다란 피멍이 들었어. 그리고 다시 누나를 만나고 난 알았어.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걸.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끈들로 얼키설키 엉켜버린 거미줄에 걸린 기분이었어. 철호형 좋은 사람이지. 다니엘도 좋은 사람이었어. 왜 누나 옆에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만 생기는 것인지, 나만 혼자 싫은 사람이 된 느낌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을 넘어갈 자신이 내겐 샹기지 않았어. 둘, 셋? 감당할 수 없는 관계들이 너무 벅찼어.
내가 더 힘을 냈으면, 전투적으로 뚫고 나갈 수 있는 성격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냥, 그들 중 한 명으로 누나 옆에서 난, 평생 그렇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결정적으로 난 그게 안 돼. 누나를 오롯이 내가, 다 갖고 싶었다. 그게 진짜 내 마음이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
원망하지 않아. 누나가 한 선택이니까, 그게 뭐든 존중해야지. 내가 누나를 더 많이 사랑할 거라고 수천번도 더 다짐을 했어. 그리고 이게 내 선택이란 것도 알아주고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남아 있는 내 삶의 흔적들을 누나가 정리해 줄거라 믿어.
이 세상 어디에라도 사랑이라는 땅이 있거든, 난 분명 거기에 가 있을 거야.
안녕, 누나, 내 영원한 사랑.
가슴이 먹먹했다. 목구멍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걸려 숨 쉬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는 듯했다. 정혜는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컥하는 소리를 내며 숨이 터져 나오며 울대에서 고된 신음이 목줄기를 긁으며 올라왔다.
정안이 앞으로 몸을 당겨 정혜를 가슴 께로 끌어안았다. 정안의 손바닥이 정혜의 등을 어루만지고 쓸어내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안고 안겨서 사방이 어둠에 젖어들 때까지 그렇게 축축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끌어안고 있었다.